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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가 꼭 무조건 나쁜 게 아니에요 (143/303)

격차가 꼭 무조건 나쁜 게 아니에요

“앞으로 계약서 도장 찍기 전까지, 강 과장님이 종종 파리 출장을 오셔야 할 거 같아요.”

호텔에 도착을 했을 때였다.

지사장이 먼저 와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강인성 과장은 고성표 부장의 도움으로 빠르게 체크 인을 한 뒤 짐만 풀어 놓고 나오겠다며 객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강인성 과장에게 삐에르 에슈메 쪽과의 레시피 계약에 관한 나머지 내용을 모두 맡겼다.

“네, 그건 그렇게 하면 되는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강 과장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런데요?”

“혹시 해당 내용을 식품의 편승일 사장님이나 모범태 전무님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당연히 모르겠죠? 아직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좀처럼 얼굴 표정을 펴지 못하고 있는 강인성 과장이었다.

“과장님께서 자신을 가지고 진행을 하는 사안이라 그분들도 크게 저항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레시피 가격만 1.5밀리언 유로가 들어가는 내용인 만큼, 여기에서 더 발전되기 전에 그분들과 해당 내용을 미리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강인성 과장의 염려에는 항상 일리가 있다.

작은 걸 크게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큰 걸 작게 보지도 않는 인물.

그게 바로 강인성 과장이다.

그래서 벌써부터 내가 참 신뢰를 하는 친구이기도 하고.

“그렇죠. 원래라면 그렇게 해야 순서가 맞는 거죠.”

다행히 내가 자신의 우려에 수긍을 하자, 안심이라는 듯 표정을 풀기 시작한 강인성 과장이었다.

하지만 난 강인성 과장의 표정이 계속 저렇게 안심을 하도록 도와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과연 제가 식품으로 옮겨 가서 원칙대로 기획안을 준비하고 기획 승인을 기다린다 치면… 그 사람들이 오케이, 알았다, 한번 해 보자… 그럴 거 같으세요?”

재경항공과 재경식품의 경영진 대부분이 진작에 정태 쪽으로 붙은 사람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우리 재경 그룹 안에 아무도 없을 거다.

모직이야 정태 놈이 애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래서 경험이 없는 사업 부문이었다 보니 내가 아주 손쉽게 장악을 할 수 있었지만, 식품은 모직처럼 내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강인성 과장 역시 해당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염려를 하고 있는 중일 테고.

“1년 반 전에 모직에서 부서별 리크루팅을 제안하고 밀어붙였던 것처럼, 이번 건 역시 식품 안에서 효과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한 준비 운동을 하는 거다… 정도로 생각하세요.”

“…….”

“나란 사람 존재 자체가 모직에서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식품에선 불편할 겁니다. 회장님이 직접 하신 인사라 신경도 써야 할 것이고, 손정태 사장의 눈치도 봐야 할 거고. 그렇다고 제가 손정태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는 거 아닙니까. 나는 내가 생각했을 때 재경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건 그게 뭐든 다 할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과장님께서 생각하신 재경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게….”

“식품으로 넘어가서 최대한 빨리 교통정리를 해 버리는 거죠.”

“과장님은 항상 강공이시군요.”

“우리 재경을 상대로 작전을 세울 이유가 없으니까요. 작전이라는 건 이번에 부경유통 토막 낼 때 소액 주주 연대를 움직였던 것처럼 적을 상대할 때나 쓰는 거지, 내 식구를 상대할 땐 쓰는 게 아니죠. 진짜 써야 할 땐 또 써야겠지만.”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강 과장이 물었다.

“실례되는 질문인 줄 아는데,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손정태 사장님과는 혹시 관계가 불편하신 겁니까?”

이 질문 앞에선 강인성 과장의 입장을 이해해 줘야만 했다.

어쨌거나 내 사람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재경 안에서 자신의 출세 여부는 어디까지나 나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닌데, 앞으로는 불편하게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네?”

날 따라 객실을 찾아 걸으며 강인성 과장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어 볼 생각이라니요?”

“그렇게 해서 손정태 사장이 긴장을 할 수만 있다면요.”

“과, 과장님.”

“그동안 우리 재경 그룹, 너무 평화롭지 않았나요?”

“……?”

“회장부터 시작해서 그룹 사장단, 임원진… 병적으로 평화로움에 집착해 왔단 생각 안 드세요?”

“그게 무슨….”

“다들 너무 친해요. 다들 너무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래서 같은 임원끼리는 크게 격차라는 것도 없어. 가끔씩 보면 회사가 아니라, 친목 도모회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이게 무슨 조직이고, 기업이에요?”

내가 배정받은 객실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강 과장은 자신의 방을 찾아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격차가 꼭 무조건 나쁜 게 아니에요. 어떨 땐 꼭 필요하기도 하고. 특히 기업이라는 자본주의 집단 안에서는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들과 똑같이 받는다면 누가 열심히 하려고 하겠어요? 아무리 편하게 있어도 태어나길 재경의 후계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룹을 다 물려받을 수 있다면 누가 잠시 머무는 그 자리에 절실할 수 있겠냐고. 안 그래요?”

“…….”

“그래서 내가 욕심을 내 보기로 했어요. 앞으로는 서로 긴장을 하는 거지. 지금 당장은 내가 손정태 사장의 대항마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혹시 또 알아요? 그 대항마가 종마를 잡고 종마로 올라설지.”

주위를 빠르게 확인하며 강 과장은 내게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주길 부탁했다.

그런 강인성 과장의 모습에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요. 내 배에 탄 게 후회된다면, 지금이라도 내리면 되는 거예요.”

“내리긴 뭘 내립니까?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런 말까지 직접 다 들었는데.”

“까먹어 줄게요, 과장님한테 이런 말 했다는 거.”

“제가 보기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서요. 한 번 들은 말은 잘 까먹지를 못합니다.”

“푸흡.”

대신 객실 문을 열어 주며 강 과장이 말했다.

“잠시만 쉬고 계세요. 금방 가방만 넣어 놓고 오겠습니다.”

* * *

지사장이 무척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었다.

무거운 푸아그라가 식전 음식으로 나오는 프렌치 스타일의 스테이크 전문점이었다.

도톰한 푸아그라가 올려진 앞접시가 들어왔고, 적당히 말랑한 그것을 버터 나이프로 덜어 딱딱한 바게뜨 빵에 발라 먹는 게 끝이 날 즈음 메인 요리가 올라왔다.

사각의 흰 접시 위로 적당한 두께로 썰어진 스테이크용 생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총 여덟 덩어리였는데, 말이 적당한 두께라는 거지 스테이크용 고기치고는 얇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게 생고기라는 게 함정이었고.

일반적인 스톤 스테이크도 아니고, 아무런 온도도 없는 그저 흰 사기 접시 위로 생고기가 올려져 식탁 위로 올라왔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조리를 해 주겠다는 건가….

색다른 요리 앞에 상상력을 만들어 내기도 전에 뜨겁게 달궈진 냄비를 들고 주방장이 직접 우리 테이블로 찾아왔다.

생고기가 올려진 접시 위로 붓기 시작하는 게 뜨겁게 녹인 버터라고 했다.

그 버터를 고기 위로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한 번에 모든 고기가 다 잠길 정도로 부어 버린 주방장은 집게로 고기를 뒤집어 가며 어느 정도 자기가 만족하는 선까지 고기가 다 익었다고 판단을 했던지 빈 접시에 익은 고기들을 덜어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핑크 솔트를 뿌렸다.

그걸 딱 한 입 입에 넣어 씹기 시작하는데….

이야, 무조건 오늘 저녁은 내가 사야겠다 싶었다.

지사장의 안내로 오긴 왔는데, 음식의 수준을 보아하니 분명이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가는 집이 틀림없었다.

이런 고급 식사 계산을 지사 법인 카드로 하게 만들 순 없는 일 아닌가.

내가 계산을 해야겠단 결심이 서는 순간, 와인도 좀 수준이 맞는 걸로 새로 한 병 다시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한 와인 리스트가 들어왔고, 내게 오려는 와인 리스트를 지사장이 가로채려 할 때, 그걸 내가 다시 뿌리치는 순간 이 자리의 식사 계산은 내가 하는 것으로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거였다.

새로 도착한 와인으로 입을 헹궈 내며, 지사장과 고 부장에게 부탁했다.

“리안 그 양반이 몇 명이나 받아 주겠다고 할지 모르겠네요. 한국에서 제가 레시피를 받을 사람을 보내면, 그 사람들 비자를 방돔 지사에서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체류를 시키면서 레시피를 배우게 할 계획이신데요?”

지사장의 물음에 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다가 대답했다.

“제가 그 집 마카롱을 한국에 가져가 봐야겠다고 결심을 한 게, 작년 추석이었어요.”

“작년 추석이었으면….”

“네, 처음 제가 생뚜앙 지사를 방문해서 그집 마카롱 맛을 봤을 때였죠. 그동안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쨌거나 제 소속은 모직이니까요. 그렇게 오래 기다린 만큼,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맛을 그대로 가져와야 하는 거기 때문에, 급하게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레시피를 전수받을 사람들이 충분히 숙련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줄 계획이에요.”

역시나 지사장도 강인성 과장과 비슷한 염려를 내게 표했다.

“그런데 아직은 모직에 계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식품 쪽 분들이랑은 이야기가 다 끝난 내용입니까?”

내 생각을 먼저 들은 강 과장은 그저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을 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요령껏 조율하면 되는 부분이니까. 제가 한국에서 사람을 뽑아서 보내면, 비자부터 주거 부분, 그리고 필요에 따라 통역 부분까지 준비를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 본사에 계신 사장님께 승인을 받고, 준비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여기 고 부장 시켜서 협조를 하겠습니다.”

난 그 내용을 고 부장이 책임을 지고 진행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인물이 맡을 수 있게 준비를 해 달라고 지사장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고 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무리 식품의 직원들이 오는 거라도, 비자 관련된 내용이나, 주거 부분은 제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장님은 이제 한국 들어올 준비 하셔야죠.”

“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처음부터 2년 이야기하고 와 계시는 거 아닙니까.”

“그야….”

“방돔 지사 이전 건부터 시작해서 주재원 티오 확대까지, 큰일은 이미 다 해 놓으셨잖아요. 이제 들어오셔야죠.”

그 부분에 있어선 고 부장 본인도 궁금한 게 많다며 조심히 운을 띄웠다.

“저도 집사람이랑 딸애 데리고 올 때 2년을 이야기하고 들어온 게 맞긴 하는데, 아직 본사 쪽에서 별다른 말이 없네요. 지금쯤이면 어떤 자리가 비어 있다는 식으로 살짝 귀띔 정도는 해 줄 만도 한데, 아직 제가 본사 통해서 따로 들은 내용이 없습니다.”

지사장 역시 따로 들은 내용이 없다며, 고 부장이 느끼고 있을 갑갑함에 힘을 보태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온 거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겠다고.”

“네?”

“제가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처음 지사 생활하러 가실 때.”

“……?”

“지사장님이 지사 규모를 더 키울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시고, 인사적인 부분에서 지사를 지사답게 세팅을 해 놓고 복귀를 하실 땐 제가 정말 귀하게 다시 모시겠다고요.”

여전히 내가 무슨 제안을 할지 감을 못 잡겠다는 표정으로 고 부장은 나와 지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저랑 같이 식품 생활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어, 어디요?”

“재경식품이요.”

“식품이요? 제가요?”

“네. 앞으로 부장님과 식품에서 함께해 보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모직에서와는 달리 식품 쪽에선 부장님 정도 포지션의 제 사람이 한 분 정도는 꼭 필요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조동희 전무님과는 이미 이야기를 다 끝냈습니다. 조 전무님이 임원 자리 하나 만들어서 다시 본사로 불러 주기로 하셨다지요?”

“…….”

“그 자리 식품에서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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