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러 가자고?
“요즘 많이 바쁜가?”
하늘이 때문에 괜한 걱정을 했네.
최근 들어 기억력에 조금씩 구멍이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런데 거진 3주 만에 보는 건데도 그 전에 봤을 때와 전혀 다름없이 괄괄한 영감탱이 모습 그대로였다.
“네, 좀 그렇네요.”
역시나 이번에도 날 보자마자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 장기판부터 찾는 태산이었다.
함께 장기를 두며 정엽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너 다녀간 뒤로 정엽이한테서 전화가 한번 왔다.”
장군 앞으로 수성을 위해 지어 놓았던 포를 움직이며 태산이가 말했다.
도대체 저걸 왜 자꾸 움직이는 거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수성이 될 것을….
이번 판도 금방 끝나겠다.
“부경호텔 지분 12퍼센트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면서?”
“그 지원이라도 안 해 주면 세월아, 네월아 하며 준비만 하다 볼 장 다 볼 거 같아서요.”
태산이를 떠보는 데 성공을 했다.
흡사 태산이의 표정은 내가 하는 짓이 재밌다는 식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정엽이가 얼마나 독한 놈인지, 넌 아직 모른다. 철저한 놈이야.”
“그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할 정도로, 부경호텔을 크게 본다는 거 자체가 저는 좀… 그렇더라고요.”
“에끼, 이 사람아. 부경호텔이 어디 슈퍼 가면 살 수 있는 라면인 줄 알아?”
“그걸 사기도 전에 끓일 생각부터 하니까 답답해서 하는 말이죠.”
“끓이지도 않을 라면을 뭐 하러 사? 이왕 먹기로 한 거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맛있게 먹을지, 미리 궁리해 보는 것도 필요한 거지.”
“그게 라면을 맛있게 끓여 먹겠다고 하는 궁리 하고, 이걸 내가 끓여 먹어도 되나… 하면서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건 큰 차이지요.”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할 위험 요소들을 치워 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거뿐이야.”
“우린 다 알고 있잖아요. 뭔가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그 뭔가를 어렵게 만드는 방해 요소, 장애물들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걸요.”
지나치게 신중한 건 태산이 자네 스타일이지, 정엽이의 스타일은 아닐걸세.
자네에게 배웠으니, 자네 스타일이 배여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앞으로는 내가 그 스타일을 좀 바꿔 줄 생각이야.
“무조건 될 거라는 확신이 아닌 방해 요소, 장애물들을 더 강하게 믿어 버리면 그 순간 확신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대신 그 방해 요소, 장애물들을 확실히 걷어 내고 시작을 하기만 한다면 실패할 일은 없지.”
“그래서 지금까지 걷어 낸 방해 요소, 장애물들이 뭡니까?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를 확보하고 있는 드모어보다 훨씬 더 비싼 패를 가지고 계신다고 하셨잖아요.”
“기억력도 좋다.”
“판만 짤 줄 아는 놈은 필요 없다. 돈을 버는 능력도 증명을 해 봐라, 그럼 드모어보다 훨씬 더 비싸게 들고 있는 패를 보여 주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죠.”
“이거는 마저 두자. 이거 두고 나서….”
“장이요.”
“…….”
“여기에서 이걸 이렇게 올리면 외통수.”
“너 진짜 계속 장기 재미없게 둘래?”
“저는 완전 재밌는데요?”
태산이가 가지고 있던 패.
드디어 그게 내 앞으로 공개가 되고 있었다.
“2008년도였으니까, 그게 벌써 15년 전이네.”
빈 공터를 찍어 놓은 사진 여러 장이 장기판 위로 펼쳐졌다.
“아랫동네에서 동부산 개발을 준비한다고 현금쟁이들이 한참 몰렸던 적이 있어. 그게 또 흐지부지되는가 싶더니 해운대에 엘시티 올라간다고 또 잠깐 반짝하고. 확정되기 전까지 한 몇 년을 끌었어.”
“그럼 이건….”
“현금쟁이들 귀에는 누가 그런 말을 흘리겠어? 그전에 여기 이 땅, 4만 8천 평을 평당 120에 잡아 놨어.”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거지?
간만에 이 친구가 날 궁금하게 만들어 주네.
“이 옆이 바로 오시리아역이야. 맞은편으로 이케아, 저 위에 아난티 리조트. 그리고 동부산 쇼핑몰… 딱 15년 잡아 놨는데 4배 장사를 하고 있어. 4년 전에 배명건설에서 5배를 쳐줄 테니까 땅을 팔라고 하는 거야.”
“배명건설이면….”
“거기도 아난티처럼 외국 호텔 브랜드 받아 와서 라이선스 호텔 장사 하는 데지. 간간이 아파트도 올리고. 누가 봐도 여긴 리조트가 들어가야 하는 자리거든. 4만 8천 평이면 어디 면적이나 적나. 돈 좀 발라서 적당하게 하나 지어만 놓으면 운영이야 직원들 월급 챙겨 줄 수 있을 정도로만 해내면 되는 거고, 이 인프라에 앞으로 계획된 도시 계획까지 앞으로 최소 지금 4배 장사한 데에서 다시 두세 배 장사는 더 할 수 있는 힘이 있어, 여긴.”
설마 이 친구가 지금 내 앞에서 고작 땅 놀이를 해서 재미를 봤다는 걸 자랑이라고 하겠다는 건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부경호텔이 여기에 리조트를 올려 보겠다고 하면 한 2, 30년 정도 그냥 갖다 쓰라고 땅을 빌려줘 볼 생각이야.”
“……!”
“물론 아예 한 푼도 안 받을 순 없지. 내야 하는 세금이라는 게 있고, 재미라는 게 있는데.”
이 친구 이거….
“부경호텔이 현재 2004년 제주도에 호텔 하나 올린 거 이후로는 더 이상의 사업 확장을 못 해내고 있는 상황이야.”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재경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고 보면 돼. 확장 대신 내실 다지기에 집중을 했지. 그런데 그 내실 다지기라는 게 결국은 주주들을 심심하게 만드는 거거든. 특히 호텔 사업처럼 땅장사로나 돈을 만질까, 배당 장사는 아예 기대를 버려야 되는 종목은 더더욱 그렇고.”
“기가 막히네요.”
내 말에 태산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 정도 들은 게 전부인 상태에서 벌써부터 기가 막히다는 표현을 쓰느냐고 물었다.
“새 경영권이 해 나갈 사업 확장을 무기로 부경호텔 쪽에 지분을 담그고 있는 투자사들을 움직이겠단 거 아닙니까.”
“눈치는….”
이 정도에 무슨 눈치가 필요할까.
현재 부경호텔의 오너 장혜선 앞으로 잡혀 있는 지분이 18.7퍼센트다.
사업 총괄을 맡고 있는 그녀의 아들 박현민이 앞으로 잡혀 있는 지분이 7.4퍼센트고.
그 외 장혜선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우호 지분이 16퍼센트 정도로 잡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나머지는 정엽이가 들고 있는 드모어처럼 외국계 투자 기업이나, 국내 기관 투자 쪽 지분이고.
사실 내가 정엽이라면 내가 12퍼센트 지분을 지원해 줬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11퍼센트에 12퍼센트를 합쳐 장혜선을 상대로 지분 우위부터 다져 놓고 나머지 박현민이의 지분이나 그 외 장혜선 쪽 우호 지분들은 태산이가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기관 투자 쪽을 두드려 묶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 여러 말이 나오고, 또 엄하게 부경의 장가 형제들이 장혜선 쪽으로 지원을 하는 변수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런 변수를 정엽이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 내심 그걸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변수는 부경의 장가 형제들 쪽이 아니라 태산이 쪽에서 나와 버렸네.
“12퍼센트가 없는 상황에서도 한번 붙어 볼 만하다 싶었어. 오래 기다렸지. 그런데 네가 진짜 그 12퍼센트를 지원해 줄 수 있다면, 내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부경호텔 쪽에 지분을 담고 있는 투자사들을 차례대로 만나 볼까 해.”
“한결 수월해지긴 할 거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손정엽이 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게 되는 거네요.”
“뭐?”
“그렇잖아요.”
“어쩜 그렇게 심술을 부리는 것도 네 할아버지랑 똑같을꼬. 심술을 부릴 거나, 안 부릴 거나.”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정엽이가 호텔 사업을 맡아 나가는 게 아니다.
부경으로 넘어간 호텔 사업을 정엽이가 직접 다시 가져오는 거다.
큰 사업도 아니고, 고작 부경이 가지고 있는 7개 호텔 경영이야 얼마든지 전문가들을 써서 하면 되는 일.
그게 뭐가 중요할까.
진짜 중요한 건 싸워서 다시 제 것을 가져올 줄 아는 집념인 것이지.
호텔 사업을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다시 가져올 거 같단 생각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는 미련을 아쉬움으로 혼자 속으로 달래고 있을 때, 그런 날 빤히 쳐다보며 태산이가 말했다.
“정엽이한테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지?”
“네.”
“부경의 이름을 내린 다음 거기에 다시 재경의 이름을 올리지 말고, 아예 새로운 이름을 올리라고 했고.”
“네.”
“그렇게 정엽이가 호텔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으면 5년 뒤엔 지원한 12퍼센트 지분을 정엽이가 다 흡수할 수 있도록 팔아 주겠다고 했다던데, 그거 진심이야?”
“네.”
장기판 위로 펼쳐져 있던 사진들을 한 장씩 차례대로 포개어 가며 태산이가 말을 이었다.
“사촌이라도 형제라서?”
“그렇죠. 가족이니까요.”
다 포갠 사진들을 내 앞으로 내미는 태산이었다.
“이 땅 이거, 직접 내려가서 한번 볼래?”
“그걸 제가 봐서 뭐 합니까. 대충 머릿속으로 그려집니다. 그 주변 인프라부터 시작해서.”
“거기 지분 가진 투자사들하고 이야기만 잘되면, 앞으로 한 2, 30년 정도는 정엽이가 쓸 수 있도록 해 줄 생각이야.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확보를 해 놓은 땅이기도 하고.”
“…….”
“2, 30년 뒤면 나는 물론이고 영석이라고 그 땅이 필요하겠어? 벌써 하늘이 애비 나이도 60인데. 하늘이 이름으로 해 놓은 땅이다.”
누가 돈쟁이 생활했다고 안 할까 봐, 알뜰하게도 나눠 놨네.
“자네 할아버지 눈감으실 때, 그 임종을 나 혼자 지켰다. 알고 있지?”
“네.”
“그래, 내게 그러셨다. 당신 자식 놈들, 내 자식인 것처럼 챙겨 달라고.”
“…….”
“나를 당신의 형제인 듯 부탁하는 거라고 말이야. 평생을 옆에 두고 부려 먹으시더니, 돌아가셔서까지 날 부려 먹으셨어.”
내가 다 갚겠네.
곱절로 갚아 줄 거야.
“그렇게 살았다. 자네 아버지 되는 사람까지는 내가 품지를 못했지만, 자네 고모, 그리고 정엽이. 어떻게든 내 자식처럼 챙겨 왔어.”
“네.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건 내 능력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어서 그런 거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자네 할아버지하고의 약속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켰어.”
“…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너도 이 할애비하고 약속 하나만 하자, 정훈아.”
“네. 뭐든 말씀하세요.”
“나 죽고 나면 하늘이, 태양이… 네 친동생처럼 잘 좀 보살펴 줘.”
“…….”
“지금 네가 정엽이한테 베풀고 있는 마음처럼 하늘이, 그리고 태양이… 네가 잘 좀 품어 줘.”
“뭐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뜬금없이 하고 그러세요? 아직 괄괄하신 분이.”
“네가 내 친손주인 듯 부탁하는 거야, 이 사람아.”
그러면서 다시 한번 들고 있던 사진 뭉텅이를 내게 내미는 태산이었다.
난 그걸 받아서 다시 장기판 위로 올려놨다.
“네, 그렇게 할게요. 저도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셨던 것처럼, 지금 이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래, 너라면 내가 믿는다. 고맙다.”
“할아버지가 저한테 고마울 게 뭐가 있습니까? 저희 집안이 두고두고 할아버지한테 갚아야죠.”
* * *
온 김에 저녁이나 얻어먹고 갈 요량으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시끄럽던 태양이 놈이 주말이라, 복학 전 친구들을 만나겠다고 나가서인지 티브이 소리만 흐르는 거실이었다.
하늘이도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고, 영석이는 한 번 티브이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라 아예 티브이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하고 있었다.
조동희 전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데, 주말 저녁에 이 친구 전화를 받게 될지는 몰랐다.
“네, 전무님.”
―주말 잘 보내고 있어요?
“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워낙에 처세가 좋은 친구가 되어 놔서, 처음 몇 마디 주고받을 땐 전화를 준 게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다.
―별건 아닌데, 혹시 몰라서 과장님은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 전화를 했어요. 조금 전에 손정태 사장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정태한테서?
“네, 뭐라던가요?”
―내일 시간 되면 같이 공이나 치러 가자고 그러네요. 아마 지난주에 편 사장하고 같이 공 치면서 나눴던 이야기 때문인 거 같은데, 괜히 빼기가 그래서 그러자고 했어요.
“불편하시겠네요.”
―편하지는 않죠.
“불편하실 거 같음 그냥 다음에 하자고 하시지….”
―그러게나 말이에요. 통화를 끝내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만나서 딱히 좋을 건 없을 거 같다는 후회가 생기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알겠다고, 내일 보자고 해 버렸는데.
바로 그때 내 눈에 내 통화를 안 듣는 척하면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하늘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몇 시에 만나기로 하셨는데요?”
―1시 라운딩이 어떻겠냐고 하네요.
“1시. 흠… 만나면 내일 틀림없이 불편한 이야기가 나오겠죠?”
―그런 건 괜찮은데, 제가 그냥 좀 마음이 안 좋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전화 끊고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왜요?
“어… 아마 손정태 사장한테서 다시 전화가 갈 겁니다. 내일 라운딩 약속 취소하자고요.”
―예? 왜요? 에이, 괜히 또 전화해서 서로 감정 상할 일은 만들지 마시고요.
“아니요, 제가 왜 그럽니까.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조 전무와 통화를 끝내 놓고 하늘이에게 물어봤다.
“하늘쓰.”
“왜?”
“너 내일 약속 없지?”
“참 매너 없다. 약속 없지? 그렇게 묻지 말고 약속 있어? 이렇게 물어봐. 예쁘게 물어본다고 돈 드니?”
“너 내일 약속 있어?”
“내일? 음….”
뭘 또 생각하는 척이야, 아무 약속도 없는 거 빤히 다 아는데.
“몇 시에?”
“너 내일 우리 집에 인사하러 안 갈래?”
“뭐, 뭐, 뭘 하러 가자고?”
티브이 삼매경에 빠져 있던 영석이도 갑자기 고개를 내가 있는 쪽으로 홱! 하고 돌려 커진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내일 우리집 본가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
“다 알아도 가족들 다 같이 식사는 한번 해야 할 거 같아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