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욕심내 봐도 되는 거죠?
재경모직 인사부 과장으로 남아 있는 나의 시간이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었다.
밤늦게 장혜란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온 날이 있었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마침 나도 잠이 쉽게 안 올 거 같아 잘 준비를 다 해 놓고 8시가 넘어 먹을 갈기 시작해 붓글씨 몇 자를 써 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손중길일 때엔 생각이 길어질 때마다 붓을 들었는데, 요즘은 누워도 쉽게 잠에 들 수 없을 거 같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먹을 갈기 시작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요즘은 조금만 어정쩡하게 피곤해도 침대에 누워 그걸 보기 시작하면 12시 넘어서까지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게 다반사라 아예 그냥 먹을 갈고 있다.
“내일이요?”
―어, 그래. 엄마가 내일 점심 시간 맞춰서 회사로 갈 테니까, 엄마랑 같이 점심 먹자.
장혜란이.
내가 정훈이에 대해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해도, 이 몸으로 1년 반 가까이 살고 있는 중인데 그간 장혜란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것도 회사까지 찾아오겠다고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물어봤지.
그러지 말고 내가 회사 마치고 본가로 갈 테니까, 집에서 보는 건 어떻겠냐고.
진짜 그러겠다고 물어봤던 게 아니라, 과연 내게 할 말이 홍준이가 있는 앞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인지, 아님 홍준이가 없는 자리에서 긴밀하게 해야 하는 말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이를 먹으며 요령만 붙어 버린 장혜란이는 엄마랑 데이트하는 게 싫으냐는 말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상관없다.
들고 있던 붓 머리를 벼루 속 먹물 속에 담가 놓고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올 때쯤 연락하세요. 시간 맞춰서 내려갈게요.”
다음날 회사 근처 록킨스 호텔 일식당을 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다며 장혜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 록킨스 호텔은 내가 정훈이 놈의 몸에서 처음 눈을 떴던 호텔이었다.
회사에서 차로 5분이면 도착을 하는 거리에 있는 호텔.
그 호텔 일식당의 창가 쪽 자리는 이동이 가능한 파티션으로 공간의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었는데, 그 자리를 잡고 장혜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며 장혜란이 내게 물었다.
“엄마가 먼저 연락하기 전엔 절대 먼저 연락 안 하지?”
“그랬네. 알잖아요. 많이 바빴어요. 앞으로는 신경 좀 쓸게요.”
“이젠 가족 단톡방에서 싱거운 농담도 일절 안 하고.”
“해도 되나?”
홍준이 놈이 일주일에 한 번씩 해 오던 본가에서의 가족 식사 시간을 아예 없애 버렸다.
아마도 나와 정태를 상대로 분위기를 잡아 주기 위함이겠지.
항상 따로 부른다.
정태에게 회사 밖에서 따로 할 말이 있을 땐 정태 가족만,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을 땐 나만.
그런 분위기가 이미 집안 기저에 다 깔려 있었기에 장혜란이 길게 뽑아내고 있는 서론은 사실상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자기 넋두리일 뿐이었다.
“너 엄마랑 약속했었잖아.”
“무슨 약속?”
“형이랑은 회사 경영권 가지고 싸우지 않겠다고.”
“싸운 적 없는데? 누가 나랑 형이 싸웠대요? 누가? 누가 그래요?”
“엄마를 바보로 아니?”
나를, 그리고 네 남편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재경을 바보로 만든 건 바로 너 아니었더냐.
내가 이렇게 웃긴 하지만, 그 웃음 뒤에서 널 진심으로 상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바로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시꺼먼 네 속내를 다 숨기고 나와, 나의 재경을 기만했기 때문이라는 걸 네가 알아야 한다, 혜란아.
“너 이번에 식품으로 옮기면서 조 전무 데리고 간다며?”
재경의 주인 나셨네.
아주 그냥 치맛바람으로 회사 경영하는 비선 실세 나셨어.
“필요하니까요.”
“네 아버지가 어련히 준비를 안 해 주실까.”
네 남편이 어련히 알아서 판단을 안 할까.
“내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언제까지 나한테 필요한 걸 누가 대신 준비해 줄 때까지 기다려요?”
“엄마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조 전무가 나랑 같이 식품으로 옮기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정훈아.”
“진짜 궁금해서. 나 모직 들어가기 전까지 조 전무 그룹 본사에 있었잖아요. 나 때문에 모직에 있었던 거고. 하긴 엄마는 그런 거 잘 모르나?”
모르긴 뭘 몰라.
다 알고 있겠지.
“그래서 식품으로 갈 때도 같이 가자고 했던 거뿐인데?”
“진짜 그게 전부야?”
“갑자기 섭섭해지려고 하네?”
“뭐가?”
“만약에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내가 필요해서 같이 가 달라고 한 건데, 그게 왜 내가 형이랑 싸우는 게 되는 건지, 왜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내가 또 왜 이런 걸 설명해 줘야 하는 건지도. 엄마, 자꾸 이러면 나 섭섭해져요.”
“엄마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네가 먼저 네 입으로 너는 재경을 놓고 네 형이랑 불편한 사이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었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여러 사람 놀라게 조 전무를 데리고 식품으로 가겠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안 놀라겠냐고.”
“누가 놀랐는데요?”
“…….”
“회장님은 그러라고 하셨으니까 당연히 아닐 거고, 형? 형이 뭐라고 해요?”
너는 좀 아파 봐야 하지 않겠냐, 혜란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나한테 혼이 나야지.
똑같이 잘못을 했다고 해도 나는 내 자식 놈, 홍준이의 실수는 묻고 싶지가 않구나.
내겐 아픈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이 이유야 어떻든, 그 방법이야 어땠든 재경의 이름은 지켜 내고 있고.
네 남편이 그렇게 힘들게 재경의 이름을 지켜 내는 동안 넌 그 옆에서 도대체 뭘 했을까 내가 참 많이 생각을 하고, 네 입장에서 이해를 해 보려고 하고… 다 해 봤는데, 그래도 넌 나에게 혼이 나야겠더라.
“형이 뭐라고 했나 보네. 왜 그랬지? 내가 하고 있는 게 뭔가 아니다 싶고, 잘못하고 있는 거 같으면 따로 전화를 주지, 그런 이야기를 왜 엄마한테 가서 하고 있대?”
“아니야.”
“아니긴. 에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시시하네.”
“엄마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정훈아.”
일부러 한 건데?
너 속 좀 시꺼멓게 타 보라고.
“이런 말 엄마 앞에서 하지, 방송국 가서 할까. 아, 맞잖아요. 하나 있는 동생이 회사 일 좀 열심히 좀 해 보겠다는데, 언제는 열심히 하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말을 바꿔? 뭐야? 뭐 하자는 거야?”
“아니라니까. 너는 네 형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어떻게 봐야 하는 건데요? 엄마 찾아가서 이런 소리나 하고 다니는데.”
“네 형이 뭐라고 한 거 아니라니까?”
“아니면 아니지, 엄마는 뭘 또 그렇게 정색까지 해요? 그리고 엄마는 아까부터 왜 계속 형 편을 드는 거 같지? 아, 갑자기 진짜 너무 섭섭해지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구 편이 어딨어? 다 똑같은 엄마 자식들인데.”
“그럼 회장님도 아니고, 형도 아니고. 누가 엄마한테 그런 소릴 했냐고. 누구예요? 어떤 미친놈이 엄마한테 그런 이상한 소릴 흘렸냐고.”
“씁! 옆 테이블 사람들 듣겠다. 미친놈이 뭐야, 미친놈이.”
“그럼 이렇게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하고 다는 네 미친놈이지, 제정신이에요?”
“네 형수가 며칠 전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잖아. 그거 때문에 네 형이 요즘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형수가?”
“아니야, 그런 거. 형수도 걱정이 되니까 네 형 몰래 나한테만 그런 이야기를 조심히 꺼낸 거야. 그것도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내가 몇 번이나 물어본 뒤에야 마지못해.”
마지못해?
놀고들 자빠졌다.
집안 꼬라지 잘 돌아간다.
나하고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것들이 자기들 치마폭 안에서 나의 재경을 움직이려 들어?
“형수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 이상하네.”
“또, 또. 그런 거 아니라고 엄마가 말했지.”
“한 다리만 걸쳐도 ‘아’가 ‘어’로 바뀌는 게 사람 말인데, 형수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지? 정 걱정이 되면 자기가 자리를 만들어서 나랑 형이 이야기할 수 있게 해 보든가, 그럴 내용이 아닌 거 같음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지 가족들 이간질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실 난 그 자리가 재미가 있었다.
화가 날 이유가 없지.
제까짓 것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어림없다.
지난 1년 반, 모직에서의 시간은 내가 그간의 정황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판단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아니다.
내가 왜 손중길이인지, 나 손중길이가 어떻게 합당포의 작은 포목점에서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한때는 6만 명 가까이 되던 직원과 함께했던 재경을 만들어 냈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네 형수도 걱정이 되니까 그랬던 거 아니겠어. 평소 안 그러던 애가 엄마한테 조심스럽게 그런 말을 하니까, 엄마는 또 혹시나 해서 너한테 물어보는 거고.”
“내가 궁금한 게, 나는 회사 일을 열심히도 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
“애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엄마가 하는 말을 삐딱하게 받아들여?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엄마 가슴 뛴다.”
“아니, 도대체 나더러 누구 장단에 어떻게 맞추라는 거냐고. 열심히 하라고 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젠 열심히 하는 거 가지고 뭐라고 그래. 뭐 어쩌라는 거예요?”
“너 형이랑 안 싸울 거지?”
이게 너희 장가의 기질이겠지?
네놈들은 내 자식 놈들을 그렇게 갈라 찢어지게 만들어 놓고, 정작 네 자식들은 그러지 말기를 바라는 그 심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심보란 말이냐.
고얀 것.
“왜 대답을 안 해?”
“꼭 그 질문이 더 싸움을 붙이는 거 같아서요.”
“손정훈.”
“형이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내가 열심히 하는 건 싸움을 부르는 거네. 그런 거네, 그죠? 그렇게 되는 거야, 우리 집에선.”
“네가 먼저 그러겠다고 엄마랑 약속을 했잖아.”
“그 약속을 엄마가 안 지켰잖아.”
“아… 안 지키긴 엄마가 무슨 약속을 아, 안 지켰다고 그래?”
그래, 이게 너고, 장가다.
제 곳간을 채울 줄만 알지, 그 곳간을 가족을 상대로도 열 줄을 모르는.
받을 것만 기억하고, 줄 것은 기억을 하면서도 모르는 척 최대한 시간을 벌려고 하는.
내가 왜 그걸 몰랐단 말인가.
그게 내가 사돈 집안으로 선택했던 너희 장가였고, 내 자식들을 찢어 갈라지게 만든 너의 장가였음을.
내 그걸 알았더라면 비록 네가 탐이 나도 너가 아닌 장가를 더 자세히 살폈을 게다.
그랬더라면 너희 장가가 아닌 조금 부족은 해도 격이 있는 집안의 여식을 홍준이의 짝으로 선택했을 것이고.
그 장가의 둘째 여식, 장혜란이를 실눈으로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아님 못 하는 척하는 거예요?”
“…….”
“계속 약속, 약속 해서 하는 말인데 엄밀히 말해서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엄마. 그 약속을 안 지키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엄마고.”
“무, 무슨 약속을 엄마가 안 지켰다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모직을 업계 1위로 만들어 봐라. 그래서 나는 만들었잖아.”
“…….”
“업계 1위로 만들기만 하면 부경 계열사 지분을 주겠다. 그런데 난 아직 받은 게 없고.”
“그게 지금 네가 왜 필요해?”
“그게 궁금할 거였음 그때 물어봤어야지. 그게 왜 필요한지.”
“…….”
“약속을 할 땐 그게 왜 필요한지, 어디에 쓸 건지 전혀 안 물어봐 놓고, 줘야 할 때 되니까 그게 이제 와서 궁금해요? 그리고 아닌 말로 그게 왜 필요한지가 왜 궁금해? 당연히 가지고 싶지. 그거 돈이잖아요. 힘이고. 세상에 돈 싫어하고 힘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충분히 가지고 있어도 부족한 게 돈이고 힘 아닌가?”
“필요할 때 이야기해. 화제 지분 팔 때처럼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엄마가 줄 테니까.”
그래, 이게 장가 스타일이지.
이게 부경가 스타일이야.
“지금 필요해요.”
“왜?”
“거봐. 내가 분명히 왜 필요하냐고 물으실 줄 알았다니까? 쓸 때 허락을 받아야 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설명, 설득해야 되고. 이게 어떻게 내 거예요?”
“…….”
“약속을 안 지킨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예요. 그리고 그럴 생각 전혀 없었는데, 내가 진심으로 형이랑 경쟁을 해 버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져 버렸어.”
“그러지 마라, 정훈아. 우린 가족이야.”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그 지분을 줘요. 그거 들고 있는다고 엄마가 마땅히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지분이 작니? 그거 네 명의로 당장 다 돌리려면 세금은 또 좀 나와? 엄마가 어디 아들한테 그거 주는 게 아까워서 이러는 거겠어?”
그래 보인다.
그거라도 꽉 쥐고 있어야 홍준이를 상대로든, 누굴 상대로든 네 힘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열심히 하는 게 해선 안 되는 거예요?”
“…….”
“막상 해 봤는데, 내가 형보다 더 잘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거예요?"
“…….”
“갑자기 궁금해지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또 그래. 우리 집안 말고, 재경 그룹 전체 입장에선 한 명이라도 실력 있는 경영자가 더 많아지는 게 훨씬 더 유리한 거 아닌가? 에이, 그냥 나 그 지분 포기하고 재경에 욕심을 한번 내 볼래요. 갑자기 그렇게 하고 싶어졌어. 엄마, 나 욕심내 봐도 되는 거죠?”
“정훈아.”
“안 되는 거면, 지분이라도 주세요. 나도 뭘 좀 해 보게. 형한테는 다 밀어주면서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주려고 그래요? 이제야 내가 회장님이 이해가 되네.”
“…뭐가?”
“섭섭해요. 나도 똑같이 열심히 하고 싶고, 할 수 있는데 기회는 기회대로 안 줘, 그렇다고 따로 다른 걸 해 볼 수 있게 지원도 안 해줘. 그러니 큰아버지를… 에이, 아니에요. 이런 내용을 엄마 앞에서 입에 담는 건 누가 봐도 좀 아니지.”
“…….”
사실 약속을 안 지킨 건 장혜란만이 아니다.
태산이도 내게 줄 게 있지.
모직을 업계 1위 자리로 올려놓으면 알려 주겠다고 했던 내용이 있다.
작년에 내가 남 사장과 함께 방돔 지사 건물을 보러 갔다가 정엽이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였지, 아마?
정엽이가 마뉴엘 엠흐가 대표자로 있는 ‘드모어’라는 투자 회사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걸 내가 알아 버렸다고 하자, 태산이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게 부경호텔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숨은 패의 존재를 입에 담았었다.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이미 정엽이에겐 한국으로 들어올 명분을 던져 준 상태.
언제 들어와도 들어올 정엽이겠지만, 어쩌면 태산이가 숨기고 있는 패를 이용해 정엽이를 좀 더 일찍 들어오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다음 날 태산이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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