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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믿어 (146/303)

그러니까 믿어

정엽이가 물었다.

“거래? 지금 나랑 거래를 하자고?”

“우리 관계에서 지금 당장 진심으로 할 수 있을 만한 게 그리 많지가 않더라고. 거래부터 시작하면서 천천히 관계를 쌓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어.”

시간이 필요하겠지.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녀석이 불편하다면 강요를 하고 싶지는 않고.

정엽이의 인생이다.

녀석의 감정이고.

내가 녀석에게 주고 싶었던 것, 남기고 싶었던 것을 지금부터 해 주겠다고, 녀석의 지난 인생과 고민, 삶 전체를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마음은 없었다.

난 그저….

내가 해 주고 싶은 것만 해 주면 된다.

선택은 녀석의 몫.

“거래로 관계를 형성하자?”

“한번 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친해져 보는 것도 해 보면 좋을 거 같고.”

“너 이러는 거 작은아버지는 알고 계셔?”

홍준이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이야기는 해야겠지. 그래야 내가 호텔 지분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모르신다는 말이네. 허, 네 아버지가 잘도 날 지원하라고 그 지분을 내어놓으시겠다.”

“어, 내어놓을 거야.”

“…뭐?”

“그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거기까지 사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고, 해야 할 것만 생각해. 그것만 해도 할 게 많지 않나?”

“…….”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건데? 언제까지 생각만 할 거야? 나는 부경유통을 찢어 놔야겠다 결심하고 반년 만에 백화점을 다시 가져왔어. 그간의 이자로 면세점, 아웃렛까지 업어서. 그때 내 손에 있었던 건 부경유통 지분 12퍼센트, 그리고 화재 지분 팔아서 만든 현금이 전부였어.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 가지고 있잖아. 거기에 내가 12퍼센트를 태워 주겠다고 하고 있고. 20년 넘게 손톱을 숨기고 준비를 했으면서, 이런 기회 앞에서까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건 다시 가져올 마음이 없다고 내가 봐야 하는 건가?”

놀랍다.

어쩜 이렇게 생각이 깊어진 얼굴 표정까지 제 애비를 쏙 빼닮았을까.

“거래? 나쁘지 않네. 그래, 그런 관계라면 내가 이 기회를 안 잡을 이유도 없고. 조건이나 한번 들어 보자.”

“조건이 좀 많아. 그런데… 딱히 어려운 내용은 없을 거야.”

“말해 봐.”

“첫 번째. 5년간 지분 비율은 그대로 유지를 한다. 11퍼센트, 12퍼센트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말이 아니야.”

“알아. 지분 비율이라고 했잖아.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지분이 너희 쪽 지분을 앞질러선 안 될 거란 소리 아냐?”

“맞아.”

“5년 뒤엔 앞질러도 된단 말이고.”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뭐?”

“내가 말한 조건을 다 만족시킨다면 5년 뒤엔 그 지분을 다 던질 거니까.”

“던진다면….”

“공시 가격에 맞춰서 던질 테니까, 능력껏 주워 담아.”

앞으로 5년은 이런 식으로라도 데리고 있으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상당히 비논리적인데, 지금은 내가 네 말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 좋아, 다른 조건은?”

“호텔 사업에 재경의 이름은 쓰지 않는 걸로.”

“…….”

“재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 같이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는 뜻이야. 할아버지, 큰아버지, 지금의 회장님, 그리고 부경의 역사는 아예 다 지워 내고 손정엽의 호텔로 만들어.”

정엽이 놈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손정태는 스너프에서 손정태의 왕국을 만들어 나가고 있어. 나도 그럴 거고. 그러니 손정엽도 호텔을 기반으로 손정엽의 왕국을 만들어 가란 뜻이야. 괜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재경의 과거에 혼자 발목 잡혀 있지 말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되겠어?”

“그 정도도 못 해낼 상대라면, 나는 다른 상대를 찾아야지. 아님 내가 직접 하든.”

“…….”

“감정 섞인 비즈니스만큼 질척거리는 게 없어. 비즈니스 판엔 돈 말고는 따로 심판이라는 게 없거든.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 그런 걸 가리는 건 돈이 안 되잖아. 나라고 지금 이 자리가 편할까. 손홍준 회장이라고 손정엽이의 존재가 편할까. 그럼에도 우린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사람들이니까, 감정보다는 실리를 먼저 따져 봐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게 비즈니스니까.”

“…….”

“정 과거 일에 억울한 게 안 없어질 거 같음, 손정엽이의 왕국을 손정태, 손정훈, 그리고 재경, 부경의 왕국보다 더 크게 만들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으로 키워 내. 그럼 그때엔 선택권이 많아져. 삼킬 수도 있고, 밟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거야.”

“너….”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하는 건 미련한 거야. 고만고만한 상대하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만큼 수준 낮은 비즈니스가 없어. 진짜 비즈니스를 해, 지금부터는. 비즈니스에 그간 감정을 섞어 왔기 때문에 20년이란 세월 동안 계속 칼만 갈아 왔던 거야. 언제까지 칼만 갈 건데? 갈 만큼 갈았음 잘 드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아냐.”

테이블 위로 올려진 정엽이 놈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 그런 정엽이를 강하게 쏘아봤고, 한참 동안 눈싸움이 펼쳐졌다.

물러서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지난 녀석의 세월에 측은지심을 느끼고, 가엽게 봐 줄 마음 따윈 더더욱 없었다.

지금 녀석이 하고 있을 어리석은 생각을 처참하게 깨부수어 놓아야, 녀석이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역시나 홍명이 놈의 아들, 나 손중길이의 손자란 말이지?

자기 역시 물러설 마음이 없다는 듯, 꽤 한참 동안 날 쏘아보는 정엽이었다.

여전히 녀석의 사연 많은 두 눈을 쏘아보며, 커피 컵을 입술에 붙였다.

그러자 녀석도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다른 조건 또 있어?”

“세 번째. 그 5년 안에 손정엽이의 호텔을 대한민국 1등 호텔 브랜드로 키워 내. 만약 그게 안 되면, 난 5년 뒤에도 호텔 지분을 던지지 않을 거고, 그때부터는 호텔 경영에 직접 참여를 할 거야.”

“너 설마 지금 날 가르치겠다는 거야?”

“배울 게 있다면, 그리고 그 배움이 내게 반드시 필요한 거라면 원수라고 스승으로 못 삼을까.”

“아주 닳고 닳았네.”

“내 자리에서 정의롭고 순수하단 소릴 듣는 것만큼 굴욕적인 소리가 어디에 있겠어? 뭐가 정의롭고 뭐가 순수한 건지 구분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그 구분을 못 하는 게 문제인 거지.”

“조건은 그게 끝이야?”

“아니, 하나 더 있어.”

“말해 봐.”

“할아버지 기일은 몰라도… 앞으로 할머니 기일엔 꼭 참석을 해.”

정엽이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처음으로 내 눈을 피했다.

“집안 장손이라고, 그 약한 몸으로 직접 업어 키웠다…고 들었어.”

“…….”

“할머니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데 왜 얼굴을 안 보여 줘? 왜 엄한 상대한테 화풀이를 하냐고.”

“화풀이? 너 지금 내가 돌아가신 할머니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라고 한 거야?”

“그런 게 아니라면 1년 365일 중에 하루, 그것도 하루 종일도 아니고 잠시 한두 시간 불편한 걸 못 참아?”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진짜 불편할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 사람이 불편해하면 되는 거지. 호텔 지분 12퍼센트 지원받는 거치고는 아주 쉬운 조건 아니야? 매일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딱 하루, 그것도 한두 시간만 눈 딱 감고 참으면 되는 건데.”

가늘게 뜬 눈으로 날 한참 동안 쳐다본 뒤 정엽이가 물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는 손정엽이라는 남자가 불편한 걸 못 참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줄 아는 남자이길 바라.”

“뭐?”

“그 정도는 되는 남자여야, 호텔 지분 12퍼센트를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냐고.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투자인데, 불편한 거 하나 못 참고, 실리가 아닌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베팅을 할 수가 없는 거잖아. 베팅을 해 보기로 결정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내게 증명해 줘. 우리 가족을 불편하게 만들어 봐. 만약 할 수 있다면 우리 가족을 상대로 인정이라는 걸 받아 내면 더 좋고.”

“아주 재밌는 놈이네? 주제를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막 넘어. 네가 지금 날 테스트해 보겠다, 그런 거야? 그간 내가 이곳 파리에서 지난 20년 넘는 세월을 무슨 각오로 버티며, 살아왔는지 그걸 알기나 해?”

몰라도 알 거 같다.

그래서 이 할애비는 네가 안쓰럽기보단 대견해 보이기만 한다.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거고.

“나는… 뭔가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사람이 인정으로 보답을 받는 순간만큼 아름다운 순간을 본 적이 없어.”

“…….”

“지난 20년 넘는 세월, 손정엽이라는 사람이 한국을 떠나 이곳에서 무슨 각오로 버티며 살아왔는지 난 알 방법이 없지. 하지만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거, 그리고 드모어, 마뉴엘 엠흐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부경백화점의 지분을 11퍼센트나 긁어낸 이유와 그걸로 하고자 하는 목표는 충분히 알 거 같아. 난 그 20년 넘는 세월과 그 세월 동안 해 왔던 손정엽이라는 남자의 노력이… 우리 가족한테도 인정을 받길 바라는 거야.”

“나는 너희 집 사람들의 인정 따윈 필요 없어. 네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비웃음을 입가에 달고 정엽이가 말했다.

“내가 너희 집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겠다고 지금까지 미친 듯 살아온 거 같아?”

“착각은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뭐?”

“손정엽이라는 사람이 어디에서 얼마만큼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아왔다는 거… 그걸 우리 가족들이 궁금해할 거 같아?”

“……!”

“그게 왜 궁금해? 아무리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어도, 결국은 지난 20년간 해낸 게 고작 부경백화점 지분 11퍼센트를 긁어낸 게 전부인데. 애썼네… 하는 정도가 고작이지, 그 호텔 지분 11퍼센트가 대세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거 같아? 딱 거기까지인 거야, 재경이 없는 손정엽의 혼자 힘은.”

그래, 그렇게 악을 품어라.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분함을 느껴라.

지금 네 위치를 정확하게 보고, 인정해라.

나머지는 이 할애비가 옆에서 도와주마.

“그러니 우리 집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보라고. 미안함, 죄책감이라는 것도 상대가 눈에 보여야 생기는 거야. 눈에 안 보이면… 잊혀지는 거야. 손정엽. 재경가의 장손이라는 존재. 잊혀지지 말고, 계속 유지하라고. 그래야 내가 손정엽을 믿고 투자할 명분이 생기는 거야. 나도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거든. 아직은 재경이 내 것이 아니잖아.”

“아직은?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는 말 같다?”

“그러니까 호텔에 재경의 이름은 쓰지 말라고.”

“…….”

“손정엽의 왕국을 만들어. 손정엽만의 왕국을 만들어. 누군가와 왕좌를 놓고 싸워야 하는 왕국이 아니라, 아무도 쉽게 넘볼 수 없고, 아무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손정엽만의 왕국. 지금의 재경보다 더 크고, 완벽한 왕국. 더 이상은 이미 놓친 거에 미련한 미련을 두지 말고.”

뜬금없이 정엽이 놈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

“이제야 좀 알 거 같네.”

“뭘?”

“태산이 할아버지가 어째서 나한테 너랑 만나 보라고 하셨는지.”

후련하게 한바탕 웃어 놓고 정엽이가 말했다.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그 말이 안 되는 짓들을 거짓말처럼 말이 되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하시더라.”

“날 좀 좋게 보고 계셔.”

“내가 널 믿어도 되는 거야?”

“보통은 이런 질문에 요즘엔 이런 대답이 트렌드라고 하지?”

“……?”

“사람을 믿지 말고 돈을 믿으라고.”

“네가 들고 있는 호텔 지분을 믿으란 소리야?”

“아니, 난 트렌드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트렌드를 따른다는 게 결국은 대세의 눈치를 본다는 뜻이잖아. 내가 눈치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취향이 좀 올드해서.”

“…….”

“믿어. 날 믿어. 우리… 가족이잖아. 내가 직접 다치면 다쳤지, 두 번 다시 내 가족이 다치게는 안 해.”

정엽이 다시 물었다.

“네가 내 왕국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는?”

“동맹.”

“…….”

“멋질 거 같지 않아? 난… 아주 재미가 있을 거 같은데?”

“부럽네. 그런 상상에 재미를 느낄 여유도 다 있고.”

“내가 꿈을 좀 크게 꾸는 편이거든. 그래서 작은 것들은 눈에 잘 안 보여. 그런데도 계속 손정엽이라는 존재가 눈앞에 보인다는 건… 아마, 내게 손정엽의 존재는 절대 작은 존재가 아니란 뜻일 거야.”

“…….”

“그러니까 믿어. 내가 말한 그 조건들만 지켜 주면, 나도 약속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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