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으로 붙어
정태 이놈 이거 성깔이 보통이 아니구나.
보통 성깔이 아니야.
차분하게 모아 놓았다가, 한 번에 크게 욱하는 게 영락없이 지 애비 젊었을 때다.
편 사장이 쫓겨나듯 방을 나간 뒤, 정태는 테이블 위로 두 팔을 넓게 펼쳐 손을 올려놓고 화를 삭히는 모습을 내게 보였다.
녀석의 흥분이 진정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난 요리들을 하나씩, 앞접시 위로 올려서 차례대로 맛을 봤다.
“너 혹시 알고 있었어?”
아마 옆방에 편 사장이 있다는 걸 미리부터 알고 있었는지를 물어보는 거겠지?
일부러 이해를 못 한 척 대답했다.
“뭘?”
“옆방에 편 사장 있는 거. 안 놀라더라?”
“어, 알고 있었어.”
돌멍게도 장을 이렇게 만들어 올려놓으니까 전혀 색다른 맛이 나네.
그 맛을 음미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정태 놈이 피식거렸다.
“어떻게?”
“구두. 옆방에도 문 앞에 구두가 한 켤레밖에 없더라고. 자세히 봤더니 눈에 익은 거야.”
“편 사장이 오늘 신은 구두를 기억해?”
“구두 상태를 보면 그 사람의 일하는 스타일을 알 수가 있거든. 성격이 급하지? 성급할 순 있겠지만, 대신 추진력은 있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조용했잖아.”
난 내 등 뒤로 난 미닫이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옆방에선 약하게나마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데, 그쪽 뒷방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났어. 마치 일부러 인기척을 숨기는 거처럼.”
“내가 저 문 안 열었음 어쩔 뻔했어?”
“난 내심 그 문을 안 열기를 바랐어.”
“뭐? 왜?”
“그럼 난 저 방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척, 지금부터는 편 사장 칭찬을 좀 해 볼 생각이었거든.”
“…뭐?”
“너무 편 사장이 듣기에 민망할 말들만 했잖아.”
사케 한 잔을 입에 머금고 그 사케로 잠시 입 안을 헹궜다.
그러는 동안 정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날 쳐다봤다.
“편 사장. 방향 감각이 없다뿐이지,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되는 걸 보고 누가 방향만 제대로 잡아 주면 자기 밥값은 해내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좋게 보면 미련한 거지만, 좋게 보면 의리가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내가 낮에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경고를 했는데, 내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강심장은 아닌 거 같고…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의리가 있어 보여.”
“…….”
“지적하고, 문제를 삼을 건 문제를 삼더리도 그거랑은 별개로 인정하고 이해를 해 줄 내용은 해 줘야 맞는 거지. 누가 봐도 편 사장 입장에선 헷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함께 사케 잔을 비워 놓고 정태가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
“우린 별게 아닐 수 있지만, 편 사장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안 해도 될 계산이 복잡해져서 엉뚱한 장면을 만들어 내 버린 상황?”
“정훈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용기고 실력 아닐까?”
“…….”
“그리고 만약 그게 필요하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 보기에 의도적으로라도 그런 상황을 연출해 볼 필요도 있다고 보고. 지금 이거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뭐가 보이는데?”
“재경 전체에 흐르기 시작한 긴장감.”
뭔가가 자기 마음대로 안 풀린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크게 쓸어 올린 뒤 머리카락까지 뒤로 다 넘기는 정태였다.
난 그런 정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긴장감이 있어야 경쟁에 의미가 붙는 거고, 의미 있는 경쟁이 있어야 눈에 보이는 성과가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 최소한 그동안 너무 평화롭기만 했던 우리 재경에게는 지금쯤 이정도 긴장감은 독이 아니라 영양제가 될 거 같아서 말이야.”
정태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은 빈 잔을 들어 정태에게 잔을 채워 주길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자신의 동생 잔을 성의 있게 채워 준 뒤 갑갑한 한숨을 길게 뽑고 있는 정태에게 내가 말했다.
“우리 손정태 사장님.”
“…….”
“그게 뭐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믿어. 오늘 이 자리도 현재 하고 있는 최선에 필요한 자리라 생각하고 마련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할 거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재경의 장남인 너의 역할이고, 어디까지가 장남이기 때문에 네가 내볼 수 있는 욕심인지고 헷갈리기 시작할 것이고.
하지만 정태야,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고민과 걱정거리들이 결국은 지금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 너의 노력과 실력은 크게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걸 최대한 빨리 인정해 내야만, 앞으로 이 할애비가 다해 볼 최선과 진심을 견뎌 낼 수 있지 않겠냐.
네놈 실력만 충분하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냐.
고작 동생 놈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뭔가가 거슬리고 신경이 쓰인다는 건 결국 불안하다는 거다.
그 불안을 계속 안고 갈지, 아님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 낼 수 있을지… 이 할애비는 그게 참으로 궁금하구나.
미안하다, 정태야.
하지만 난 지금부터 널 내 손주로만 봐 줄 수가 없구나.
이 손중길이가 널 내 손주라고 봐 주고, 꽃길만 걷도록 도와줄 순 없는 노릇 아니냐.
네가 기대하는 그 자리, 당연히 네가 앉을 거라 믿고 있는 그 자리는 꽃길을 걷는 자리가 아니란다.
재경의 직원들이 꽃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맨발로 가시밭길을 밟아 가며 길을 닦아 내는 자리란다.
이 손중길이가 재경의 미래, 직원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책임져야 할 너에게 고작 형제애 따위를 존중해 줄 성싶으냐.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지금 네가 가진 걸 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냐.
결국 정태는 묵직한 한숨을 토해 놓고 말했다.
“아… 뭐가 이렇게 사는 게 복잡하냐? 좀 심플하게들 살 순 없는 건가?”
속에도 없는 말.
“복잡한 게 싫으면 그냥 다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가야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없는 거고.”
“네가 해 보겠다는 최선을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기가 해야 할 최선만 정해 놓고 나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
“그 최선에 어쩔 수 없는 마찰이 생기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해결을 해 보려고 다시 최선을 다해 보면 되는 거고. 나는 그렇게 하는 게 더 심플하게 사는 거 같은데?”
* * *
다음 날 아침.
조동희 전무는 출근과 동시에 가방만 풀어 놓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전날 저녁 손정훈 상무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는 통화로 다 전해 들은 조동희 전무였다.
통화를 하는 내내 과연 손정태 사장스럽다는 생각을 떨쳐 내지 못했다.
바로 옆방을 따로 잡아 줘 놓고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다 듣게 만들었다?
조동희 전무는 항공에서 정태의 경영 수업을 맡았을 때부터 그런 기질을 항상 염려해 오고 있었다.
분명 사람을 끄는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질려 버리게 만드는 기질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 기질이 재경이라는 큰 기업을 맡아 나가야 할 자리에선 어느 정도 필요한 역량일 수도.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할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직 손정태 사장 체제의 후계 구도는 확정이 난 게 아니다.
어쩌면 재경의 후계 경합은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어느 순간부터 손정훈 상무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조동희 전무였지만, 그럼에도 손정태 사장과 함께했던 좋은 시간들이 아직은 훨씬 더 많았기에 못내 그의 부족한 부분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오늘은 내가 출근이 조금 늦었네.”
편승일 사장은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다름 아닌 조동희 전무임을 확인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크게 바쁜 거 없으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이 방에서 커피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해서.”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전날과 달리 편 사장은 자신의 방 상석 소파 자리를 조동희 전무에게 양보했고, 그에 조 전무는 짧게 손을 저은 뒤 그 옆 소파에 앉았다.
그와 마주 보고 앉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편 사장에게 조 전무는 상석 자리를 손짓하며 자신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음을 분명히 했다.
“둘이 있을 땐 내가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분위기를 녹여 보기 위한 조 전무의 노력.
그 노력 앞에 편 사장은 송구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무님까지.”
이래서 정치엔 조동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조 전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나까지? 그게 무슨 소리야? 식품에 나 말고도 편 사장하고 둘만 있을 때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나?”
“그런 게 아니라….”
입맛을 다셔 놓고 다시 또 고개를 내젓는 편 사장의 모습에 조 전무는 지금 상대가 얼마나 자신이 처한 입장을 난처해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 전무는 상대의 당황을 읽고 말머리를 틀었다.
“그래서 오늘 미팅은 언제 쯤 생각하고 있어?”
“미팅이요? 무슨 미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모르는 척을 하느냐는 식으로 조 전무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어제 손 상무가 한번 보라고 자료 건네준 거 있잖아.”
“아, 그거요.”
“아, 그거요? 이 사람이 진짜 어제부터 왜 이래? 왜 자네답지 않게 여기저기에 휘둘리나? 정신 차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거 손 상무가 나랑 같이 모직에 있을 때부터 신경 써서 준비한 내용이야. 자네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사안이 아니라고. 왜? 자네한테는 별로였어?”
시간을 딱 하루만 되돌릴 수 있다면….
편승일은 어제 일식집에서 손정태 사장에게 쫓겨나듯 한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가서 해당 자료를 확인했다.
자료를 확인하는 순간 밀려오는 후회.
손정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손정훈 상무와의 첫 만남을 보고하기 전에 그 자료를 먼저 확인해 봤다면 어땠을까?
해당 자료에는 놀라울 정도로 현재 재경식품에 꼭 필요한 기획이 담겨 있었고, 그 기획은 조금만 디테일을 붙여 디벨롭을 시킨다면 아주 가성비가 뛰어난 사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뭐 설마 자네 아직 확인을 안 한 거야? 내용이 많지도 않은데, 미리미리 확인을 좀 해 놓든가 안 하고….”
편 사장도 조 전무의 이러한 반응이 자신을 떠보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전날 일식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꺼냈다.
“졸지에 제 입장만 상당히 난처해져 버렸네요.”
그 말에 조 전무는 어리석다는 듯 혀를 차며 편 사장에게 말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자네 무슨 얼굴이 그렇게 얇아?”
“이건 얼굴이 두껍고 얇고의 문제가 아니죠.”
“아니긴, 딱 그런 문젠데. 그래서 어쩌겠다고? 손 사장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다고 사장 자리 집어던지고 나가기라도 하게?”
“…….”
“앞으로 같이 지낼 손 상무가 그런 소릴 했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손 상무가 아니라 손 사장이 그런 소릴 했다는 거 아닌가, 지금 자네 말은.”
“저도 지금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아직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도 안 한 엄한 고래들 핑계를 대?”
“…네?”
조동희 전무의 두 눈이 엄하게 바뀌었다.
“편승일이답게 처신하라고.”
“그게 무슨….”
“실력으로 붙어. 그걸 제일 잘하는 거 아니었나? 그것만 가지고 쟁쟁한 선배들보다 먼저 사장 자리에 올라간 친구가 왜 잘하는 걸 놓아두고,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그래? 어제 손 상무는 잘하는 걸 해 달라고 주문을 한 거였는데,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접근을 하고 있는 건 바로 당신이야.”
“……!”
“내가 모직에서 먼저 겪어 봤잖아. 무척 독선적이야. 그런데 타협이 가능해. 합리적인 스타일은 결코 아니야. 하지만 상당히 실리적이지.”
“…….”
“나는 당신이랑 손 상무. 둘이 잘 맞을 거 같은데? 잘 한번 맞춰 봐. 왜 맞춰 보기도 전에 뒷걸음부터 치나? 성격이 급해. 아마 어제 자기가 준 자료로 언제쯤 찾아올지 기다리고 있을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