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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도 하기 싫네 (157/303)

상상도 하기 싫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사람만큼 어려운 대상이 어디에 있겠나.

이런 걸로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정태 놈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다.

같이 있을 땐 편 사장이 정태 마음에 들도록 일을 썩 잘 해냈겠지.

그런데 아직 정태 놈이 스너프에서 식품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정도의 경험은 없는 것일 테고.

그래도 얼마나 기특한가.

자길 위해, 직장 목숨 줄을 걸고 경쟁자를 대신 견제해 줄 사람을 두고 있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정태 녀석의 나이와 경험에 그런 일들을 벌써부터 해낸다는 건.

이걸 어떻게 내가 안 좋게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사람을 만든다는 거, 그 사람을 심는다는 거, 그리고 그렇게 심은 사람들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인다는 거.

결국은 그게 경영이고, 조직 관리인 것을.

그렇게 놓고 보면, 정태 놈이 홍명이 놈이나 제 애비 홍준이 놈보다 나은 것도 같다.

아닌가?

홍명이, 홍준이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재경의 모든 인물이 나의 사람이었기에 그럴 엄두를 애초에 내질 못했던 걸 수도.

생각이 많아진다.

그와 동시에 어쨌거나 정태 이놈이 최소한 사람을 다루는 자질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타고난 거 같아 웃음이 나오고.

술잔을 비워 놓고 정태가 말했다.

“나나 고모부, 우리 재경가를 제외하고 사장 승진을 가장 빨리한 사람이 편 사장인 건 알아?”

“그렇다고 하는 거 같더라. 서울대 출신이더니만. 머리가 좋은 모양이야. 그 좋은 머리, 좀 회사에 도움이 되는 데 쓰든가 안 하고….”

“그런 사람을 하루 경험해 보고 자리만큼의 실력이 없는 거 같다고 평가를 하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냐?”

“하루까지도 필요 없었어. 30분. 아니, 그냥 보자마자 바로 알겠더라.”

“뭘?”

“이 사람은 성과가 아닌, 실력, 능력이 아닌 줄로 살아남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구나… 하는걸.”

“줄을 잘 잡는 것도 능력이야.”

“줄만 잡는다고 되나. 그걸 잡고 올라갈 줄 알아야지. 아님 요령껏 버티기라도 하든지. 맞는 줄을 잡고도 올라갈 힘, 버티는 힘이 없으면 결국 떨어지는 거야. 바닥엔 맞는 줄을 잡았든, 틀린 줄을 잡았든 결국 다 똑같이 떨어진 사람들 뿐이고.”

“외식사업부를 정리하자고 했다며?”

녀석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정태 놈이 식품 쪽에 애정이 많다.

특히 외식사업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가능성이 없는 분야 같은데, 정태 놈의 눈엔 뭔가 보였던 게 있겠지.

결국은 잘못 본 거였겠지만.

“내가 외식사업부를 정리하자고 했다는 식으로 말을 했나 보네.”

“아니야?”

“다행이다.”

“뭐가?”

“그런 엉뚱한 소리에 나한테 직접 확인도 안 해 보고 혼자 오해를 하는 게 아니라서.”

“아니야?”

“결국은 그 말이 그 말인데, 그래도 내가 한 말의 뉘앙스는 그런 게 아니었지.”

“그럼?”

정태 놈 역시 내가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내 잔을 채워 주었다.

“우리 외식사업부 매장들의 메뉴 가격을 하나도 모르더라.”

“…누가? 편 사장이?”

“하나돈가스 대표 메뉴가 뭔지, 해신설농탕 수육 가격, 심지어 시골통닭 기본 프라이드 한 마리 가격이 얼마인지도 몰라.”

“…….”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우리 브랜드 매장에 한 번씩 가 보기는 하냐고. 가서 먹어 보기는 하냐고. 대답을 못 해. 그래서 그랬지? 사장도 직접 가서 안 먹는 우리 브랜드, 지금 우리가 외식 사업을 도대체 왜 하는 거냐고. 그런데 설마 그게 끝이었어?”

정태 녀석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뭐가 더 있어?”

“재밌는 사람이네, 편 사장.”

“왜?”

“내가 분명히 검토를 한번 해 보라고 어렵게 정리를 한 자료까지 다 주고 왔는데, 내가 왜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한 건지 제대로 파악도 안 해 보고 형한테 전화를 걸어서 그런 소릴 했나 보네.”

“자료? 무슨 자료?”

“그걸 봤으면, 글쎄… 내 상식에선 전화로 그런 소릴 할 수가 없었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무슨 자료?”

이해를 시켜 주고 싶었다.

사람이 사업을 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아닌 길에 이상하게 꽂혀서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순간.

정태에게 재경식품 외식사업부가 그런 것일 수도 있지.

홍준이 놈이 그룹 본사로 불러들일 때에도 식품 쪽에서 자신이 뜻한 바가 있어 2년 정도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고 하지 않나.

“사람이 가장 힘들 때가 언제라고 생각해?”

“왜 갑자기 주제를 바꿔?”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내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도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할 때. 그런데 여기에서 더 불행한 건 내게 힘이 있을 때야. 힘이 없을 땐 그냥 혼자 미련을 못 버리고 끝까지 집중을 하다가 포기를 하면 되지만, 힘이 있어서 그 미련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를 할 수 있게 되면, 여러 사람이 함께 피곤해지는 거거든.”

“그게 외식 사업이다?”

“뭐가 목적인데? 돈이야, 아님 재경의 가치야?”

“…….”

“둘 다 못 건지는 사업이야, 외식 사업은. 우리가 가진 브랜드로 해외 수출이 가능해? 안 돼, 힘들어. 왜? 우리에겐 외식 사업만 있는 게 아니거든. 우리 재경에는 똑같은 에너지를 쏟았을 때 더 많은 걸 건져 올릴 수 있는 사업들이 분명 있어. 항공, 스너프. 그리고 모직. 다 수출이 외식 브랜드보다는 수월한 것들이잖아. 우리 외식 사업을 수출하는 건 백종원 같은 애들, 작게 그 분야에만 올인하고 있는 애들이 하게 양보를 해 주자. 걔네들은 그게 전부잖아. 거기에 미쳐 있는 애들이고.”

“…….”

“그런데 우리한테 백종원 같은 사람이 있어? 완전히 그쪽으로 미쳐 가지고, 어떻게든 그걸로 큰 성공을 만들어 내겠다… 하는 사람이 있냐고. 없잖아. 형이 진짜 그쪽으로 진심이라서 나는 이 길만 판다… 하면 또 모르겠어.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지? 그냥 돈으로 괜찮은 아이템 시장에 나오면 사들여서 프랜차이즈화시켜서 가맹점 수 확장하고, 유행 끝나면 사그라지는… 지금 재경식품의 외식사업부가 딱 그렇잖아.”

왜일까.

정태의 얼굴에 웃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의미가 있는 웃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미소였다.

“그래도 외식사업부는 유지가 되어야 해. 가맹점이 몇 갠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애? 말이 안 돼. 아버지도 크게 화를 내실 거고.”

“방법을 찾았어. 그리고 그 방법을 편 사장한테 줬고. 그런데 그걸 안 본 모양이야. 내용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그랬으니 그런 전화를 한 거겠지.”

“그래도 출근 첫날부터 마지막 기회니, 그 기회를 소중히 지켜야 할 거라느니… 그런 말을 한 건 좀 심했어.”

“내가 필요해서 데리고 오겠다는 사람 방을 화장실 앞으로 준비해 놨더라.”

“뭐?”

“모르는 내용이야?”

이건 내가 진짜로 궁금한 부분이다.

정태 놈이 일부러 그렇게 텃세를 부리라고 시킨 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너 지금 그거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모르는 내용이냐니?”

조금 전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님 됐어.”

“너만 됐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묻잖아.”

“설마 편 사장이 날 상대로 싸우자고 들었을까 싶었거든.”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시킨 거다?”

“다른 빈 방이 없는 것도 아니었어. 다른 빈 방이 두 개나 더 있었어. 이걸 편 사장이 모르고 한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거잖아. 내 방, 그리고 조 전무 방은 딱 자기 사장실을 중심으로 양옆에 있게 만들어 놓고, 내가 데리고 오는 사람 방만 따로 신경을 안 썼다? 내 상식에선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거든.”

그리고 미소가 있었던 자리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안에 채워 놓은 가구는 가관이었어. 칠이 다 올라와 있는 책상, 가죽이 헐어 있는 소파. 누가 하는 말이 원래 그 방에 있던 가구들이 아니었대. 내가 확인했어. 편 사장한테 직접. 결국 인정을 하더라. 그래서 마지막 기회를 준 거야. 이 정도면 젠틀하게 참은 거 아냐? 편 사장이 형 사람이듯, 그 방은 내 사람이 쓸 건데 내 사람을 그렇게 대하겠다는 걸 다 보고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줬어야 했나?”

바로 그 순간.

정태는 손을 뒤로 뻗어 닫혀 있던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러자 옆방에 홀로 앉아 있던 편 사장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사색이 되어 있었다.

올라오는 화를 참아 내며, 자기 등 뒤로 불안하게 앉아 있는 편 사장은 쳐다도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며 정태가 말했다.

“방금 손정훈 본부장이 한 말이 사실이에요?”

“저기, 사장님 그게….”

편 사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엔 찻주전자와 컵 하나가 전부였다.

“맞다, 아니다. 그렇게만 대답하면 됩니다. 금방 손정훈 본부장이 한 말이 모두 사실입니까?”

“죄송합니다.”

직접 자기 잔을 채워 놓고 피식하고 웃으며 그 잔을 비워 버린 정태였다.

이놈 봐라?

저 문을 열었다고?

재밌어지네?

그래, 한번 보자.

이걸 어떻게 교통정리를 하는지, 이 할애비가 보고 평가를 해 주마.

차갑게 식어 버린 얼굴로 잔을 입술에 붙여 놓고 정태가 말했다.

“전혀 그렇게 안 봤는데, 편 사장님이 이상한 구석이 있으신 분이었네? 왜 시키는 일은 똑바로 못 하면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지?”

“…….”

“그리고 아까 낮에 전화로 편 사장님한테 들었던 내용이랑 지금 손 본부장 통해 확인한 내용은 왜 이렇게 다른 거예요?”

“…….”

“대답을 좀, X발… 대답을 좀 빨리빨리 하세요. 사람이 뭘 물어보면.”

“죄송합니다.”

“거기 그렇게 있지 말고, 문까지 열었는데 그냥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내가 당신 얼굴 보겠다고 고개까지 돌려야 돼?”

그동안 난 요리 몇 점을 집어 먹었다.

이런 건 뭘 좀 먹으면서 봐야지.

편 사장이 내 옆으로 앉을 수 있도록 벽 쪽으로 살짝 당겨 앉아 주기까지 했다.

“편 사장님.”

“네.”

“나를 아주 그냥 홍어 X으로 보셨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닌데, 왜 X발 네가 X신 짓 하다가 털려 놓고 억울하다는 듯이 전화를 주셨어요? 이래 버리면 조 전무님하고 골프 치면서 나눴다는 이야기도 내가 다 다시 걸러서 들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지. 걸러 듣지도 못하겠는데?”

이놈 이게 다 좋은데,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구나.

“그리고, 내가 설마 내 동생 일인데, 네 말만 듣고 이 새끼가 왜 그랬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사장님.”

“내가 지금 네 의도를 물었어요? 내가 네 의도를 알아야 하나? 궁금해해야 하는 거예요?”

“…….”

“X발 진짜 X나 어이없네? 그동안 내가 너 같은 인간한테 왜 잘해 줬을까요? 내가 바보네. 상X신이었어. 내가 요즘 손정훈 본부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요. 왜? 나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에서 계속 나랑 내 동생을 경쟁을 붙이려고 해. 재밌나 봐. 그런데 나는!”

갑작스러운 녀석의 고함에 편 사장은 크게 움찔했다.

“X발, 나는 그게 X나 짜증이 난다고. 내 동생이라고,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 내가 손정훈 본부장 식품에 넘어가서 어떻게 하는지 잘 지켜보라고 했지, 거기에 스토리텔링을 붙이라고 했어요? 왜 그런 X신 같은 스토리텔링을 붙여서, 사람을 쪽팔리게 만들지? 화장실 앞에 있는 방을 줬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뭘 한 거예요?”

“그게….”

“이렇게 유치한 사람이었나.”

“…….”

“이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너무 수준 떨어지는 짓이라 상상도 하기 싫네. 사장님.”

“…네.”

“일어나세요. 지금 이 순간부로 내 눈에 안 보이는 데로 좀 사라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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