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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간다 (144/303)

나도 간다

자리가 많이 길어졌다.

손정훈 과장 일행을 호텔까지 모셔다드린 뒤, 천천히 걸어서 집에 도착한 고성표 부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7년째 차고 있는 시계다.

몽블랑.

부장 승진이 확정되고, 첫 부장 출근 날부터 차기 시작했던 시계.

아내는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이참에 10년도 더 넘은 고물차를 팔아 버리고 차를 새로 한 대 뽑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

짠순이 아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제안은 결코 아니었다.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고 부장은 앞으로 10년은 더 거뜬히 탈 수 있는 차를 왜 바꾸냐며, 5년 안에 임원 승진을 해내고 회사가 제공하는 차를 탈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아내가 던져 준 유혹을 뿌리쳤다.

대신 300만 원이 살짝 넘어가는 기계식 시계를 하나 샀다.

그렇게라도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부장이 롤렉스를 찬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고 부장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마음은 당연히 롤렉스를 사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다음으로 욕심이 나는 브랜드가 오메가였다.

하지만 큰마음 먹고, 이 정도는 충분히 하나 구입할 수 있다는 연출을 해내며 오메가 숍으로 아내와 함께 들어갔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저 브랜드와 디자인이 너무 올드하다는 핑계로 그 옆에 있던 몽블랑 숍을 들어갔다.

클래식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

모델에 따라 이 정도면 충분히 질러 볼 수 있겠다 싶은 가격대.

대기업 인사부 부장으로 승진씩이나 했지만, 여전히 고 부장에게 시계 하나에 300만 원은 큰 사치였다.

그 시계를 벌써 7년째 차고 있다.

그리고 이 시계 이후로 아직까지 고 부장은 자기 스스로에게 아무런 선물을 못 해 주고 있었다.

“후우….”

분명 잘살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을 해내고 있는 삶이다.

더 이상 손에 꼽히는 간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재경이라고 하면 한때는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걸출한 대기업 아닌가.

그런 재경의 모직 사업부에서 인사부장을 거쳐, 지금은 해외 지사로 가족들을 다 데리고 넘어와 딸아이는 국제 학교를 다니게 만들었고, 짠순이 아내는 이곳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사모님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할까.

왜 이렇게 지난 세월 열심히 살아온 노력에 비해 손에 거머쥔 게 없는 거 같은 걸까….

입사 동기 중 임원 승진을 가장 먼저 해낸 영업 이사 이명철은 시니어즈의 급성장과 퍼스펙티브의 성공적인 론칭, 거기에 따라온 기대 이상의 매출. 그리고 방돔 지사에서 섭외해 낸 많은 수입 명품 브랜드의 컨트롤 매출로 올 한 해 성과급으로만 4억 이상을 가져갔다고 한다.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왜 이렇게 계속해서 줄을 잘 못 서는 걸까….

“아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딸 나영이의 방문이 열리며 눈이 반쯤 감긴 딸아이가 반겼다.

“어, 벌써 잘려고?”

“10시 넘었어.”

“알았어. 들어가, 들어가 자.”

“수고했어, 아빠. 아빠도 얼른 씻고 주무세요.”

“그래. 들어가, 들어가.”

딸아이가 방으로 들어갔고, 침대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던 아내가 현관까지 나왔다.

“많이 늦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나 보네?”

“뭐, 그냥….”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네 명이서 와인 두 병.”

“아까 그 시간부터?”

“어.”

“피곤하겠다. 얼른 씻어.”

“그 혹시 집에….”

뭔가가 살짝 아쉬운 기분이 도는 고 부장이었다.

“응?”

“소주 남은 거 있나?”

“소주?”

“왜 그때 먹다가 반 병 정도 남겼잖아.”

“이틀 전에 갈비찜 하면서 거기에 넣었는데? 왜? 한잔 더 하시게?”

“아니, 그냥… 뭔가 조금 아쉽네.”

“맥주는 있는데, 맥주 한잔할래?”

“맥주?”

“아, 맞다! 이번에 선동이네 한국 들어갔다 오면서 사다 준 쥐포도 집에 있다. 내가 쥐포 구울 테니까 같이 맥주 한잔할까? 나도 입이 살짝 심심하던 참이었어.”

고 부장의 아내는 남편의 재킷을 받아 주며, 기분을 맞췄다.

“그럴까?”

“내가 술상 차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씻고 나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로 오늘 하루 바깥에서 얼어 있던 몸을 녹여 내며 고 부장은 생각했다.

과연 이게 기회인가, 아님 절대 잡지 말아야 할 썩은 동아줄인가….

손정훈 과장이 식품으로 옮겨 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아쉬운 감정이 컸다.

그가 조금만 더 모직 생활을 한다면, 그래서 고 부장 자신도 지사 생활을 끝내고 본사로 돌아갔을 때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그의 사람이 되어 아무런 경험도 없는 식품으로 넘어가는 건 불안했다.

모직을 제외한 항공과 식품, 그룹 본사까지… 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주요 인사들은 하나같이 손정태 사장의 사람들이다.

이건 자칫 재경에서의 생명 줄이 걸린 결정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는데….

고 부장은 가장이었다.

근거 없는 기대보다는 조금이라도 선명한 확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

그럼에도 고 부장의 가슴엔 알 수 없는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직장 생활의 목표였던 고성표 부장이었지만,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이 도전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자, 아내는 벌써 꽤 그럴듯한 술상을 받아 놓고 있었다.

고추장과 마요네즈가 함께 담긴 작은 양념 종지.

노릇하게 구워진 쥐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져 있었고, 요즘 한국에선 비싸서 잘 사 먹지도 못하는 튼실한 딸기가 꼭지가 따진 채 접시에 담겨있었다.

작은 접시에 조미김을 옮겨 담는 것으로 술상 차림을 끝낸 아내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받으으시오, 바아드으시이오….”

“따르으시오, 따아르으시이오…”.

아내와 함께 가벼운 짠을 한 다음, 단번에 반컵을 비워 버린 고 부장.

아내는 쥐포를 뜯으며 남편을 빤히 쳐다봤다.

“혹시 뭐 오늘 회장 아들내미 의전하면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데 왜 생전 집에선 잘 찾지도 않던 소주를 찾아?”

함께 쥐포를 뜯으며 고 부장은 망설였다.

이야기를 해, 말아?

결국 고 부장은 둘러서 아내의 생각을 물어봤다.

“나영이는 요즘 학교에서 좀 어떻대? 이젠 수업 잘 따라가지?”

“즐겁게 잘하고 있어. 이번 주말에 같은 반 애 집에서 파티를 한다고, 거기에서 자고 와도 되냐고 묻길래 일단 내 선에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내일 아침쯤 당신이 못 이긴 척 그러라고 해 줘.”

“이런 거 보면 당신도 참 얄궂어. 왜 보내 줄 거면서 애 애간장을 태워?”

“이런 걸로 너무 쉽게 부모가 허락해 주는 버릇해 버리면, 나중에 한국 들어가서 애 적응 안 돼. 여긴 여기고, 한국은 한국이야. 부모가 적당한 선을 알려 줘야지.”

“당신은? 당신은 어때?”

“나?”

“당신이 제일 고생하고 있잖아. 나야 일하러 회사에 가면 결국 한국에서 하던 거랑 별반 없는 하루 일과. 나영이도 학교 가면 고만고만한 친구들이 있고. 당신 혼자 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할 거 아냐.”

맥주 한 모금을 마신 후, 고 부장의 아내가 물었다.

“왜? 이번에도 임원 승진은… 잘 안 될 거 같아?”

그에 고 부장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고 부장의 아내는 편하게 미소 지었다.

“내 생각은 그래. 원래 우리 계획대로 여기 생활 2년 정도 한 뒤에 당신이 임원 승진을 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아직까지 회사에서 아무런 말이 없다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해석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해.”

“…….”

“차라리 잘됐어. 여보. 당신 스트레스 받지 마. 애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당신은 이미 애를 쓸 만큼 충분히 다 썼어. 임원 그거 달면 뭐 해? 말이 임원이지 결국은 재계약 못 하면 끝인 계약직인 거잖아.”

고 부장은 이런 아내가 항상 고마웠다.

“나는 우리 가족, 여기에서 2년 정도 더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진심이야?”

“당연하지. 우리가 지금 돈을 얼마나 많이 벌고 있어?”

“우리가?”

“그럼. 우리 살던 집 지금 월세 놓고 들어왔잖아. 거기에서 매달 들어오는 월세. 결국은 없던 수입이 잡히고 있는 거잖아.”

“그것도 곧 계약 기간 2년 다 되어 가네.”

“재계약하면 되지. 딴 데로 가겠다고 하면 다른 세입자 찾으면 되는 거고. 그리고 나영이 이제 영어 엄청 많이 늘었어. 불어도 곧잘 하고. 애가 당신 닮아서 언어 머리가 있어. 지금 나영이 상태로는 한국 학교 과정을 따라가게 만드는 거보다, 만약 우리가 2년 정도 더 여기 생활을 한다는 가정하에 언어 쪽으로 대학 수시를 준비하는 게 더 유리할지도 몰라. 아니면 아예 여기에서 대학을 들어가게 만들어도 되고. 어차피 대학 등록금은 당신 회사에서 자녀 학비 지원 쪽으로 받을 수 있는 내용이잖아. 그거 외국 대학교도 다 받을 수 있는 거지?”

“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해, 여보. 지금 우리 나이에 진짜 돈을 버는 건 어디 안 아픈 거야. 이제 우리 나이가 그렇게 됐어. 이만큼 살면 됐지, 우리가 뭐가 아쉬워? 나도 나영이 방학 때마다 애 데리고 한 번씩 한국 들어갔다 나오는 걸로 충분히 여기 생활 2년 정도는 더 버틸 자신이 있으니까 당신만 괜찮다면 나도, 나영이도… 우리 다 괜찮아. 마음 편하게 먹어.”

* * *

새벽 1시.

고성표 부장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한국의 출근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선 아내가 얕은 숨을 몰아쉬며 자고 있었고, 기다렸던 시간이 되자 고 부장은 조심히 침대를 내려왔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양말을 찾아 꺼내 신고 외투를 챙겨 입을 때였다.

“어디 가?”

예민한 아내가 협탁 위 스탠드 불을 켜며 뒤척였다.

“자.”

“어디 가는데?”

“밖에 담배 한 대 피우러.”

“밖에 추워. 그냥 베란다에서 피워. 왜 안 하던 짓을 해?”

“한국에 전화할 일이 좀 있어.”

“……”

“자. 금방 들어올 거야.”

“두껍게 입고 가.”

고 부장은 외투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어 그 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그나마 이 시간에 불을 켜 놓고 있는 단지 내 공원 벤치로 향했다.

그곳에서 차가운 나무 벤치에 앉아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어렵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 부장.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조동희 전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무 아침 일찍 전화를 드리는 건 아닐까 했던 걱정도 잠시, 조 전무의 음성은 밝았다.

“출근하셨습니까, 전무님.”

―어, 이제 막 출근해서 커피 한잔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거기 지금 몇 시야?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해?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통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럼. 괜찮아.

“저기 전무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 부장은 용기를 냈다.

“다름이 아니라… 아직 본사에 제가 마땅히 갈 만한 자리가 없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잠시가 고 부장에겐 한참이었다.

―왜?

“아니, 그냥… 지금쯤 뭔가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한데, 아직 아무런 말이 없어서요. 하하.”

―오늘 손정훈 과장 만난 거 아니었나?

“네, 만났습니다. 제가 직접 의전을 했고, 저녁도 지사장하고 다 같이 했습니다.”

―손정훈 과장이 별말 없었어?

그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건데….

“그게….”

―이야기가 잘 안 된 거야?

“제가 아직 답을 못 했습니다. 식품 쪽으로는 제가 생각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어서, 그 자리에선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왜?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거 같고, 그래?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싱긋이 미소를 짓고 있을 조 전무의 얼굴 표정이 그려지는 고 부장이었다.

“그간 제가 재경에 입사를 해서 지금까지 해 온 게 인사인데, 식품 쪽에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인사만큼 소속 이동이 용이한 분야가 어디에 있나. 결국은 사람을 만지는 게 인사의 일이고, 지금까지 해 온 자네 경력이라면 어딜 가서든 그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건데.

“그것도 제가 어느 정도는 식품으로 넘어가서 비빌 구석이 있는 상태여야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모직이 아닌 식품으로 넘어간다면 저 하나 바로 설까 말까인데, 거기에서 제가 손 과장한테 힘까지 되어 준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저 혼자서 그걸 해낸다는 게… 저는 말이 안 되는 거 같습니다.”

―왜 혼자야? 누가 그래? 자네 혼자 간다고?

“강인성 과장이 손 과장과 함께하기로 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하고 강 과장은 입장이 크게 다르죠.”

―나도 간다.

“네, 그러니까요. 전무님도 같이 간다는….”

―…….

“네? 여보세요? 누… 누가 간다고요? 전무님도 식품으로 같이 가신다고요?”

―손 과장이 그 말은 안 하던가?

고 부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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