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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밌네요, 출근 첫날부터 (154/303)

아주 재밌네요, 출근 첫날부터

“손정태 사장님이 식품 생활을 하실 때 이 방을 쓰셨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 방을 배정한 걸로 전해 들었습니다.”

재경모직의 임원층과는 판이한 느낌이 연출되고 있었다.

임원층에 올라오자마자, 이 조직의 보수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장실과 전무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임원 사무실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재경모직과는 달리, 이곳의 임원층은 전 사무실이 모두 진한 원목 색의 두꺼운 나무 문으로 되어 있었다.

사장실을 중심으로 앞으로 내가 쓰게 될 사무실과 조동희 전무의 사무실의 문이 디귿 자 모양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고성표 본부장 사무실은 어딥니까?”

“복도 반대쪽입니다.”

“같이 한번 가 봅시다.”

“본부장님 사무실은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준비를 잘해 주셨네요. 이만하면 됐죠. 보고 나중에 이 화분들은 다 뺍시다. 이거 다 누가 보낸 거예요? 원래 있던 건 아닐 테고.”

정태 놈이 보낸 화분도 하나 있었다.

강 차장한테 정태 놈이 보낸 화분만 남겨 두고, 나머지 화분들은 빼라고 한 뒤 고성표 본부장이 쓰게 될 사무실로 향했다.

사장실과 전무실, 그리고 내 사무실만 임원층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나머지 임원 사무실들은 모두 임원층 안내 데스크를 지나쳐 반대 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레베이터 복도에서 바로 보이는 사무실.

그곳이 재경식품이 선택한 고성표 본부장, 내가 직접 식품으로 데리고 온 인물이 사용하게 될 사무실이었다.

“이거 너무 화장실 바로 앞 아닌가?”

“…….”

“다른 빈 사무실은 없는 거예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내가 직접 방돔 지사까지 가서 모셔 오는 분인데, 아무리 그런 내용까지 여기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도 이 자리는 좀 너무 의도적인 거 아닌가?”

“설마 일부러 그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그건 놀고 있는 다른 사무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해 보면 알겠지요. 확인해 봐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해 놓고 강 차장이 문을 열었다.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까 사무실 안은 또 그럭저럭 괜찮은 것도 같았다.

건물 전체로 보면 가장 모서리에 있는 사무실이라 창이 기역 자 모양으로 내 사무실보다 창은 훨씬 더 많아 햇빛은 더 잘 들어오는 구조였다.

그런데….

“아직 명패는 준비가 안 된 거예요?”

“아, 그거 제가 그렇지 않아도 지난주에 오자마자 본부장님 사무실 확인하고 그다음으로 확인을 한 내용이었는데요….”

“지난주에 왔을 때 내 사무실에는 명패가 준비되어 있던가요?”

“…네.”

“사람들이 일을 왜 이렇게 하지? 방돔 지사에서 고 본부장이 하고 있는 업무 핸드오버에 시간이 더 안 걸렸음 어쩔 뻔했어요? 확인을 해 보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인포메이션이 정확하게 안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지. 원. 본. 부. 장. 이 다섯 글자에 관한 인포메이션이 안 들어갔다고요? 이거 해당 내용 담당자 누군지 알아보고, 나중에 사장님 면담 끝나면 내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해요.”

“네, 알겠습니다.”

“이건 또 뭐야?”

사무실 안을 쭉 둘러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사무 책상이 또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네?

아무리 사무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안에 든 가구며 사무 집기를 다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사무 책상 한쪽 면에 나무 칠이 다 올라와 있었다.

만약 그게 내 눈에 안 들어왔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상태의 가구를 쓰라고 넣어 놨다는 걸 본 이상 다른 소파, 진열대 등을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신경을 안 쓴 게 아니라, 일부러 이런 방을 고성표 본부장 방으로 배정을 했다고 봐야겠는데?

내 사무실의 가구 상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니에요, 부르지 마세요.”

“뭘….”

“담당자 찾아서 데리고 오지 말라고. 이건 담당자한테 말을 할 내용이 아닌 거 같네.”

바로 옆방이 영업이사실이었다.

그 옆방이 재무이사실이었고.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확인하고, 영업이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하는 행동에 강 차장은 침을 한 번 꿀꺽하고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름은 미리 확인을 했지만, 실제 안면은 전혀 없는 친구였는데 날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른 보고 있던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둬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책상을 돌아 나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재경식품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된 손정훈입니다.”

“아, 네. 본부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길용입니다.”

알고 있다, 박길용.

강 차장이 뽑아 준 임원 정보를 통해 다 외우고 있다.

증명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실물 인상이 훨씬 더 괜찮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네, 그럼요. 들어오세요.”

“제가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주부터 이사님 옆방을 쓰게 될 고성표 이사님 방을 방금 확인해 봤는데 안에 들어가 있는 가구들이 너무 낡았더라고요. 형편 없단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네.”

“혹시 다른 분들 방도 사무실 컨디션이 비슷한가 싶어서요.”

무척 당황을 한 눈치였다.

“제가 사무실 한 번만 봐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영업이사 3년 차시죠?”

“네.”

“사무실은 계속 한 사무실을 쓰셨던 거고.”

“네.”

“혹시 중간에 가구 교체가 있었다거나, 그랬던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이런 걸 물어봐서. 그런데 제가 힘들게 모셔 오는 분 사무실 컨디션을 확인하고 놀라서요.”

“어떻길래….”

직접 고 본부장의 방을 확인하고 들어온 박길용이는 내가 하고 있는 무례를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무실 잘 봤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방 재무이사실 문을 노크했다.

신지선 이사.

여장부라는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다.

4년 차 재무이사.

이 친구 역시 사진으로 확인했던 것과 달리, 눈매가 선했다.

하지만 그 눈매 속 눈빛만큼은 처음 조동희 전무를 봤을 때가 떠오를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덩치는 예상외로 무척 작았지만, 절대 작지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어? 혹시….”

“네, 오늘부터 운영본부장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된 손정훈입니다.”

“어머, 어떡해.”

뭘? 뭘 어떻게 해?

“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난 또 뭐라고.

“제가 잠깐만 좀 안으로 들어가봐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혹시 커피 하셨어요?”

“지금 말고 나중에 제 방에서 같이 한잔하실까요?”

“저야 좋죠. 그런데 어쩐 일로….”

사무실 밖에서 강 차장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데, 눈치상 옆방의 영업이사 박길용이와 이야기 중인 듯했다.

박길용이는 벽에 가려져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난 신지선에게 옆방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이 설명을 해 준 뒤, 양해를 구하고 그녀 사무실의 가구 컨디션을 살펴봤다.

그녀 역시 박길용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성표 본부장이 쓰게 될 방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원래 저 방에 있던 가구들이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원래 진재중 감사팀장이 썼던 방이에요.”

“팀장이 임원층 개인 사무실을 씁니까?”

“모직은 아니에요? 여긴 감사, 법무 쪽 팀장은 임원층에 개인 사무실을 따로 배정을 해 주고 있어요.”

그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내용이니까,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하고.

“이번에 본부장님이 조동희 전무님과 함께 넘어오신단 이야기가 나오고, 파리 지사에 계시는 고성표 이사도 임원 승진으로 함께 온다고 해서 몇몇 사무실 위치가 바뀌었어요.”

“…네.”

“원래 저 방은 진재중 감사팀장 방이었는데, 방을 바꾸면서 쓰던 가구들을 다 옮겨 갔나 보네요.”

“그럼 새 식구가 들어오는데, 가구를 좀 새것으로 준비를 해 줬어야 맞는 거 아니에요? 이게 또 재무 쪽에선 커트를 해야 하는 내용일까요?”

“아뇨, 커트를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런 내용이 올라온 적이 없어요.”

이미 신지선은 내가 불쾌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벌써 인사들을 나누고 있는 거야?”

“전무님!”

조동희 전무의 출근.

신 이사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조 전무 곁에 섰고, 나와 조 전무는 그저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본부장님이 눈치가 빠르시네. 우리 신 대장이 식품의 실세라는 걸 벌써 눈치채셨나 봅니다.”

“언제 적 신 대장이에요, 전무님.”

“내가 방금 신 대장이라고 했어? 입이 말썽이다. 하하.”

조 전무가 신 이사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난 다시 한번 신 이사의 사무실 안을 둘러본 뒤 밖으로 나갔다.

* * *

조 전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내 사무실이었는데, 고 이사의 사무실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더니 얼굴의 모든 근육이 다 일그러지는 조 전무였다.

내가 느꼈던 불쾌함보다 더한 걸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내 앞이라 그런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간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 이사는 다음 주 출근이라 그 전에 따로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요.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나중에 저하고 같이 가서 한번 보시죠.”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나와 조 전무가 고개를 다 돌리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편승일 사장.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던데, 과연 저 인사가 나에 대한 인사인 것인지 아님 조동희 전무에 대한 인사인 것인지 살짝 헷갈리고 있었다.

“출근을 일찍 하셨네요.”

얼굴에 반가운 표정을 걸어 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편 사장을 향해, 조 전무가 함께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커피 했어요?”

하지만 조 전무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이제 해야죠. 두 분은….”

“우린 사장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죠.”

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조 전무가 편 사장을 앞으로 얼마나 잘 구워삶을 수 있을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럼 제 방으로 옮기실까요?”

편 사장의 물음에 조 전무는 날 쳐다봤고, 난 말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까지도 편승일이는 모직 다음으로 내가 식품을 선택한 것이 자기 입장에선 똥인지 된장인지 정확하게 분간을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와 조 전무의 이동을 불편하게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자신이 요령껏 처세를 한다면 자신의 사장 임기 기간 동안은 무난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눈치였다고 할까?

우린 다 같이 사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 자리로 나와 조 전무를 안내한 편승일은 상석 소파 자리 앞으로 서서 직접 손짓을 해 가며 나와 조 전무에게 자신의 양쪽 소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전무님. 앉으세요, 본부장님. 편하게 하세요, 하하.”

내가 고개를 살짝 숙여 어이없는 웃음을 고의로 흘렸더니, 그 웃음을 확인한 조 전무는 편 사장이 정해 준 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으려다 말고 다시 섰다.

그 모습에 편승일 사장은 잠시 고개를 돌려 가며 나와 조 전무를 번갈아 쳐다봤고, 이번엔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웃음을 흘린 후 다시 조 전무를 쳐다보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아, 이쪽으로 앉으시죠, 본부장님.”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발 옆으로 물러나 상석 소파 자리를 내게 양보한 편 사장.

그 순간 고 이사의 사무실을 저따위로 준비해 놓은 게 실수가 아닌 고의였음을 난 속으로 확신했다.

“사장님, 간 보는 거 좋아하시는구나.”

난 편 사장이 양보한 상석 자리로 옮긴 후 말했다.

“네?”

난 대답을 잠시 미뤘고, 조 전무는 내가 상석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내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편 사장이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후, 다리를 꼬아 놓고 대답을 해 줬다.

“지금 저 상대로 간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같은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하….”

난 싱긋이 웃으며 조 전무를 향해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룹 본사 전무 출신인 조 전무님과 제가 출근 첫날부터 사장님이 불러 주실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마냥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였네요?”

그 순간 조 전무는 양 무릎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 깍지를 낀 다음 고개를 숙여 버렸고, 자신의 시선이 숨을 곳을 잃어버린 편 사장은 크게 당황했다.

“아주 재밌네요, 출근 첫날부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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