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추
하늘이는 거기에서 한술 더 떴다.
“저희 집에서도 다 알아요. 정훈이 오빠, 그리고 채서린의 관계.”
“하, 하하. 그으…래요?”
“모를 수가 없죠. 대한민국의 찌라시 대부분이 메이드 인 금융가인데. 그리고 두 사람의 스캔들은 제가 나중에 덮어 버린 거지, 사실 찌라시 수준도 아니었잖아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
“채서린은… 제가 호감이에요. 개인적으로 친한 건 아닌데, 같이 일하기에 참 수월한 스타일이거든요. 매너도 좋고.”
“하늘 씨가 마음이 넓네.”
“안 그래요. 저 속 좁아요. 그건 제가 마음이 넓은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도 아니고 남의 과거형을 마음에 담아 둘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걸 마음에 담아 두는 게 더 이상한 거죠.”
혹시 저 말은 날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 걸까?
원수경은 조금 전 하늘이가 한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과거형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게 이상한 거다?
“그렇죠. 요즘 시대에 젊었을 때 하는 연애가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거기다 집안끼리 조건 맞춰서 하는 결혼인데, 안 그래요?”
“조건이요? 무슨 조건이요?”
하늘이는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지 원수경에게 돌려서 물었다.
“양쪽 집안의 조건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가요? 저는 자만추라서….”
“자만추?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에이, 도련님이랑 하늘 씨가 자만추는 아니지.”
“아뇨, 그게 언제 적 자만추예요? 요즘 자만추는 안 그래요.”
그 순간 원수경은 ‘설마 자고 난 뒤 만남 추구를 말하는 건가.’라고 생각을 하다가, 설마 자기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요?”
“자격 보고 만남 추구. 저는 조건이 아니라 자격을 봤어요, 그걸 보니까 채서린과의 과거는 신경도 안 쓰이더라고요.”
“자격…이요?”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그런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정훈이 오빠가.”
“…….”
“언니도 정태 오빠 만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그러셨을 거 아니에요. 아닌가?”
“뭐가요?”
“집에서 만나 보라고 하는 상대, 바깥에서 들어오는 관계 제안. 조금 전 언니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비슷한 조건에 있는 상대들과 재벌가 뚜쟁이들 통해서 많이 만나 보지 않으셨어요?”
“어쩔 수 없죠. 주위에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비슷한 상대를 찾아 만남을 가지고 결혼을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저도 그랬어요. 많이 만나 봤어요. 그런데 조건만 맞는다고 해서 다 제 성에 차지는 않은 거예요. 결국은 그 조건이라는 게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 부모의 능력이고 배경인 거잖아요. 순수하게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하늘 씨 눈에는 우리 도련님이 가진 능력이 대단해 보이나 봐요?”
하늘이는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면 되는 거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결국 데리고 살 사람은 전데.”
“하늘 씨가 봤다는 우리 도련님이 갖춘 자격이 어떤 건지 궁금해지네요?”
“별거 없어요. 그냥… 제가 생각했을 때 저보다 나은 사람이기만 하면, 제가 인정하고 배울 게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격은 충분한 거죠.”
“…….”
“그런데 그동안 조건만 맞춰서 만나 본 사람 중엔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다음 이어진 하늘이의 말은 원수경이 듣기에 꽤나 공격적이었다.
원수경이 곡해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귀엔 꼭 자신과 하늘이는 애초에 서로가 가진 배경, 이 집안에서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냐고 묻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쨌거나 저는 미래금융의 후계를 이어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봤을 때, 저보다 뛰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제 옆자리를 주면서 함께 미래금융의 미래를 만들어 가 보자고 할 순 없는 거니까요.”
* * *
재경식품 본사는 벌써부터 그룹 회장님의 차남을 받을 준비로 술렁이고 있었다.
모직 쪽으로부터 전달받은 손정훈 과장의 평가가 자신들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무 승진을 하며, 재경식품의 본사 운영 본부장으로 오는 건 이미 확정이 났다.
이미 눈치가 빠르고 손정태 스너프 사장이 식품 생활을 할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말이 상무 이사라는 거지, 결국은 오너가의 인물이 식품을 장악하러 오는 것이라는 걸.
식품의 지분 7퍼센트를 들고 오는 건데, 그룹 회장님의 차남이라는 타이틀 앞에 상무이니 전무이니, 사장이니 하는 따위의 포지션이 뭐가 중요할까.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
“다음 주에 첫 출근하는 회장님 둘째 아들 이야기.”
“또 그 이야기야? 너는 지겹지도 않냐? 그 사람들은 우리랑은 아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야. 뭘 그렇게 다른 세상 사람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이번에 부경백화점, 면세점, 아웃렛이 스너프로 흡수됐잖아요. 그 작품을 만들어 낸 게 다름 아닌 다음 주에 오는 회장님 둘째 아들이랍니다.”
“미친. 말 같은 소릴 좀 해라.”
“진짜라니까요? 전략기획실 윤성환 대리가 제 동기잖아요. 이번에 손정훈 과장 정보 업어 오면서 직접 자기 두 눈으로 확인한 내용이래요.”
“그런 내용이 잘도 그런 정보에 들어가 있겠다. 야, 노 과장. 아무리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막장일 때가 많다지만,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회장님도 아니고 스너프 사장님도 아닌, 아무리 회장님 둘째 아들이라지만 모직에서 일개 인사부 과장이 그런 일을 해내? 그리고 말이 과장이지 출발 자체를 과장으로 시작한 사람이잖아.”
“그게 어째서요?”
“과장으로 실제 조직 생활 고작 2년 해 본 사람이 부경유통을 반으로 쪼개? 야, 노 과장. 부경유통 반으로 쪼개지기 전에 시총으로만 놓고 보면 우리 재경식품 두 배였어. 알고서나 하는 소리야?”
하지만 손정훈에 대한 정보를 물어 온 사람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략기획실에서 받은 내용이 그렇다잖아요.”
“아, 그러니까 그런 정보들이 전략기획실로 왜 들어가냐고.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런 정보는 임원급, 사장단 선에서 나돌고 그치는 거지.”
“…….”
“만화도 그렇게 말도 안 되게 그리면 욕 얻어먹어. 무슨 말 같은 소릴 해야 맞장구라도 쳐 주지. 그리고 너는 손정태 사장님 우리 식품에 계실 때 기억하잖아. 사장님이 하신 거야. 그러니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싹 다 스너프로 흡수가 된 거고.”
“아니라니까요? 진짜 확실한 정보랍니다.”
“왜? 그냥 차라리 스너프를 매입해서 지금처럼 키워 낸 것도 원래는 회장님 둘째 아들 작품이었다고 하지 그러냐?”
그렇게 시간이 다가올수록 손정훈에 대한 평판에 반신반의하던 사람들까지도 조금씩 그 흐름에 뒤섞여 가기 시작했다.
업체 간 트랜스퍼 건으로 모직 쪽 인사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HRM.
모직 쪽 인사부로부터 손정훈 과장에 대한 거짓말 같은 활약상이 계속 HRM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리님, 퍼스펙티브 있잖아요.”
“재경모직 골프 웨어요?”
“네, 그것도 손정훈 과장 작품이래요.”
“그렇다고 하는 소린 저도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거 같아요. 시니어즈를 업어 온 것도 그 사람 역할이 컸다지요, 아마?”
“아, 시니어즈에도 관여를 했던 거예요?”
“그랬다는 거 같았어요. 정확한 건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가요?”
“인사부 소속이었다면서요.”
“소속이 뭐가 중요해요? 회장 아들인데.”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듣자 하니까 진짜 대단한 사람인 거 같긴 하더라고요. 왜 재작년 추석쯤에 재경모직 안산 공단에서 파업 났었잖아요.”
“시끄러웠죠. 뉴스에도 몇 날 며칠 동안 계속 나오고. 결국 노조 위원장 횡령 혐의로 구속됐잖아요.”
“그걸 정리한 게 그 사람이었대요.”
“진짜요? 근데 어리지 않아요? 제가 듣기론 우리보다도 어리다고 하는 거 같던데?”
“그렇겠죠. 손정태 사장 나이가 있는데, 동생이잖아요.”
“진짜 대단하긴 하네. 들리는 소문의 반의반만 팩트라도 그 정도면 사기캐 아니에요?”
“아빠가 회장인데, 그냥 그 존재 자체가 사기캐죠.”
“하긴, 그건 또 그래. 그게 제일 사기지.”
그렇게 손정훈의 존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재경식품에서 직원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점점 더 부풀려지고 있었다.
임원들 역시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예비 처가가 미래금융이라고 하면 손 사장님 입장에서도 제법 껄끄럽겠는데요?”
“우리끼리 있을 때나 이야기하는 거지, 문밖에선 입조심해야 해요. 괜히 또 사장님이나 전무님 귀에 들어갔다가 손 사장님한테까지 들어갈까 겁나네.”
“그러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 하는 말 아닙니까. 우리도 노선을 정해야죠.”
“쓸데없는 소리. 노선은 무슨 노선이에요?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거참 답답한 소리 하시네. 누군 노선 잡는 게 재밌어서 이런 말 하는 거예요? 조동희 전무님까지 데리고 온다잖아요.”
“쩝….”
“아예 작정을 하고 온다는 건데, 당연히 상황에 따라 움직여야겠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말 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사실 사장님도 조 전무님이 계시면 움직임에 제약이 상당히 많아질 거예요.”
“그건… 당연히 그렇겠죠. 어쨌거나 조 전무님은 회장님의 최측근이니까.”
“그런 양반이 함께 넘어오는 건데 노선 잡을 준비 정도는 당연히 하고 있어야죠.”
“그래도 일단은 한번 지켜봅시다. 우리끼리 백날 머리 맞대고 상황 판단해 봤자, 와서 어떻게 분위기를 잡느냐에 따라 다 바꿔야 할 텐데, 그걸 미리부터 머리 싸매고 걱정할 필요 있겠어요?”
“제가 일전에 듣기로는 치밀함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는 거 같던데, 저는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왜요? 또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데?”
“왜 모직 입사 초기에 사흘이 멀다 하고 사고를 치고 다녔잖아요.”
“그랬었다고 들었어요.”
“그거 다 연기였대요, 연기.”
“연기요?”
“모직 임원들 방심시키기 위한 연기.”
“…….”
“그렇게 한 6개월 정도 모직 사람들 다 안심을 시켜 놓고, 남필우 사장님부터 시작해서 조동희 전무님까지, 전 임원들을 한 방에 깨갱시킨 사건이 바로 모직의 채용 변경 건이잖아요.”
“아….”
“항간에는 회장님 특별 지시였다는 말도 있고, 또 남필우 사장님이 계시는데 회장님이 설마하니 입사 2년 차밖에 안 되는 둘째 아들을 시켜 그렇게까지 하셨겠냐는 말도 있고…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건 확실해요.”
“설마하니 임원들 방심시키겠다고 사고를 치고 다니기야 했겠어요?”
“제 생각이 아니라 모직에 있는 김 이사가 그런 말을 했다니까요? 그거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면서. 파리 지사 이전시켜서 그걸로 지금 모직을 업계 1위로 만들어 놨어요.”
“…….”
“그게 다 손정훈 과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요. 20년 넘게 교복 사업, 해외 브랜드 수입 유통만 잡고 있었던 모직이었어요. 남필우 사장님이 실력이 없는 분이세요? 남필우 사장님조차도 엄두를 못 내고 계셨던 걸 모직 생활 2년 만에 청소하듯 다 정리를 해 놓고 이쪽으로 넘어오는 거잖아요. 거기다 조동희 전무님까지 같이. 이건….”
“이건?”
“회장님 계산이라고 봐야 하는 거예요.”
손정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하늘이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이미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재경식품 직원들 사이에서 한참전에 퍼져 있었다.
그렇게 운영 본부장으로 재경식품 본사 첫 출근까지 하루를 남겨 두고 있던 일요일 오후, 명동.
“과장님!”
저 멀리에서 정훈이를 발견한 정현수 HRM 과장이 설렁설렁 뛰어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죄송합니다. 도착하긴 한참 전에 했는데, 차 댈 곳이 마땅치 않아서….”
“괜찮아요. 진짜 금방 왔어요. 나도 주차장 찾는다고 식겁을 했네. 여긴 다 좋은데, 주차가 문제야.”
정현수는 손 과장이 자신을 데리고 가려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함께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속은 좀 괜찮으세요?”
금요일 퇴근 후, 손정훈 과장의 환송회 겸 인사부 전체 회식이 있었다.
자리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손 과장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 많았고, 손 과장은 그걸 한 번도 빼지 않고 모두 다 받아 마셨다.
“어제 하루 종일 누워 있었죠. 현수 씨는요?”
“…….”
“왜요? 왜 그렇게 봐요?”
“갑자기 현수 씨라고 이름을 부르시니까, 어색해서요.”
“이젠 이름을 불러 드려야지. 남인데.”
“우와, 남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갑자기 섭섭해지는데요?”
“농담 한번 해 봤어요. 그날 현수 씨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어후, 많이 마셨죠. 저 중간에 필름 끊겼잖아요. 택시를 잡은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집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그래 보이더라. 3차 때부터 살짝 맛이 가는 거 같아 보였어요.”
둘은 진하게 마셨던 그 날을 기억하며 함께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데 어딜 같이 가겠다고 보자고 하신 거예요?”
“쉬는 날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뇨, 그런 건 괜찮은데 전화로는 물어봐도 이야기를 안 해 주셔서….”
“갑시다. 다 왔어요. 바로 요 앞이에요.”
정 과장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하는 정훈이의 한쪽 손엔 위블로 쇼핑백이 들려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