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람인 줄 뻔히 다 알면서?
오후 3시.
강 차장과 앞으로의 일정을 맞춰 보고 있었다.
“라면 생산 라인하고 커피 생산 라인, 그리고 음료 생산 라인 모두 고 본부장 넘어오면 한 번에 다 같이 둘러볼 수 있게 일정을 한번 잡아 봐요.”
“다음 주 안에 다 소화하실 계획이십니까?”
“길게 끌 거 뭐 있어요. 나는 생산 라인 환경만 확인하면 되는 건데. 나보다는 고 본부장한테 더 필요한 내용일 거예요. 그래서 같이 방문을 해 보려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 준비해 주면 좋을 거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 본부장님 지낼 곳은 내가 따로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죠?”
“네. 우선 호메르스 레지던스로 이주일 예약해 놨고요, 그 안에 리모델링 공사 다 끝날 거 같습니다. 추가 내용은 고 본부장님 한국 들어오신 후에 제가 계속해서 여쭤보고 지내시기에 불편함 없이 준비를 해 드리는 걸로 하면 될 거 같습니다.”
“각별히 신경을 써 주세요. 우리 쪽 스케줄에 맞춘다고 가족들만 파리에 두고 급하게 먼저 넘어오시는 거잖아요.”
“네,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케어를 하겠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는데, 발신자 번호를 확인도 하기 전에 묘한 기시감 같은 게 들었다.
그냥 느낌상 정태 놈 전화일 거 같았다.
사실 내가 먼저 전화를 한 통 해 보려고 했었거든.
녀석이 그래도 동생이 첫 출근을 했다고 사무실에 미리 화분까지 보내 놓을 정도로 관심을 보여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 줘야 할 거 같기도 했다.
강 차장에게 통화 후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자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식품으로 첫 출근 소감이 어때? 모직이랑은 많이 다르지?
“안 그래도 내가 전화를 하려고 했었어. 화분 이건 또 뭐야?”
―네 형수가 골랐다. 돈은 내 폰에서 빠져나갔지만. 나중에 시간 되면 네 형수한테 화분 잘 받았다고 톡이라도 하나 보내 줘.
“고마워. 다른 화분은 다 뺐는데, 이 화분만 남겨 놨어. 잘 한번 키워 볼게.”
―그거까지 뺀 거 아냐?
“그럼 언제 한번 와. 와서 보면 되지.”
―마치고 오랜만에 둘이 한잔할까?
“오늘?”
―혹시 하늘이하고 따로 약속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럴 거 같더라, 생각 없는 놈. 아무리 당연한 거라도, 인마. 어쨌거나 임원 승진을 했는데 조용하게나마 축하 파티는 해야지. 하늘이하고는 내일쯤이나 다른 날 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형이랑 같이 한잔하자. 할 말도 조금 있고.
지금 내 입장에선 정태 이놈이 가장 엑스맨이다.
태산이, 홍준이 놈, 장혜란이, 정엽이, 하늘이, 남 사장….
다들 어느 쪽으로 튀고 싶어 하는지 그 방향이 내 눈에는 보인다.
그런데 유독 정태 이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잘 안 보인다.
틀림없이 편 사장에게 뭔가 보고받은 내용이 있겠지.
그런데 이놈이 조금이라도 똑똑한 놈이라면, 그런 보고를 받았다고 바로 이렇게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할 수는 없는 거거든.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정태 이놈은 멍청한 놈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에 오프라인 유통판을 스너프가 흡수해 간 다음, 그 빠른 시일 안에 스크린 골프장 사업을 거기에 접목시켜 보겠다는 기획을 촘촘하게 만들어 낸 것만 봐도 사업 센스는 제 애비보다 한 수 위다.
그런 놈이 고작 기간제 사장 하나 때문에 성급하게 움직일 리가 없다.
“술? 좋지.”
“그럼 내가 주소 하나 찍어 줄게. 마치고 거기에서 보자.”
“술 종목이 뭔데?”
“괜찮게 하는 일식당이 한 군데 있어. 속닥하게 이야기 나누기에 분위기도 괜찮고.”
통화를 끝내고 강 차장의 표정을 살펴봤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식겁을 했다.
“오늘은 퇴근이 늦어지겠어요?”
“손 사장님 전화입니까?”
“같이 술을 한잔하자네요.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을 거예요.”
“자주 있어도 괜찮습니다.”
* * *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를 내고 있는 일식 전문점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나와 강인성 차장을 맞이하는 직원의 수준만 봐도 사장이 직접 주방을 보거나, 아님 이런 요식업에 경험이 많은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약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정태라는 이름을 강 차장이 꺼내려고 할 때였는데, 안에서 낯이 익은 남자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본부장님.”
정태의 수행 비서 일을 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앞으로 나서자, 종업원은 요령껏 뒤로 빠졌고 그 친구가 직접 나와 강 차장을 안내했다.
“식사는요?”
정태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가는 동안 강 차장을 부탁도 할 겸 물어봤다.
“시켜 놨습니다. 식사하시는 동안 홀에서 할 생각입니다.”
“그럼 두 분이서 같이하면 되겠네.”
“네, 그렇게 하죠. 괜찮으시겠죠?”
상대의 물음에 강 차장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네.”
방 앞에 도착을 했다.
정태 놈의 구두 한 짝이 바로 신을 수 있도록 아주 반듯하게 놓여져 있었다.
마치 자를 대고 그은 듯, 눈에 보이지 않는 선에 다른 방 손님들의 신발들도 각 방의 앞으로 반듯이 놓여져 있었다.
“식사들 하고 계세요.”
두 사람을 보낸 뒤 한 계단 올라 방문을 열었다.
벽을 제외한 삼면이 창호지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바닥은 좌식을 해야 하는 다다미였고.
미리 기본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정태는 혼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왔어?”
“일찍 왔네? 내가 먼저 도착할 줄 알았더니.”
“차가 막힐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은 또 희한하게 뚫려요.”
여전히 스마트폰에 집중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한 정태는, 이내 볼 걸 다 봤다는 듯 폰을 테이블 위로 덮어서 내려놓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정태 놈 자리는 세팅이 하나만 되어 있는데, 내가 앉을 자리엔 옆으로 한 사람분의 세팅이 더 되어 있었다.
“혼자 왔어?”
“누구랑 같이 왔어야 되는 거야?”
“아니, 강 차장이라고 했나? 같이 안 왔어?”
“아, 여기 자리 끝나는 동안 홀에서 식사하고 있으라고 했어.”
“너도 참 너다. 앞으로는 한 몸처럼 같이 지낼 사람인데, 내가 괜히 이런 자리 만들었겠어? 잠시 들어와 보라고 해.”
어쭈?
이제 다 컸다 이건가?
제법 어른 흉내를 낼 줄 알아.
하는 짓이 귀여워서 전화로 강 차장을 잠시 안으로 불렀다.
문이 열렸고, 문밖에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는 강 차장을 향해 정태는 허물없이 손짓을 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쪽으로 앉아요.”
“밖에서….”
“식사는 밖에서 하더라도, 나랑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요.”
“저는 운전을 해야 해서….”
머뭇거리는 강 차장에게 내가 웃으며 말했다.
“받아요. 설마 사케 한 잔에 취할까. 상황 봐서 대리 기사 부르면 되니까, 한 잔 받아요.”
강 차장은 못 이긴 척 볼이 넓은 사케 잔을 두 손으로 들었다.
그 안으로 술을 적당히 채워 줘 놓고, 정태가 말했다.
“앞으로 강 차장님이 옆에서 우리 정훈이 잘 좀 챙겨 줘요.”
“네.”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아직은 혼자라 이것저것 옆에서 신경 써 줘야 할 게 많을 거예요. 더군다나 요즘 하는 일이 많아서 바쁘잖아요. 자, 나랑 한잔합시다.”
고개를 돌려 술잔을 비우는 강 차장의 모습을 웃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가, 잔을 말끔히 다 비운 걸 확인하고는 자기 잔도 시원하게 비워 버렸다.
“안주도 좀 먹고 해요. 여기 이거. 이 집은 우니 이게 참 괜찮아요. 냉동이 아니야. 간도 딱 좋고.”
직접 젓가락으로 우니 한 점을 조심히 집어 강 차장 앞접시 위로 덜어 준 뒤, 그 위로 무순까지 올려 주는 정태였다.
강 차장이 그걸 손으로 가려 가며 입으로 넣는 동안 정태는 테이블 위로 흰 봉투 하나를 올려놓았다.
제법 두께감이 느껴지는 봉투였다.
“한 잔 더 하시죠?”
“아닙니다, 사장님. 괜찮습니다.”
“내가 술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쉽기는 해도 더는 못 권하겠네. 이거 강 차장님 드리려고 좀 챙겨 왔어요.”
강 차장은 그걸 받지도 못하고 거절도 못 하는 상태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정태는 그런 강 차장의 손에 거의 반강제로 그 봉투를 쥐여 주었다.
뭐가 들었을까, 저 안에.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들, 가끔씩 따로 용돈을 챙겨 주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긴 해도 강 차장에게 설마 용돈을 챙겨 주는 건 아닐 테고….
별거 아니라는 듯 정태가 내게 말했다.
“이번에 오프라인 유통판 이름을 싹 다 스너프로 바꿨잖아. 그거 바꾸면서 백화점 상품권도 디자인을 다 새로 했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서 긴장을 하고 있는 강 차장을 상대로 정태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돈 아니에요. 상품권. 그냥 받아도 돼.”
“…….”
“상품권 안에 TMG 번호가 들어있어요. 스너프 가입돼 있죠? 백화점, 아웃렛에서도 쓸 수 있고, 스너프 앱에 TMG 번호 넣으면 앱 쇼핑도 할 수 있게끔 그렇게 만든 거예요.”
어쩔 줄 몰라 하는 강 차장에게 “좋은 걸로 정장 한 벌 새로 맞추면 되겠네.”라며, 받아도 되는 거라고 눈치를 줬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전략기획실 출신이라 그런가? 편한 자리에서까지 너무 딱딱하시다. 그래요, 근데 진짜 한 잔 더 안 하실래요? 강 차장님도 같이 드실 거라고 음식을 일부러 좀 많이 시켰는데.”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두 분이서 편하게 시간 가지십시오.”
강 차장이 나가고 난 뒤, 내 잔을 채워 주며 정태가 말했다.
“사람 괜찮다. 눈치도 있고, 입도 무거워 뵈고.”
뭐 얼마나 봤다고, 꼴랑 술잔 한 번 나눠 놓고 사람이 괜찮다, 안 괜찮다 판단이냐, 이놈아.
물론 강 차장이 괜찮은 친구인 건 맞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이런 자리를 가지며 옆에 사람 칭찬을 해 줄 땐, 그 템포를 한 박자 정도 늦춰야 한다.
안 그럼 속이 보여.
난 정태가 들고 있는 잔을 건네받아 손주 놈의 잔을 채워 줬다.
이것도 참 재밌네.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
정엽이 놈까지 함께, 홍준이 놈, 남 사장 다 불러다 다 같이 이렇게 한잔할 수 있는 날.
강 차장에 해 줬던 것처럼 성게알을 내 앞접시 위로 덜어 줘 놓고, 무순을 올려 준 뒤 손짓을 하는 정태였다.
“한번 먹어 봐. 먹을 만할 거야.”
확실히 괜찮네.
지난 1년 반 동안 내가 경험해 본 식당 중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곳이다.
“괜찮지?”
“맛있네. 같이 먹어. 왜 안 먹어?”
“그… 아까 같이 한잔하자고 전화 걸기 전에, 편 사장한테 전화를 받았어.”
그랬겠지.
그런데 그걸 또 왜 나한테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야.”
“뭐가?”
“네가 편 사장한테 그런 말을 했다며?”
“무슨 말?”
“편 사장이 내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내는 거다… 뭐 그런 말?”
어디 보자….
기회가 좋네.
그래, 이참에 우리 손주 놈 그릇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확인을 좀 해 보자.
“진짜 그런 말을 편 사장한테 했어?”
“했지. 했어.”
“첫날부터 너무 세게 나간 거 아냐? 그것도 내 사람인 줄 뻔히 다 알면서?”
“내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기회를 한 번 더 줬다는 이야기는 안 했던 모양이네.”
“그런 말도 했어?”
“했는데, 분명 알아듣기 쉽게 해 준다고 해 줬는데, 그 말이 어려웠나? 그 기회를 잡지를 못하네, 그 사람이.”
“내 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위치에 맞는 일이 뭔지를 몰라. 자리만큼의 실력은 없으니 그런 거겠지?”
코로 숨을 내쉰 뒤 사케 잔을 든 정태.
녀석은 입술에 사케 잔을 붙여 놓고 날 쳐다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