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람 하나 잡기 딱 좋은 날씨다 (153/303)

사람 하나 잡기 딱 좋은 날씨다

이 집도 대를 이어서 하고 있는 집이다.

족히 50년 이상은 된 집일 거다.

재경의 그룹화가 진행되던 때부터 다녔던 집이니까.

간판부터 시작해서 외관은 아예 싹 다 바뀌었다.

자리만 같지, 건물도 새로 올린 건물이 틀림없고.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던 자리 그곳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일전에 반가운 마음으로 혹시나 하고 들어가 옷을 한 벌 맞추며 가게의 역사를 물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당시 내 옷을 여러 벌 맞춰 주었던 사장 아들이 기술을 배워 대를 잇고 있는 중이라고.

“여긴 왜….”

“들어갑시다.”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는 정현수를 뒤로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40대 초반.

그런데 이 가게 사장이 하고 있는 스타일, 외모만 보면 영락없는 30대 초중반이다.

멋스럽게 기른 콧수염, 거기에 파리도 앉았다가 바로 미끄러질 것 같은 반듯한 머리 모양.

바지의 기장이나, 화려한 재킷의 색상만 봐도 얼마나 패션에 민감하고 자신이 가진 패션 센스에 자부심이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오셨어요?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 오후 늦게나 오실 줄 알았는데.”

“우리 따뜻한 물부터 한 잔씩 주세요.”

“밖에 많이 춥죠?”

“날씨가 대단하네요.”

혹시 몰라서 미리 전화를 했었다.

일요일에도 영업을 하느냐고.

옷을 한번 맞춰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갈 건데, 주말 말고는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울 거라면서 말이다.

나와 정현수가 앉아 있는 낮은 테이블 쪽으로 종이컵에 든 따뜻한 물 두 잔을 내려놓고 반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 사장이었다.

“이분이 맞추실 거죠?”

정현수는 영문도 모른 채 사장이 가지고 온 카탈로그만 쳐다보고 있었고, 내가 사장에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날 쳐다봤다.

“그럼 치수부터 좀 재 볼까요?”

“우리 이거 물 한 잔씩 하면서 몸 좀 녹이고요.”

“천천히 드시고 계세요. 저는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사장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정현수는 안쪽을 눈짓하며 왜 자기 옷을 맞추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우리 정 과장님 좋은 양복 한 벌 맞춰 주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왜요?”

“고마워서.”

“그러니까 뭐가요?”

고맙지.

사실 진작에 뭐라도 하나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깔끔한 이 친구 성격을 봐서는 같이 일하는 동안 뭔가 성의를 보여 주면, 그 성의에 부담을 느낄 거 같아 일부러 마음만 유지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모직 인사부에 있는 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정 과장한테.”

“저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그렇게 생각을 해 주는 거 자체도 내 입장에선 너무 고마웠고.”

“…….”

“모직 인사부에서는 내 자리와 역할이 어정쩡해서 고마운 마음을 서로가 불편함 없이 전달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인사가 많이 늦었는데, 이해해 줘요.”

어느새 가게 사장은 치수를 재는 줄자를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차를 한 대 선물할까 했는데, 그건 너무 눈에 띄겠더라고. 지금 타고 있는 차도 아직은 쓸 만해 보였고. 그런데 우리 첫 만남 때처럼 내가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 역시 이상할 거 같은 거예요.”

“첫 만남….”

“나한테는 첫 만남이죠.”

“아직도 그 전의 일들은 기억이 전혀 안 나십니까? 그러고 보니까 저도 과장님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깜빡깜빡하면서 지냈네요.”

“이젠 저도 깜빡깜빡해요. 나나 정 과장 모두 오늘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뜻이겠죠.”

“병원은 좀… 가 보십니까?”

“당장 크게 불편한 게 없는데, 병원에는 가서 뭐 하겠어요. 가서 치수 한번 재 보세요.”

하지만 정현수는 진심을 담아 사양을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 내일 식품 첫 출근이에요. 지난주부터 마음가짐이 새로웠어요. 그런데 모직에서 뭐 하나 제대로 정리를 못 한 게 있다는 생각에 계속 찜찜한 거예요. 그게 뭔가하고 봤더니, 현수 씨한테 내가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정식으로 못 했더라고. 찜찜한 거 없이, 내 할 도리는 다 해 놓고 첫 출근 할 수 있게 도와줘요.”

결국 못 이긴 척 정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치수를 다 재고, 가게 사장이 추천해 주는 원단 샘플복을 몇 벌 입어 보는 동안 난 준비해 왔던 시계를 상자에서 꺼내 정현수 앞으로 섰다.

“이거 괜찮네. 한 벌은 두 번째 입어 봤던 거로 하고, 한 벌 더는 이걸로 해요.”

“한 벌이면 됩니다, 과장님.”

정현수가 사양을 하거나 말거나, 난 가게 사장에게 두 번째 입어 봤던 샘플복과 지금 입고 있는 샘플복 두 가지로 선택을 하겠다고 말을 전했다.

그리고 정현수의 손에 준비해 온 시계를 채워 줬다.

“이건 또 왜….”

“이거도 선물.”

“과, 과장님! 아니,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비싼 걸….”

눈에 힘을 줘 꼼짝을 못 하게 만들어 놓고, 재킷 소매 안으로 반쯤 가려지는 시계를 살펴보았다.

괜찮네.

어울린다.

정현수의 양쪽 어깨를 톡톡 건드려 주며 내가 말했다.

“정 과장.”

“…네, 과장님.”

“인사의 역할은 이해가 아니라 공감입니다.”

“…네?”

“직원들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상황에 공감을 하는 게 인사의 역할이에요.”

“…네.”

“그걸 정 과장이 너무 잘해 주고 있어서 내가 참 든든했어요. 인사부는 우리 회사에 처음 들어오는 직원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부서입니다. 그래서 인사를 회사의 얼굴이라고도 하죠. 우리가 직원을 뽑을 때 첫인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듯,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지는 많은 인재에게도 회사의 첫인상은 무척 중요할 겁니다. 그 첫인상이 되어 주는 게 바로 또 인사이기도 하고요.”

“…….”

“재경모직은 패션 기업 아닙니까. 그것도 이젠 업계 1위 패션 기업. 거기에 맞는 첫인상의 품격을 항상 유지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분인데… 우리 할아버지 팬이라고 하셨잖아요. 내 앞이라서 그냥 그렇게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뇨, 손중길 회장님. 진짜 제가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이십니다.”

“그것도 고맙습니다. 내가 현수 씨 통해서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 1년 반 현수 씨와 함께 근무하는 동안 더 애를 쓰고 제 몸가짐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던 부분도 분명히 있었어요.”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정도로 숨을 내쉰 뒤 정현수가 말했다.

“갑자기 이러시니까, 제가 기분이 많이 이상합니다.”

“뭐가요?”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면 사무실에 과장님이 안 계실 거 아닙니까.”

“현수 씨가 현수 씨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내가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러다 보면 또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안 된다 하더라도 가끔씩 생각이 나면 마음으로라도 응원을 하고… 그런 거죠.”

함께 가게를 나왔다.

처음 만났던 장소까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현수 씨는 차 어디에 댔어요?”

“저는 저 뒤쪽에 공용 주차장에 댔습니다. 과장님은요?”

“난 저기 유료 주차장에 댔어요. 여기에서 인사를 해야겠다.”

난 정현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현수 씨, 우리 악수 한번 합시다.”

어색한 듯, 하지만 정현수는 얼른 들고 있던 위블로 쇼핑백을 반대 손으로 바꿔 들고 내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이 친구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손이었다.

“시간도 어중간한데 같이 식사라도 하고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늘 너무 비싼 선물을 받은 거 같아 저녁이라도 제가….”

난 짧게 고개를 저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 틀림없이 소주 한잔 생각이 날 거고, 그럼 자리가 길어질 겁니다.”

“…….”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오늘은 딱 이 기분으로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둘 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진짜 감사합니다, 과장님.”

“춥다. 이제 갑시다, 각자 갈 길.”

“네, 들어가세요, 먼저.”

난 더는 사양을 하지 않고 먼저 몸을 돌렸다.

외투 주머니 속으로 양손을 찔러 넣고 몇 발이나 떼었을까.

“과장님!”

정현수가 날 불렀다.

난 여전히 주머니 속으로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몸만 살짝 돌려 정현수를 쳐다봤다.

“자주는 아니고, 연말 연초나 명절… 그럴 때 제가 가끔씩 안부 연락을 드려도 됩니까?”

“그냥 하면 되지, 뭘 그런 걸 묻고 있어요?”

그 말에 정현수는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괜히 연락드렸는데 쌩까이지는 않을까 해서요.”

“먼저 생각 나는 사람이 하는 걸로 합시다. 꼭 연말 연초, 명절이 아니더라도요.”

“…“.”

“축하해 줄 일, 축하받을 일, 위로해 줄 일, 위로받을 일이 있을 때도요.”

“진짜죠?”

신이 난 정현수의 모습에 난 얼굴에 미소를 띄워 놓고 고개를 깊게 끄덕여 줬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과장님!”

“그래요, 갑니다.”

“재경식품도!”

“……?”

“우리 모직에서 하셨던 것처럼 다 씹어 먹어 버리십시오! 들려올 활약상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

재경식품 본사 출근 첫날 아침이었다.

-등록 차량이 입차하였습니다.

출근 준비가 거의 다 끝나 갈 즈음이었는데, 처음 들어 보는 안내 방송에 깜짝 놀랐다.

지난 1년 반, 이 집에 살면서 이런 방송을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아, 이게 차량이 들어올 때 집 안에서도 알 수 있게 시스템이 되어 있는 거구나….

혼자 살고, 또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보니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

나보다 일주일 먼저 재경식품 본사로 출근을 했던 강인성.

일부러 그렇게 하게끔 시켰다.

내가 쓸 사무실 준비부터 시작해, 재경식품의 조직을 미리 예습시키는 차원에서.

앞으로 내가 쓰게 될 회사 차량을 타고 강인성이 도착했다.

더 이상 전략기획실 소속의 강인성이 아니다.

재경식품 비서실 소속의 차장이고, 나의 개인 비서다.

앞으로는 나와 출퇴근까지 모두 함께하게 될 것이다.

강인성 이 친구가 얼마나 버텨 줄지, 사실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수행 비서를 교체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기준에서는 너무 먼 옛날이야기이긴 해도 대우의 김 회장은 두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씩 수행 비서를 교체를 했는데,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바꿔 본 적이 두세 번 정도가 전부였다.

대신 열에 아홉이 내가 잡는 스케줄을 버티지 못하고 제 발로 나가떨어졌지.

그래서 기업 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모임 같은 데 나갈 때마다 김 회장은 까탈스러움으로 아랫사람들을 잡고, 손중길이는 무작스러움으로 아랫사람들을 잡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 생각을 해 보면 나보다는 김 회장이 훨씬 더 신식이었지.

나는 될 놈이든 안 될 놈이든 일단 내 수족이 되어 줄 놈이라면 우리가 어디 남이가…였는데, 그런 걸 요즘 사람들은 질색을 하니까.

그런 의미로 내가 요즘 강인성이를 대할 때 신식이 되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준비 다 하셨습니까?”

“갑시다.”

미처 다 보지 못한 신문 한 부를 챙겨 강 차장이 집 앞으로 세워 놓은 차량 뒷좌석에 올랐다.

“거기 앞에 홀더 한번 보시지요, 본부장님.”

“커피예요?”

“샷 하나 추가 맞으시죠?”

“아침엔 조금 약하게 마시는 것도 괜찮아요.”

“내일부터는 기본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강 차장이 준비해 준 커피 한 잔과 신문으로 첫 식품 출근길을 시작했다.

“일정 브리핑 한번 받아 봅시다.”

“오늘은 첫 출근이시라 사장님 면담 외에는 따로 잡혀 있는 일정이 없습니다.”

“몇 시로 잡혀 있는데요?”

“오전 중으로 하겠다는 말만 있었지, 정확한 시간까지는 아직 나온 게 없습니다.”

신문을 다음 장으로 펼쳐 놓고 다시 물었다.

“지난주에 내가 말했던 자료는 다 뽑아 놓으셨어요?”

“바로 보실 수 있게 자리에 올려놨습니다.”

“분위기는 어떻던가요?”

“어디 분위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비서실 분위기요?”

“전반적으로.”

백미러로 날 힐긋거리며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싱긋이 웃는 강 차장이었다.

“지난 일주일만큼 많은 관심의 도마 위에 올랐던 적이 없었습니다.”

“관심의 도마?”

“본부장님에 대한 호기심이 저한테 다 쏠렸던 한 주였습니다. 이제 본부장님이 정식으로 출근을 하시니까, 그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네요.”

그런 뜻이었어?

함께 미소를 지어 보여 준 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장과 면담이 유일한 스케줄이다?

아침부터 하늘이 참 맑다.

사람 하나 잡기 딱 좋은 날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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