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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내용 아니에요? (151/303)

다 아는 내용 아니에요?

서재에서 골프채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정태의 폰으로 아버지, 손 회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아버지.”

―승현이는?

“영상 통화 해 드려요?”

―아니야. 그때 애 감기 걸린 건 괜찮아?

“네, 한 며칠 칭얼대다가 괜찮아졌어요.”

―춥다. 밖에 데리고 나갈 때 따뜻하게 입혀서 나가.

“네, 식사는요?”

―이제 해야지. 너 내일 가족들 데리고 집으로 와라. 점심시간 맞춰서.

챙기고 있던 골프채를 내려다보며 정태는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조동희 전무와의 골프 약속.

하지만 그게 아버지의 호출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왜? 약속 있어?

“무슨 일로….”

―내일 정훈이가 하늘이를 집에 인사시키러 데리고 오겠단다.

“정훈이가요?”

―약속이 있어도 크게 중요한 약속 아니면 취소를 해. 지금 스너프에 미래금융보다 중요한 파트너가 어디에 있어?

당연한 거다.

스너프의 절대적인 파트너, 미래금융.

그리고 그 미래금융의 장녀, 하늘이.

지금은 정태가 준비 중인 스크린 골프장 사업에 다시 한번 미래금융의 투자가 일어나야만 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파트너가 중요한가요, 어디.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이 인사를 온다고 하는데.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낸 정태는 골라 놓았던 골프채들을 아무렇게나 빈 골프 가방 하나에 다 담아 넣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아내 원수경을 찾았다.

거실에선 도우미 아주머니 한 분이 승현이와 놀아 주고 있을 뿐, 원수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 엄마는요?”

“드레스 룸에 가시는 거 같던데, 거기에서 통화 중이신 거 같아요.”

“얼마나 됐어요?”

“네?”

“통화하러 들어간 지 얼마나 됐냐고요.”

“한… 30분….”

가사 도우미의 손에서 놀고 있는 아들의 모습.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정태가 말했다.

“30분 뒤에 식사할게요. 승현이 저 주세요.”

정태는 승현이를 안아 들고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 진짜? 미쳤나 봐, 정말. 걔는 벌써부터 그렇게 주책을 부리고 다니면 나중에 어쩔 거라니?”

누구와 그렇게 신나게 통화를 하는 걸까.

자신이 승현이를 안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음에도 아예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에 정태는 한숨이 나왔다.

“원래 그런 애들은 돈이 목적이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어? 설마 나이 많은 아저씨를 상대로 사랑이라도 할까 봐? 왜 그런 애들을 진심으로 상대해? 남편이 젊은 여자에 호기심 느낄 때마다 찾아서 우악을 지르고 다니면, 남자는 더 밖으로 돌아. 그냥 조용히 불러내서 돈 몇 푼 쥐여 주고 자기 남편한테서 떨어지라고 하면 될 것을, 격 떨어지게….”

민소매 드레스 한 벌을 옷걸이째 들어 거울 앞으로 선 원수경.

한 손으로는 계속 통화를 이어 가고, 남은 손으로 옷걸이째 드레스를 자기 몸에 대어 보다가 거울을 통해 승현이를 안고서 자신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원수경은 거울을 통해 정태에게 싱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얼른 들고 있던 드레스를 한 곳으로 내려놓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승현이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래, 알았어. 어머, 얘. 우리 통화 너무 길게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만간 만나서 다시 해. 그래, 알았어. 들어가.”

그런 원수경의 모습을 보며 정태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 입으로 통화가 너무 길었다고 말을 하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만남을 위해 따로 남겨 놨단 뜻일까?

승현이를 안고 있는 남편.

그런 남편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 오늘따라 괜한 답답함이 들어 있는 것만 같은 원수경이었다.

얼른 승현이를 넘겨받아 품에 안으며 급기야 정태가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 놓기에 이르렀다.

“내 친구 중에 수진이 알지? 왜 내 친구 중에 제일 먼저 시집간 애. 하성가구 둘째 아들이랑. 나이 차이도 꽤 되잖아. 그 집 남편이 여자를 그렇게 밝히나 봐. 이번에 자기 비서랑….”

“진부하다.”

“…….”

“나 고전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정태는 승현이를 안고 있는 원수경을 위아래로 훑었다.

“못 보던 거네. 쇼핑했어?”

“말투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닌 거 같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과연 이 집에서 하루 종일 당신이라는 사람이 하는 게 뭐일지.”

“뭐?”

“당신이 승현이를 안고 있는 걸 내가 오늘 처음 보는 거 같아서 말이야.”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친구 남편 바람난 일로 또 다른 친구와 통화를 하며 얼굴에 걸었던 생기 반만큼만 승현이 앞에서 보여 줘 봐. 폰 붙들고 있는 시간 반의반만큼만 힘든 표정 짓지 말고 안아 줘 보라고.”

“…….”

“그랬는데도 엄마 품에서 지금처럼 애가 불편해한다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승현이의 문제겠지. 금방 아버지 전화 오셨어. 내일 점심 본가에서 같이하자고.”

“갑자기? 며칠 전에 내가 당신한테 말했잖아. 나 내일….”

얼른 입을 꼭 다물며 칭얼대는 아들을 달래는 원수경이었다.

“정훈이가 내일 하늘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나봐.”

“당신도 내일 조 전무랑 골프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남편의 모습이 오늘따라 잔인하게만 느껴지는 원수경이었다.

“나 골프 치러 가고, 당신 친구 만나러 나가고. 그 시간에 승현이는 누구하고 있어?”

“내일 약속은 내가 당신 골프 약속 잡기 전부터 미리 말했었잖아.”

“내가 하는 회사 일을 당신 개인 약속에 맞춰야 하는 거네?”

“갑자기 왜 이래, 사람 피곤하게?”

“너는 고작 이 정도 대화가 피곤하구나. 부럽네. 30분 뒤에 식사 준비해 달라고 했어. 승현이 좀 보고 있어. 난 조 전무한테 내일 약속 취소하자고 전화 한 통 줘야 할 거 같으니까.”

* * *

다음 날 정태 내외는 11시쯤 본가에 미리 도착해 정훈이가 데리고 올 하늘이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중요한 식사 자리인 만큼, 원수경은 자신이 직접 봐 온 장을 풀어 갈비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이다.

특히 자신이 만드는 담백하고 연한 갈비찜을 참 좋아하신다.

12시가 다 되어서 정훈이와 하늘이가 도착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원수경은 주방을 책임지고 있었다.

“밑반찬들 좀 깔아 주세요. 이건 제가 마무리해서 올릴게요.”

“네.”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 앞에서도 한결같은 친절함을 보이는 원수경.

그녀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른 입고 있던 앞치마를 이용해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며 거실로 나왔다.

양손 가득 미래금융가에서 보내온 선물을 대신 들고 들어온 정훈이.

그리고 그 옆에서 시아버지의 품에 안긴 승현이의 작은 손을 잡고 함께 웃어 주고 있는 하늘이의 모습이 원수경의 눈에 들어왔다.

“왔어요? 반가워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러니까요. 왔어요, 도련님?”

원수경은 오늘 이 식사 자리에서 어떻게든 정태와 승현이의 존재감을 하늘이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했다.

더 정확하게는 남편이 장남으로서의 존재감을 동생과 나누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음식을 직접 하시는 거예요?”

하늘이의 물음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오늘처럼 중요한 식사가 있는 날만요.”이라고 아주 살갑게 대답했다.

“요리를 잘하시나 봐요?”

“으으음… 결혼하기 전까지는 라면도 못 끓였어요. 그런데 하니까 되는 거예요. 그러다 욕심이 나기 시작해서 학원 같은 델 몇 군데 다녔지? 하다 보니까 요리하는 게 재미가 있지 뭐예요. 아직 손맛이 필요한 밑반찬 같은 건 흉내만 내는 수준이고, 굵직굵직한 거 있잖아요. 한 끼 메인으로 낼 수 있는 거. 그런 것들만 가끔 하는 거예요.”

원수경은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얼른 하늘이에게 직접 소파 자리를 안내했다.

“잠깐만 같이 앉아 있어요. 내가 아주머니들한테 말해서 마실 거 준비해 주라고 할게요.”

“아니에요, 저도 그냥 같이 안에 들어가서 식사 준비하는 거 돕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은데….”

“에이, 아니죠. 어쨌거나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건데. 안 그래요, 어머니?”

장혜란 역시 그 정도 마음이면 충분하다며 하늘이에게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다.

“저 어렸을 때 이 집에 와 본 적 있었잖아요.”

장혜란이 박수까지 치며 맞장구를 쳤다.

“맞네. 어렸을 때 몇 번 와 본 적 있었겠네.”

“네. 옛날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아도 드문드문 기억이 나요. 저도 안에 들어가서 뭐라도 좀 같이할게요. 그게 덜 불편할 거 같아요. 제가 이 집이 처음도 아니고, 가족들끼리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손님 대접을 받는다는 게 어색해요.”

“그러니? 그래, 그럼 수경이가 안에 데리고 들어가서 같이 이야기나 나눠.”

주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서며 하늘이가 말했다.

“여기가 훨씬 더 편할 거 같아서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옛날부터 서로 다 아는 사이인데 새로운 관계로 노력하는 상황. 왠지 좀 오글거릴 거 같아서요. 언니랑은… 아,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요. 나도 하늘 씨한테 벌써부터 형님 소리 듣는 거보다는 지금은 언니가 더 편할 거 같아요.”

“제 말이요. 히히. 제가 오늘 오면서 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왔어요.”

“계획? 무슨 계획?”

“언니랑 친해져 볼 계획이요.”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왜 필요해요? 당연히 친해지는 거지.”

얼굴에 환한 미소를 걸어 놓고 있으면서도 원수경은 속으로 “이게 왜 먼저 말을 편하게 하란 소릴 안 해?” 하는 생각 중이었다.

그런 원수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이는 본격적으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나오는 압력솥 근처로 다가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수증기의 냄새를 맡았다.

“으음! 갈비찜이죠, 이거?”

“네.”

“벌써 냄새가 맛있어요. 이거 언니가 한 거예요?”

“이거랑요. 잠시만요, 하늘 씨.”

함께 식사 준비를 도와주고 계신 아주머니 한 분께 원수경이 부탁했다.

“뼈 발라낼 앞접시를 하나씩 더 준비를 해 주셔야 될 거 같아요.”

“네, 준비할게요, 작은 사모님.”

하늘이에게 그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작은 사모님.

아주머니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미소 속에 숨겨 놓고 불 조절을 해 가며 원수경이 말했다.

“그런데 진짜 괜찮겠어요? 보니까 머리도 그렇고 옷도 신경 많이 쓴 거 같은데 몸에 음식 냄새 많이 배일까 내가 다 겁나네.”

“잘 보이겠다고 옷까지 신경 써서 차려입고 왔는데, 하는 짓이 미우면 안 되잖아요.”

“이미 하늘 씨 존재 자체가 집안 복덩이인데, 누가 하늘 씨를 밉게 봐요?”

“그게 어디 제가 예쁜 건가요, 미래금융이 예쁜 거지.”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따박따박 말대답….

원수경의 미소에 조금씩 노력이 필요해지고 있었다.

“앞접시 놓는 거 그거 제가 할게요.”

하늘이가 식탁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놔둬요. 아주머니들도 딱히 할 거 없어요. 식사 준비 다 끝났는데, 뭘. 이것만 끝나면 바로 식사 시작하면 돼요.”

하늘을 붙잡아 놓고 원수경이 물었다.

“하늘 씨.”

“네, 언니.”

“나 그런데….”

주방 안의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며시 살펴 놓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언제 기회 되면 하늘 씨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함께 목소리를 낮추며 하늘이가 물었다.

“저분들이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조심을 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원수경이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들 입이 무거운 분들이세요. 집 안에서 나온 말을 밖으로 들고 나가는 사람은 최소한 이 집 일을 도와주시는 분 중엔 한 분도 없어요.”

“그래야죠. 편하게 물어보세요.”

잠시 뜸을 들인 후 원수경이 물었다.

“하늘 씨 진짜 채서린이랑 개인적으로 친해요?”

당황해하는 하늘이의 모습에 원수경은 일부러 더 아무런 악의가 없는 모습, 진심으로 궁금한 듯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이젠 가족이니까.”

“…….”

“아니, 다른 뜻이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에요. 재경모직 관련된 광고는 다 하늘 씨네 미래기획에서 하잖아요.”

“…네.”

“악녀검사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채서린을 시니어즈 광고 모델로까지 세우길래 진짜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건가 해서요.”

그 질문 앞에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하늘이가 대답했다.

“혹시 회장님이랑 사모님도 전혀 모르고 계시는 내용이에요?”

“…뭘요?”

“정훈이 오빠랑 채서린의 관계. 그거 대중들이나 반신반의하는 거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 아니에요?”

하늘이가 던진 직구 앞에 오히려 더 큰 당황을 하기 시작한 건 원수경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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