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아예 기회가 없는 거야
아침부터 걸려 온 재경식품 편승일 사장의 전화.
정태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의아했다.
불과 며칠 전 편 사장과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정훈이가 식품 쪽으로 옮겨 간다고 하니까 잘 좀 부탁한다는, 형으로서의 형식치레를 했던 정태였다.
습관처럼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정태.
통화를 시작한 후로 내내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네, 사장님.”
통화가 이어질수록 정태의 머릿속으로는 물음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구요? 조 전무님이요?”
순간 정태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님 편 사장이 뭘 잘못 이해했거나.
―네, 평소 안 그러시던 분이 어제 먼저 전화를 주셨어요. 언제 시간 되면 같이 공이나 치러 가자고 하면서요. 사장이야 제가 먼저 달았지만, 어쨌거나 한때엔 제가 바로 옆에서 모셨던 분 아닙니까.
“네, 그렇죠.”
―저한테 갑자기 만약에 자기가 손정훈 과장과 함께 식품으로 옮겨 가게 되면 불편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 혹시 식품으로 오시는 거냐… 그렇게 물어보니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서로 불편한 게 없었으면 좋겠다고만 말을 하고, 그 뒤로는 또 말을 흘리지 뭡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아무리 말을 흘리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음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보지 그러셨습니까?”
―물어봤죠. 물어봤는데 조만간 같이 공이나 치자고,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가서 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리시는 거예요. 잘 아시잖아요, 조 전무님 스타일.
정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 전무가 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됐고, 스너프 쪽으로 모셔 오려고 그렇게나 공을 들였음에도 고사를 했던 양반이 정훈이가 식품으로 넘어가는 게 확정이 된 이후, 같이 넘어갈 듯한 뉘앙스를 직접 풍기고 다닌다?
―혹시 사장님이 조 전무님을 따로 만나서 부탁을 넣으셨던 내용인가 싶어서요.
“제가요?”
―각별한 사이시잖아요, 두 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무리 각별해도… 만약 그럴 거였음 제가 사장님도 함께 모시고 그런 이야기를 드렸겠죠.”
―네, 저도 그게 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룹 본사에서 따로 이야기가 내려온 것도 없는데, 꼭 우리 식품 쪽으로 오실 것처럼 말씀을 하셔서요. 사장님 말씀이 따로 있었다면 모를까, 제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지는 정태였다.
편 사장의 이야기만 듣고 뭔가를 판단할 순 없다.
하지만 조동희 전무는 결코 경솔한 인물이 아니다.
뭔가 아무런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편 사장에게 그런 연락을 넣었을 리가 없다.
편승일 사장의 재경식품 사장 자리 연임에 가장 큰 힘을 실었던 게 정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조 전무님이 저희 식품 쪽으로 진짜 온다고 하시면, 저나 모범태 전무 입장이 많이 난처해질 것 같습니다.
“난처해질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되는 거죠.”
―그래도 조 전무님은 그룹 안에서….
“저는 따로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몰랐던 내용이에요. 그리고 만약 실제 그렇게 인사이동이 이뤄진다면, 그룹 본사의 결정일 텐데 따르셔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네, 그럼요. 당연하죠. 저는 혹시라도 사장님 생각이신지, 그게 궁금해서 연락을 드려 본 겁니다.
“아뇨. 아마도 제가 아니라, 정훈이 생각일 듯싶네요.”
―손정훈 과장이요?
정태는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 창 앞으로 섰다.
창밖을 내다보며 정태가 말했다.
“조 전무님은 회장님께서 직접 그룹 본사 인물로 생각하고, 일부러 계열사 사장 자리에 앉히지 않고 계신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회장님 생각 역시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
“저도 아니고, 회장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이유는 더 없고, 그렇다고 조 전무님이 직접 그런 이동을 자발적으로 원하신 건 더더욱 아닐 거 아닙니까.”
―…….
“그럼 남은 건 정훈이밖에 더 있겠습니까? 남 사장이야 모직이 갑자기 커졌는데, 어떻게든 조 전무님을 곁에 두고 임원들 다지기를 들어가고 싶지, 딴 데로 빼앗기고 싶지는 않을 거고요.”
―네,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 모직만큼 내부적으로 확장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 없는데, 지금과 같은 모직 상황이라면 남 사장 입장에서는 손정훈 과장의 이동이 확정된 이상 조 전무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텐데….
“며칠 기다려 보고, 따로 다른 연락이 없으면 사장님이 조 전무님한테 먼저 전화를 넣어 보세요. 공 치러 가자고 했다면서요?”
―빈말이 입에 달려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누가 진짜 같이 공을 치러 가랍니까? 그 핑계로 먼저 전화를 넣어서, 그때 말씀하셨던 게 무슨 뜻이었냐고 요령껏 떠보시라고요.”
―아, 네.
“제가 직접 물어보자니, 그렇게 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할 거 같네요.”
―그게 무슨….
“저도 한번 모셨잖아요, 스너프로. 그때는 거절하시더니, 이번엔 움직이시네요? 와, 이런 건 생각도 안 해 봤는데, 이러면 갑자기 재밌어지는 건데?"
―…….
정태의 한쪽 입꼬리가 괴기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왜 안 그러시던 분이 착한 사람 뒤통수를 치시는 거지?”
―사장님 아직 확실한 내용도 아니고, 제가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보기 전까지는….
“제가 모셨거든요.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
“지금 생각을 해 보니까, 그때도 정훈이 때문에 모직에 계속 남겠다고 하셨던 거 같네요. 저는 그런 거 같은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저기 사장님….
“왜에에에!”
정태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하아, 악해지게 만들까요, 사람들이… 사장님.”
―…네.
“혹시 제가 멍청해 보입니까?”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좀 쉬워 보이고, 만만해 보이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아니죠?”
―아닙니다, 사장님. 왜 그런 소릴 하십니까?
“그런데 저는 지금 이 순간 왜 제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 눈에 쉬워 보이고, 만만하게 보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기분 탓인가? 사장님.”
―…네
“제가 갑자기 기분이 많이 안 좋네요. 많이 언짢아요.”
―…….
“요 근래 그룹 본사에서 하는 걸 보면, 뭔가 확정이 나기 전까지는 저한테도 입을 다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사장님이 한번 알아보세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그리고 제가 사장님께는 이런 부탁을 따로 안 드리려고 했는데… 앞으로 식품에서 정훈이 관련 특이 상항이 생기면 저한테 바로바로 전달을 좀 해 주세요.”
―…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말씀을 안 하셨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건 아닌데, 당연하게 생각을 하도록 상황이 절 그렇게 만드네요.”
편승일 재경식품 사장과의 통화를 끝낸 손정태.
그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지려다, 이내 이성을 되찾고 침착해지려 애를 썼다.
“후….”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해 놓고,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다시 한번 정돈했다.
그렇게 천천히 이성을 되찾은 정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허, 허허… 하, X발… 이거 진짜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나랑 제대로 한번 놀아 보자는 건가?”
* * *
정엽이를 만났다.
작년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 오히려 힘이 덜 들어간 모습이었다.
작년에 녀석이 제 처와 아들 데이빗을 함께 데리고 나왔을 땐, 내게 뭔가를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부경호텔의 지분 11퍼센트를 확보하고 있는 프랑스 투자 회사 ‘드모어’의 가려진 실질적 지주라는 내용, 그리고 그 드모어가 프랑스 로컬 호텔 브랜드 ‘드 누락’을 지주사로 두고 있는 약간은 특이한 구조의 투자 회사라는 내용 따위를 내게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자리에 하고 나온 행색은 다소 초라했지만,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날 상대하는 눈빛과 말투에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번 자리에선 달랐다.
이미 내가 ‘마뉴엘 엠흐’라는 자신의 장인어른을 바지로 앉힌 드모어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내용을 태산이나 하늘이를 통해 다 이야기 들었겠지.
타이가 빠진 정장 위로 고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자리에 나왔는데, 이제야 몸에 딱 맞는 제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나왔든 난 그저 제 애비를 그대로 빼다 박은 녀석을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을 뿐이었다.
“이게 다 뭐야? 설마 이것들 다 한국에서 가져온 거야?”
“별거 아냐. 데이빗 생각나서 몇 개 좀 사 봤어.”
“뭔데?”
정엽이는 내가 들고 온 쇼핑백 두 개를 차례대로 열어 보며 경악을 했다.
딱히 경악할 정도로 특이한 건 없는데, 놀라는 척이 퍽 과장스러웠다.
“그때 보니까 한국말을 아예 못 하는 거 같더라. 집에서 한국말은 안 가르쳐?”
“조금씩 해. 그런데 억지로 가르치거나 하진 않아.”
한글로 되어 있는 그림책을 몇 권 사 왔다.
버튼 같은 게 달려 있어서, 그걸 누르면 그림을 설명해 주는 짤막한 설명이 나오는 동화책.
3, 4세용이긴 한데, 작년에 데이빗을 보니까 3, 4세용도 어쩌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건 또 뭐야?”
“이건 하늘이가 같이 가서 고르는 거 도와준 거야.”
그리고 데이빗의 옷도 몇 벌 챙겨서 왔다.
“야, 이런 건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들이잖아.”
“직접… 사 주고 싶었어.”
그 시절엔 다 그랬다… 하면서 혼자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이렇게 외국에 떨어져 나와 살고 있는 정엽이 놈을 생각하면, 부족했던 부모로서의 역할에 가슴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홍명이 놈, 홍준이 놈, 그리고 여정이까지….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녀석들의 옷을 골라 준 적이 없었다.
안사람이 그런 걸 참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내게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안 했겠지.
그런데 이번 파리 일정을 준비하면서, 이상하게 정엽이 놈의 아들, 데이빗의 옷을 몇 벌 내 손으로 직접 골라서 가져와 보고 싶었다.
“아무튼, 고맙다. 가져가서 삼촌이 사 줬다고 꼭 말해 줄게.”
“삼촌이라고 하면 난 줄 아나?”
“직접 본 삼촌은 아직은 네가 유일하니까.”
내가 챙겨 온 데이빗의 선물들을 정엽이가 잠시 옆으로 치워 놓는 동안, 난 아무리 봐도 홍명이 놈을 그대로 빼다 박아 놓은 녀석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가슴이 아려 왔다.
내가 그놈을, 내 자식 놈들을…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했었구나.
쇼핑백을 대충 한 곳으로 치워 놓고, 정엽이 놈이 물잔을 들려고 할 때 물어봤다.
“한국엔 언제 들어올 생각인데?”
“한국? 글쎄… 태산이 할아버지도 뵐 겸 한번 들어가긴 들어가 봐야 되는데, 시간이 잘 안 나네.”
“아니, 언제쯤 결심을 할 거냐고.”
“결심? 무슨 결심?”
“뭘 모르는 사람처럼 물어?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면서.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 그거 언제 쓸 건데?”
“…….”
“몇 푼 되지도 않는 배당금이나 타 먹자고 그 큰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싱겁게 웃어 버리며, 대답을 피하는 정엽이었다.
“이번에 우리 재경에서 부경의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다시 가져오는 거 봤지?”
“정확하게는 재경이 한 게 아니라 네가 한 거지.”
“호텔까지 내가 가져오게 만들 거야?”
“……!”
“직접 해, 호텔 정도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방금 내가 한 말에 어려운 내용이 있었나? 직접 하라고, 호텔을 가져오는 건. 손정엽이 직접 부경이 가져간 우리 재경의 호텔 사업권을 가져오라고.”
“…….”
“안 그럼 내가 할 수밖에 없어. 그럼 그땐 아예 기회가 없는 거야. 난 내 손에 들어온 건 그게 누구라도 절대 안 나누거든. 그러니까 너무 계산 많이 하지 말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할 때 한국 들어와서 부경호텔 가져가.”
“푸하, 하하하… 도와줘? 네가? 네가 어떻게 날 도울 건데?”
“아까부터 뭘 다 알면서 떠보듯 물어, 묻긴. 유통 쪽 쪼갠다고 화재 지분은 넘겼지만, 아직 물산과 건설, 호텔 쪽으로 각각 12퍼센트씩 지분을 가지고 있어.”
“그게 네 지분이야? 네 엄마 지분이지.”
“무슨 소리야? 원래 우리 재경 거였어. 고작 지분 말고, 그 사업들 전부가. 거기에 내 엄마라는 사람의 지분은 존재할 수 없어.”
다소 놀랍다는 듯 정엽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
“엄마라는 사람?”
“잠시 지분 명의가 그렇게 돌아가 있는 거뿐이지, 결국은 우리 재경 거야. 그중에 하나 정도는… 가져가란 말이야, 내 말은.”
“너 지금 이 말…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하면 믿기는 할 거고?”
“……?”
“그게 중요해? 내가 지금 12퍼센트 지분으로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하잖아. 부경을 상대로 한번 싸워 보라고. 내가 먼저 싸워봤잖아. 별거 없어, 맹물들이야.”
“진심이냐고.”
“질문은 그게 진심이냐가 아니라, 지원의 대가로 뭘 원하느냐가 되어야 맞는 거 아니야? 질문이 그런 식으로 들어와야 거래가 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