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가 중간에서 잘해야죠 (148/303)

제가 중간에서 잘해야죠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생각을 해 보니까, 하늘이의 말이 맞았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건 하늘이가 아니라 나지.

“만날 때마다 일부러 틱틱거렸을 땐 정말 싫지만, 평생을 아예 안 마주치고는 살 수는 없는 상대일 거라고 생각을 했어. 싫은 티를 팍팍 내줘야, 엮이는 일이 없을 줄 알았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아니잖아.”

“내가 너한테 그 정도였어? 평생을 아예 안 마주치고 살고 싶었을 만큼?”

“내가 말이 좀 심했나?”

“아니다. 그만큼 네가 지금 노력 중인 거라고 이해하는 게 속 편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같이 좀 노력을 해. 나만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 말고. 나는 오빠네 할머니가 아니잖아. 오빠가 오빠네 할아버지가 될 수 없는 거처럼. 내가 모든 걸 다 오빠한테 맞춰 줄 순 없어.”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손중길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당장 정엽이 놈 한국으로 불러들여서 정태 놈과 함께 교통정리를 시켜 주고, 태산이와 함께 태화장에 가서 얼큰하게 같이 한잔….

“이건 네가 뭘 잘 몰라서 하는 말이고.“

”뭘 내가 잘 몰라?“

“할머니는….“

안사람은 내게 모든 걸 다 맞췄던 사람이 아니다.

내가 재경을 키우는 것에만 오로지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내조에 큰 애를 쓴 건 맞지만, 고집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진심으로 부아를 터트릴 때, 난 한 번도 그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할머니는 뭐?“

“아니다. 아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뭘 걱정하지 마?”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거 묘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아니,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거야.”

“역할이 달라?”

“뒤에서 지원해 주기보단 넌 네가 직접 전쟁터에 나가서 이기고 싶은 사람이잖아. 전투력이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보급 일을 맡기나. 같이 전쟁터로 나가서 승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자고 해야지. 아냐?”

“굳이 둘 중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 그쪽이 맞는 거 같긴 하네.”

잠시 녀석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물어봤다.

“왜? 불안하냐?”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 봐.”

“글쎄? 그럴 가치가 있다면야 아예 못 할 것도 아니지”

“가치?”

“어쨌거나 오빠네 할아버지는 대한민국 경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무조건 거론이 되는 분이야. 상대가 그 정도 인물이라면, 마땅히 내조에 힘을 쏟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웃어?”

왜 웃긴, 웃기니까 웃지.

“아닌데. 전혀 그렇게 할 것처럼은 안 보이는데….”

“눈이 많이 안 좋아? 눈이 안 좋으면 안경을 껴.”

내가 웃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식으로 인상을 찡그려 놓고 하늘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교가 돼?”

“뭐가?”

“오빠랑 오빠 할아버지가. 오빠는 오빠 할아버지인데, 젊으셨을 때 사진도 안 봤어? 인터넷에 성함만 치면 바로 다 나오잖아.“

나 지금 나랑 비교를 당하고 있는 건가?

“오빠네 할아버지는 그냥 웃으실 때도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마초적인 무게감이나 상남자 카리스마 이런 게 그냥 막 느껴지는데, 오빠는… 와, 뭐지?”

“뭐가?”

“어쩜 이렇게 다르지? 잠깐만 있어 봐. 말 나온 김에 사진이랑 같이 비교 한번 해 보자.”

갑자기 스마트폰으로 날 검색하더니, 내 얼굴에 자기 폰을 붙여 놓고 진짜 비교를 해 보는 하늘이었다.

“그분 얼굴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 그나마 여기 눈매 이쪽은… 쬐금 닮긴 했네.”

그래서 호기심에 한번 물어봤다.

“그럼 손정훈, 손정엽, 손정태. 이 셋 중에 누가 우리 할아버지랑 생긴 것만 놓고 봤을 때 제일 많이 닮은 거 같아?”

정엽이와 정태의 얼굴을 떠올리는 듯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하늘이가 대답했다.

“일단 사람들이 정태 오빠는 알아도, 정엽이 오빠에 대해선 거의 모르니까. 그래서 다들 오빠네 아버지를 많이 닮은 정태 오빠가 손중길 회장님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고 하긴 하는데… 생긴 것만 놓고 보면 정엽이 오빠가 제일 많이 닮았지.”

“그래?”

“내 눈엔 그래.”

“내가 제일 안 닮았고?”

“우리 할아버지 말씀으로 기질이나 성격, 식성… 그런 건 신기하리만치 오빠가 손중길 회장님과 똑같다고 하시긴 하더라. 그런데 난 상상이 잘 안 가.”

“뭐가?”

“사진으로만 보면 완전 분위기 있으시잖아. 무게감도 장난 아니고. 그냥 사람 자체가 거인처럼 느껴져. 내가 본 사진 대부분이. 그런데 그런 외모에 오빠랑 기질, 성격 이런 게 비슷하다고 하니까… 왠지 조금 깨.”

억울하네, 이거.

“깨?”

“어. 완전. 아닐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너무 옛날이라 틀림없이 기억을 잘못하고 계신 걸 거야.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우리 할아버지도 사람인데. 30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분이잖아. 아무리 친하셨고, 오랜 시간을 같아 보내셨어도 사람 기억이라는 게 그래. 10년만 지나도 기억이 흐릿흐릿해지는 게 사람 기억인데, 30년 전 기억을 지금까지 완벽하게 다 가지고 계실 수는 없는 거잖아.”

“근데 이게 지금 네가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네 할아버지 기억을 부정할 일이냐?”

“히히, 그런데 요즘 할아버지 기억력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고, 이제 할아버지 연세라는 게 있잖아.”

* * *

“식품으로?”

재경 그룹 본사 회장실.

조동희 전무가 손홍준 회장을 독대하고 있었다.

“네, 손 과장이 같이 옮겨 가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네요.”

“남 사장하고는 이야기를 해 봤고?”

“어차피 저야 손 과장 있는 동안만 모직에 있기로 이야기를 하고 갔던 거 아닙니까.”

“그래도 거기 지금 많이 바쁘잖아. 그걸 남 사장 혼자 다 하겠어?”

그 말에 조동희 전무는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필우입니다.”

“…….”

“사람이 너무 곧아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게 아쉬울 뿐이지, 일 머리만 놓고 보면 우리 재경 안에서 누굴 남 사장한테 갖다 대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저하고 손 과장이 빠지고 나면 오히려 더 남 사장의 능력이 빛이 날 겁니다. 이젠 오로지 사업만 챙기면 되는 건데, 그건 남 사장 전문 분야 아닙니까.”

공손한 조동희 전무의 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쳐다만 보던 손 회장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옆자리를 지켜 왔던 조 전무였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사이동에 이번처럼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항상 손 회장이 가라는 대로, 항공과 식품, 모직, 그리고 그룹 본사를 전천후처럼 옮겨 다녔던 유일한 인물이 바로 조동희 전무였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자신의 다음 근무지를 직접 찾아와 희망을 하고 있다.

그 이유에 자신의 둘째, 손정훈의 부탁이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정태가 스너프로 조 전무를 모시려고 했었다는 걸 다 알고 있는 손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걸 조 전무가 요령껏 거절했다는 것도.

손 회장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번 조 전무의 신청을 받아 주게 되면, 그건 손 회장 본인 손으로 정태와 정훈이의 후계자 경합을 인정하게 되는 거라는 걸.

여러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손홍준 회장이었다.

인정을 받게 될 자식보다,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자식이 감당해야 할 무게에 더 많은 감정 이입이 되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했기에.

그 경험을 자신은 이미 한번 해 봤기에.

그럼에도 조 전무의 신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태가 정훈이를 압도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둘째라서 기회조차 잡지 못하게 될 거라는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가슴이 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곁에 안 계시지만, 항상 자신에게는 벽이었고 넘어야 하는 산이었던 형님과의 경쟁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셨던 아버지.

그 인정과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자신의 벽을 상대로 그리고 자신의 산을 상대로 후회 없는 최선을 다해 봤던 그 시절의 자신과 형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손 회장이었다.

“정태가 많이 서운해하겠다.”

“저는 항상 손 사장에게 진심이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고요.”

“자네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 뭐 하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서운해할 건데.”

“재경에서 현재 저보다 회장님을 오래 모신 사람이 있습니까?”

“앞으로도 없겠지.”

“저는 손정태 사장, 손정훈 과장이 아닌 회장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지금껏 재경 생활을 해 왔고, 그렇게 재경 생활을 마칠 생각입니다.”

“흠….”

손홍준 회장의 결심은 이미 오래전 남필우 사장과 자신을 따로 불러서 손중길 회장님을 이성계에, 다음 세대의 재경을 이끌고 갈 자식을 세종에 비유하며 자신은 이방원으로라도 남아야겠다는 뜻을 전달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걸 모를 조동희 전무가 아니었다.

“이방원은 자식들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 했던 인물 아닙니까. 저 역시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을 재경에서 은퇴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조 전무 자네는 정훈이다 그 말이야?”

“아닙니다. 그걸 제가 벌써부터 어떻게 알겠습니까?”

“정훈이한테 힘을 싣겠다는 거 아냐, 지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그러면?”

“완전히 똑같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슷한 환경은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미 없는 파워 게임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능력 평가를 회장님께서 하시기 위해서는요. 식품, 항공, 그리고 그룹 본사에서 지금의 스너프까지. 손정태 사장은 어디로 이동을 하나 항상 환영을 받으며 옮겨 다녔습니다. 모두가 기꺼이 손정태 사장에게 힘을 보태는 데 주저함이 없었죠.”

“…….”

“나중에 더 큰 힘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신들이 있었을 테니까요. 불과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지금의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저부터만 해도 손정훈 과장이 이런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으니까요. 회장님께서 저와 남 사장을 따로 불러 이방원이 되어 봐야겠단 말씀을 안 하셨다면, 저라고 제 입장 난처해질 거 뻔히 알면서 이런 선택을 하겠습니까.”

조동희 전무의 결심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손 회장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지금 당장 은퇴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조 전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결심이라는 것도.

그간의 조동희란 인물이 재경 삼사와 그룹 본사 생활을 어떻게 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 손홍준 회장이다.

손 회장, 자신이 내린 지시가 아니라면 결코 어느 한쪽으로 올인을 하는 법이 없는 인물.

철두철미하다 싶을 정도로 처세의 균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조 전무가 정훈이의 옆으로 서겠다고 한다.

“손정태 사장의 원망이 회장님한테까지 가지 않고, 제 선에서 그칠 수 있다면 전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원망은 졌을 때 하는 거고.”

커피 한 모금.

그 커피 잔을 조심히 내려 놓으며 손 회장이 말했다.

“사장 자리 연임 한번 해 보겠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자네가 간다면 편 사장이 많이 불편하겠네.”

“제가 중간에서 잘해야죠.”

“지금껏 정훈이 놈이 해 온 걸 보면, 자네한테 그냥 같이 가자고 하지는 않았을 거고, 혹시 자네는 알고 있나? 항공, 그룹 본사 다 놔두고 정훈이 놈이 식품을 선택한 이유.”

“…….”

“그놈이라면 이유가 있을 건데, 물어봐도 웃기만 하지 시원한 대답을 안 해.”

“회장님도 많이 변하셨습니다.”

“내가?”

“네.”

“왜?”

조 전무 역시 잠시 말을 끊어 놓고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셨다.

“손정태 사장 땐 회장님께서 직접 선택을 해 주셨지 않습니까. 이번엔 이쪽으로 가라, 그 다음엔 저쪽으로 가라…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손정태 사장이 식품 쪽에 관심이 깊어져서 거기 본부장 생활을 2년 정도만 더하고 싶단 뜻을 밝혔을 때, 이유 불문하고 그룹 본사로 부르셨지 않습니까.”

“가능성이야 누구나 다 볼 수 있어. 그건 보이는 거지, 찾아야 하는 게 아니잖아. 정훈이 놈의 가능성을 어디 우리가 찾은 건가?”

“맞습니다.”

“식품에서 2년이나 있으면서 결과물 없는 가능성만 계속 찾아내는데, 그걸 뭐 하러 거기 계속 있게 만들어? 2년 동안 아무런 결과물도 못 만들어 냈다는 건 다시 또 2년 뒤에도 똑같을 거란 말인 거야.”

“하지만 그땐 손정태 사장이 많이 어렸지 않습니까. 경험도 부족했고.”

“똑같은 나이 때 정훈이는 스너프 기획안을 나한테 올렸어. 안산 공단 노조를 해결해 놓고.”

“…….”

“알았어. 그렇게 해. 편 사장한테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내가 따로 불러서 미리 귀띔을 해 줘야 해, 아님 자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 볼 거야? 뭐가 편해?”

“그 부분은 제가 손정훈 과장의 생각을 먼저 들어 보고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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