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걸로는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거겠죠? (155/303)

이런 걸로는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거겠죠?

조동희 전무는 혼란스러웠다.

손정훈.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동안 남 사장과 자신을 상대로 모직에서 보여 줬던 모습은 극도로 절제된 순한 맛이었단 말인가?

손정훈이 보여 주고 있는 강력한 입장에 맞장구를 쳐 주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조 전무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자신이 쪽팔렸던 거다.

이젠 정말 은퇴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순발력은 둘째 치고, 흐름을 읽는 감마저 떨어진 기분이다.

자신은 재경이란 간판 아래, 손홍준 회장님 다음으로 가장 재경 생활을 오래 한 인물이고, 모직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그룹 본사에서 전무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모직을 거쳐, 지금은 손정훈 본부장을 지원하기 위해 식품으로 옮겨 왔지만,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이동은 강등이 아닌 것이기에 당연히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을 조금 전 손정훈 본부장이 했던 것이고, 그 지적이 있기 전까지 조 전무는 상황 자체를 지나치게 너그럽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물며 손정훈 본부장은 회장님의 차남이다.

손정태 사장과 함께 후계자 경합을 시작한 재경가의 차남.

융단을 깔아 놓고 그의 식품 첫 출근을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그가 한 지적처럼 정확한 면담 시간도 정해 놓지 않고 회장 차남의 첫 임원 출근을 맞이했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정작 조 전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내용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웃고 있다.

바로 조금 전 사장실 안의 분위기를 옭아맸다가 터뜨릴 것처럼 굴었던 사람이 지금은 웃고 있다.

이건, 편 사장을 압박할 때 보였던 의도적인 비웃음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저 사람에겐 무척 편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인데,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럴 수 있는 거지?

지난 2년간 모직에서 함께 있었음에도, 손정훈의 내공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 나이에 이 정도 내공이라는 건, 타고나야만 가능한 것.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과연 타고난다고 가능한 것일까?

관록이다.

탤런트가 아닌 관록.

엄청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위엄.

시총 2조 4천억.

총직원 수 6,500명을 넘긴 이 큰 조직의 사장 자리를 3년째 맡아 나가고 있는 인물을 마치 생각이 없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하고 있다.

여기엔 회장님의 차남이라는 배경이 절대적일 수가 없다.

자신이 직접 손정태를 데리고 있으면서 가르쳐 보지 않았나.

도대체 날 왜 이곳으로 함께 오게 만든 것일까?

조 전무는 속으로 궁금증을 키워 나갔다.

편 사장을 이렇게 손쉽게, 그것도 단숨에 제압을 해 버릴 거면서, 도대체 왜 내가 필요하다고, 함께 식품으로 가서 자길 도와 달라고 했던 걸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 전무의 생각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을 때였다.

이미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편승일 사장을 상대로 정훈이가 물었다.

“간 보는 걸 할 줄 아는 사람도 한 명 정도는 있어야죠. 앞으로 더는 저를 상대로 안 그러실 거라고 믿고, 제가 사장님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간신히 입가를 끌어 올려 놓고 편승일 사장이 대답했다.

“네.”

“재경식품 외식사업부. 돈이 됩니까?”

조 전무가 고개를 들었다.

편 사장 역시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듯, 입을 열기 전 조 전무의 표정을 읽었다.

“물론이죠. 재경식품은 가공과 외식사업부로 나뉘는데 외식사업부가 돈이 되냐니요.”

“나뉘는 거야, 나뉘는 거고 진짜 돈이 됩니까?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로열티 이익이 상당히 들쑥날쑥하던데요? 내려갈 때는 바닥이 없는 것처럼, 올라갈 땐 천장만 있는 것처럼.”

“지난 몇 년 동안 매출이 부진했던 이유는 항공과 같습니다. 코로나 타격이 컸죠. 특히 집합 금지가 강화되고, 10시 이후로는 영업을 못 하게 하면서 24시간 영업 업장들부터 낭만포차까지, 10시 이후로 본격적인 매출이 잡히는 매장들의 타격이 엄청 컸습니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고 있는 중이고요.”

“잡히는 매출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본사로 들어오는 로열티 이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영업 이익이요.”

정훈이 물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고 있다는 건 어디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조금 전 말씀하셨던 감자탕 브랜드 해장골을 말하는 겁니까, 아님 낭만포차 브랜드를 말하는 겁니까?”

“…….”

“회복이라는 건 안 좋아졌던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걸 두고 회복이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해장골, 낭만포차는 제가 확인해 본 바로 코로나 기간 동안 가맹점 수가 엄청나게 빠졌던데요? 계약 기간을 다 못 지키고 철수한 업장도 마흔 곳이 넘고. 신규로 론칭한 브랜드 쪽에서 새로 잡히고 있는 매출을 포함해서 회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네, 결국 외식사업부 전체 매출로 잡히는 부분이라….”

“에이. 기존 가맹점에서 올라오는 영업 이익과, 아직 투자비도 다 뽑지 못한 신규 브랜드 가맹점에서 올라오는 업장 매출이 어떻게 같습니까?”

조 전무의 눈에 손정훈 본부장은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였다.

그저 우악을 질러 상대를 압박하는 게 아니다.

편 사장 역시 단순히 손정훈 본부장의 압박 때문에 기가 밀리고 있는 게 아니다.

팩트.

이 팩트를 중간에 둔 시소가 손정훈 본부장 쪽의 무게를 더 크게 잡아 주고 있는 까닭이다.

“가공 부문에 비해서 외식사업 부문은 들어가는 품에 비해 거둬들이는 수확량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보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그 많은 가맹점을 두고 있는 외식사업부를 지금 당장 줄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돈가스 대표 메뉴가 뭡니까?”

편 사장은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설마 모르세요?”

“그게….”

“그럼 하나 정식 세트는 가격이 얼마입니까?”

“…….”

이건 압박이 아니다.

이건 압살이다.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조 전무 본인이 이렇게 질식을 할 듯 숨이 차오르는데, 편 사장은 어떨까.

하지만 편 사장 쪽으로 그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해신설농탕 수육 소자는 가격이 어떻게 됩니까?”

“…….”

“와, 심한데?”

다시 한번 손정훈 본부장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흐르는 순간이었다.

“시골통닭 기본 후라이드 한 마리 가격은요?”

“…….”

“하하, 하하하하… 아니, 잠깐만. 혹시 기분 나쁘셔서 일부러 대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진짜 우리 회사 메뉴 가격을 그것도 사장님이 몰라서 대답을 못 하시는 거네요? 제가 일부러 잘 안 나가는 메뉴 가격을 물어본 것도 아니고, 매장 별로 많이 나가는 메뉴 중 하나씩을 물어본 건데 우리 인간적으로 하나도 대답을 못 하신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

“아이고, 두야. 실은 제가 메뉴 가격을 알고 계신지, 아닌지 그걸 확인하겠다고 물었던 게 아니에요. 그건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았어요. 그 가격을 놓고 단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물었던 거라고요. 그런데 단가까지 가기도 전에 기본 메뉴 가격에서부터 막혀 버리면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사장님.”

“…….”

“사장님?”

“…네.”

“우리 지금 외식 사업 이거 왜 하는 겁니까? 그 많은 브랜드, 그 많은 가맹점에서 올라오고 있는 영업 이익이 재경항공만을 상대로 하는 기내식 납품 영업 이익보다 낮게 잡히고 있잖아요. 가공 부문 전체도 아닌 그냥 기내식 납품으로 올리는 영업 이익보다 낮게 잡히고 있다는 건 알고 계세요?”

“…네.”

“내가 사장님이라면, 아니 사장님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어느 정도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부문장급 임원이라면 품만 많이 들어가는 외식사업부에 쏟을 집중력으로 다른 항공사를 하나 정도 더 뚫어서 기내식 납품으로 영업 이익을 확대시켜 보자거나, 아님 다른 가공 쪽 장르를 넓혀 보자는 등… 그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심각한데?”

손정훈 본부장은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강인성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본부장님.

“저 지금 사장실인데, 뽑아 놓은 자료 있잖아요.”

-네.

“그거 좀 갖다주세요.”

침묵이 흘렀다.

흐르는 침묵 속에서 편승일 사장은 생각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흘러가게 된 거지?

그리고 저 압박감은 또 무엇이고.

조동희 전무의 비위만 적당히 잘 맞추면 되는 거 아니었나?

결국은 조 전무가 앞으로 나올 게 아니었나?

물론 손정훈 본부장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었다.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여기저기에서 들었기에 직접 만나 보고 성향을 파악해 본 뒤 제대로 대비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타협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관계를 풀어 갈 상대가 아니다.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 가야 할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편 사장은 직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강인성 차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심각한 사장실 안의 분위기에 내색은 못 했지만, 이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배치에 강인성 차장은 속으로 놀랐다.

손정훈 본부장이 상석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편승일 사장은 그런 손정훈 본부장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여기….”

평상시의 본부장이 아니었다.

자료를 건네받으면서도 가볍게나마 고맙다는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강 차장이 나간 후 “후….” 하고 숨을 길게 뽑아낸 뒤 손 본부장이 물었다.

“사장님.”

“네.”

“당연히… 하, 이걸 내가 당연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참 말이 안 되는 건데… 어쨌든 당연히 식품에서 외식사업 부문은 가공 부문에 비해 순이익 기여도가 크게 떨어지다 보니까, 가공 쪽으로 더 많은 집중과 관심을 쏟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제가 이해를 할게요.”

“…….”

“그런데 사장님. 우리 재경식품의 요식 브랜드 중에 개인적으로 자주 이용하는 식당은 있습니까?”

강 차장이 가져온 자료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 손 본부장의 얼굴에선 더 이상 화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가 가라앉은 게 아니라, 화를 유지할 가치를 못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저는 지난 1년 반 동안이요, 저녁에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주로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우리 식품이 가지고 있는 요식 브랜드에서도 시켜 먹어 보고, 경쟁사 브랜드에서도 시켜 먹어 보고, 우리한테 없는 메뉴도 시켜 먹어 보고. 식품으로 오기 전, 모직에 있을 때부터요.”

테이블 위로 올려놓은 자료를 만지작거린 후, 결국 그걸 편승일 사장 앞으로 밀어 놓고 말을 이었다.

“가끔은 혼자 우리 브랜드 매장에 찾아가서 혼밥을 하기도 했습니다. 뜨거운 탕 종류는 아무래도 배달보다는 직접 매장에 가서 먹어야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느껴 볼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해 보니까, 제 눈에는 그런 게 보이더군요. 이런 요식 사업은 우리 재경식품 같은 대기업이 할 만한 분야는 아니겠다… 하는 게요. 만들 수 있는 돈에 비해 재경이라는 그룹 브랜드 이미지에 긍정적인 효과는 없는 거 같아요. 결국, 기업은 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돈은 기업의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여기 관련된 이야기는 오늘 이 자리에선 더 이상 안 할게요. 대신 이거 한번 보세요. 우리 재경식품의 요식 브랜드 매장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편 사장은 자료를 자기 앞으로 더 당겨 와 두 손으로 무릎에 올렸다.

“같이 고 이사 방에 가 보시겠습니까?”

“고성표 본부장이요?”

“네.”

“고성표 본부장은 다음 주부터 출근 아닙니까?”

“제가 언제 고성표 이사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까? 그 방에 같이 가 보자고요.”

손 본부장이 먼저 사장실을 나섰고, 그 뒤로 조 전무와 편 사장이 따랐다.

고성표 본부장실 앞.

대기를 하고 있던 강인성 차장이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열린 그 사무실 바깥에서 손 본부장이 물었다.

“빈 사무실이 여기 이 방 말고는 없습니까? 제가 귀하게 모시기로 한 분입니다. 그런 분한테 화장실 바로 앞에 있는 사무실을 쓰게 할 자신이 없네요, 저는.”

재빨리 편 사장이 데스크 쪽을 향해 손짓을 했고, 해당 담당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방 말고 다른 빈 사무실은 없어?”

“있습니다.”

“어디?”

“서정옥 이사님이 쓰셨던 방이랑, 그 맞은편 추재영 이사님이 쓰셨던 방이 아직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방으로 배정을 했어?”

손정훈이 재빨리 막았다.

“있으면 됐습니다. 안으로 같이 한번 들어가 보시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들, 가구의 흠집, 낡은 구석들을 볼 때마다 편승일 사장은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조 전무까지 잠시 밖으로 나가 있게 만든 손 본부장.

그는 편 사장과 함께 있는 그 사무실 문을 조심히 닫았다.

“사장님.”

“네.”

“저 간 보지 마세요. 저 그거 딱 질색입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분해진 음성이었다.

“저 같은 사람은 2년 만에 혹은 그 전에도 얼마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개인 사무실을 쓸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직장에 모든 젊음을 다 바쳐 충성해 겨우겨우 자기 개인 사무실을 쓰게 되는 거죠. 그것도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얼마나 회사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

“이런 걸로는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거겠죠? 이런 건 잔인하다고 표현을 해야 맞는 걸 겁니다. 그리고 한심한 거죠. 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중간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결국은 미리 사람을 시켜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제 책임이고요.”

“하, 바로 조금 전에 저 간 보지 마시라니까… 참 신기하죠. 이런 장난을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희한할 정도로 하나같이 다 똑같습니다. 인정할 기회를 줘도 그 기회를 변명으로 날려 버립니다.”

“……!”

“기회를 드렸는데, 그 기회를 조금 전 사장님이 사장님 손으로 직접 날리셨단 말을 하는 중입니다. 진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기회 한 번 더 드립니까?”

“…….”

“이런 걸로는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거겠죠?”

꿀꺽.

편 사장의 침 삼키는 소리가 사무실을 떠다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손정태 사장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내는 겁니다. 지금 제가 드린 기회, 소중히 지키셔야 할 겁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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