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뭐가 더 있어야 됩니까? (159/303)

뭐가 더 있어야 됩니까?

점심 식사 후 동료 팀장과 함께 커피를 한잔하고 있을 때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문자 메시지 한 통이 하늘이의 폰으로 들어왔다.

정엽이 오빠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더니 전화가 걸려 온다.

“어, 오빠.”

하늘이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동료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점심은 했어?

“연락 온 타이밍을 보니까, 또 일부러 시간 맞췄네. 그러지 말라니까.”

―맞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나도 러닝 머신 좀 뛰고 들어와서 씻고 전화하는 거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하여간 부지런하다니까.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연락?

마땅히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허허실실, 항상 가벼운 사람인 것처럼 굴어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람.

그게 바로 손정엽이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그쪽 시간으로 아직 제대로 된 아침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에게 연락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한국 일정을 좀 잡아야 할 거 같은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한국 일정? 한국 들어와?”

―어, 안 들어간 지 너무 오래됐다.

“혼자 들어오는 거야, 아님 안나랑 데이빗도 데리고 다 같이 들어오는 거야?”

정엽이 오빠의 한국 방문은 하늘이의 집에서도 항상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거의 모든 스케줄을 할아버지가 직접 신경 써서 챙겨 줘 왔고, 정엽이 오빠가 안나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뒤부터는 그 가족의 모든 일정에 정성을 쏟아야 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직접 신경을 쓰시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젠 하늘이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친손주를 챙기시는 것만큼 정성을 쏟으신 데에는 정엽이 오빠가 한국에 아직은 어느 정도 등을 비빌 곳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걸.

그리고 몇 해 전부터 그걸 하늘이에게 맡기신 이유 역시 잘 알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 대에서 인연을 이어 가라는 뜻.

―작년에 못 들어갔으니까, 올해는 다 같이 들어가야지. 할아버지 아흔 번째 생신도 전화로만 인사를 드렸는데.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너한테 전화하는 거야.

“날짜만 알려 주면 되는 거지.”

―너 혹시 할아버지한테 따로 들은 이야기 같은 거 없어?

“할아버지한테? 아니? 오빠 들어오는 거 할아버지도 벌써 알고 계셔? 난 들은 내용 없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다. 이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더 낫겠다. 내가 이번에 들어가면 혼자 움직여야 할 일이 조금 있을 거 같아.

“혼자?”

아, 혹시 그거 때문인가?

하늘이는 어렴풋이 정엽이 오빠의 이번 한국 방문이 부경호텔과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통화를 이어 갔다.

―안나하고 데이빗까지 다 데리고 움직이기엔 조금 불편한 일정도 생길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에이, 뭐 그런 걸 신경 써? 내가 같이 있어도 되는 거고, 회사 스케줄이 안 빠지면 내가 따로 사람을 붙여 주면 되는 거지.”

―그래, 그걸 좀 부탁하려고.

“부탁 같은 소리 한다. 나 데이빗 보고 싶어 죽겠어. 맨날 사진으로만 보니까 얼마나 컸는지 감도 없어. 얼른 일정이나 말해.”

―16일 비행기로 들어갈까 싶어.

“16일? 다음 주네?”

―어, 다음 주 목요일. 금요일이 할머니 기일이셔.

순간 하늘이는 비록 통화이지만 어떠한 반응을 정엽이 오빠에게 보여 줘야 하는 것인지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정엽이 오빠가 말한 할머니 기일은 자신의 할머니 기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빠네… 할머니?”

하늘이가 기억하기로 지금껏 정엽이 오빠는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참석을 한 적이 없다.

자기 아버지 기일 전후로 한국을 방문에 묘를 찾았던 게 고작.

―정훈이가 별말 안 해?

“뭘 자꾸 딴 사람 통해서 오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냐, 없냐를 물어? 유명인도 아니면서.”

자신이 던진 농담에 정엽이 오빠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며, 동시에 하늘이의 머릿속으로는 정훈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번에 파리에서 만났을 때, 나한테 그러더라. 할아버지 기일은 몰라도 할머니 기일엔 참석을 하라고.

“…그래?”

―할머니 기일이 중요한 거겠어? 나한테 그때까지 결정을 해서 답을 달란 소리겠지.

하늘이도 더는 묻지 않았다.

―금요일에 안나하고 데이빗 데리고 작은집에 가서 인사드리고, 주말 보낸 다음에 그다음 주부터는 사람들을 좀 만나러 다녀야 할 거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여기에서 어레인지 다 해 놓을 테니까, 들어오는 날 비행시간이랑 돌아가는 날짜만 톡으로 보내 줘.”

―땡큐. 그럼 내가 안나한테 말해서 일정 정확하게 다 나오면 너한테 연락하라고 말해 놓을게.

통화를 끝내려고 할 때였다.

―아 참, 정훈이한테 물어서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면 내가 같이 저녁이나 하자고 한다고 전해 줘.

바로 그 전날이 자기네 할머니 기일이다.

만나서 잡아도 될 약속을 자신을 통해 이렇게 언급한다는 거 자체가 손정훈에게 이번 자기 할머니 기일에 참석을 하겠다는 뜻을 미리 전해 달라는 소리 아닐까?

그 집안 사정이 복잡한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안의 사정 속으로 들어갈 결심을 해서일까, 더 이상 남의 일 같지가 않은 하늘이었다.

정엽이 오빠와 통화를 끝낸 하늘이는 우선 아버지, 장영석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 내용을 전달한 후 정훈이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 * *

다음 주 목요일에 오겠다?

만나 볼 사람들도 많을 텐데 한 며칠 미리 여유 있게 오든가 안 하고….

그래도 결심을 하긴 한 모양이네.

“그렇게 가족들 다 데리고 오면 한국에 있는 동안은 어디에서 지내지?”

―올 때마다 지내는 집은 있어. 오기 며칠 전에 미리 사람들 시켜서 청소만 해 놓으면 돼.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편 사장은 아무런 소식이 없는 상황.

편 사장의 반응이 늦어지는 만큼 나는 마땅히 할 일 없이 사무실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때마침 하늘이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럼 공항 픽업이나 그런 건 지금까지 계속 미래금융 사람들이 나갔던 거야?”

―어휴, 우리 할아버지 성격에 그냥 사람들만 보냈을까. 나 한국 들어오기 전까지는 할아버지가 직접 마중을 나갔어. 이젠 그걸 내가 하고 있고.

“참 정성도 지극이다. 그럼 그날도 네가 직접 나가는 거야?”

―이번엔 상황을 좀 봐야 될 거 같아. 나도 요즘 회사 일 때문에 정신없어. 어쨌든 정엽이 오빠 일정은 우리 쪽에서 케어를 할 거니까 크게 신경 쓸 건 없고, 그래도 오빠네 집에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어? 오빠네 아버지랑 미리 이야기가 된 내용은 아닌 거 같고, 정엽이 오빠 이야기하는 것만 들어선 오빠 때문에 오는 거 같던데.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집에 이야기하면 되는 내용이고. 아무튼, 고맙다. 네가 중간에 끼어서 신경을 많이 쓰네.”

―어쨌거나 그동안 우리 집에서 해 왔던 일이라 딱히 오빠한테 인사를 받을 내용이 아니긴한데, 그래도 너무 말만 하는 거 아냐?

“뭐가?”

―돌아가는 상황상 중간에서 우리 미래금융이 해 줘야 할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겠다 싶은데 중간에 나한테 수고한다고 따로 수고비 같은 거 좀 안 챙겨 주나?

“수고비? 하하. 그래, 뭐 얼마나 챙겨 줄까?”

―돈 말고, 오빠 시간을 좀 줘.

“시간? 무슨 시간?”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내 아는 지인들이 식사를 한번 같이하자고 하네?

“하면 되지. 급한 건가?”

―다음 주에 정엽이 오빠가 온다고 하니까, 그다음 주 정도로 잡아야 될 거 같아. 말은 진작에 나왔거든.

“난 이번 주 토요일만 아니면 돼.”

고성표 부장이 본부장을 달고 식품으로 옮기기 위해 한국에 들어오는 날이다.

그날 저녁을 강인성 차장과 다 같이 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만들 자리는 아니고. 해야 될 일부터 다 해 놓고 해도 상관없는 거야. 그냥 그런 자리가 잡힐 거 같다고 미리 말을 해 보는 거야.

“혹시 내가 아는 사람들도 오는 건가?”

―한두 명 정도 있을 거 같긴 한데, 멤버가 확정이 되면 내가 따로 이야기해 줄게. 오빠는 크게 신경 안 써도 되는 자리.

“그런 자리가 비싼 자리지. 날짜 정해지면 말해 줘. 장소는 내가 알아볼게.”

―오올… 양심은 있는데?

“그동안 너희 집안에서 챙겨 준 우리 집안의 체면이 있는데, 지금부터는 나라도 미래금융 장손녀의 체면을 챙겨 줘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하늘이와의 통화가 거의 다 정리되어 갈 때였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편 사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날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모습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 20분.

많이 늦긴 했지만, 어쨌거나 조 전무가 내가 식품으로 데리고 오며 주문했던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거 같다.

내가 소파 자리로 옮기는 동안, 편 사장이 먼저 소파에 도착했다.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랬기에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제는 불필요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거든.

“앉으세요.”

내가 먼저 상석 자리에 앉아 자리를 권한 뒤에야 편 사장은 어제 내가 확인을 해 보라고 건넸던 기획안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제가 사장님을 찾아갈까 했습니다.”

난 테이블 위로 편 사장이 내려놓은 기획안을 쳐다보며 말했고, 그에 편 사장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게 확인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 의견도 들어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오전부터 편 사장은 바빴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오전 근무 시간 내내 사장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내 방으로 다 들어왔었다.

많은 임원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내가 건넨 기획안을 따져 보고 있을 거라는 예상 정도는 나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것보다 우선 어제 일은….”

“유감입니다.”

내가 먼저 자르고 들어갔다.

“저도 손정태 사장이 그 문을 열 줄은 몰랐어요.”

“고성표 본부장 방을 그렇게 배정시킨 부분에 있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상무님도 새로 오셨는데, 빠른 시일 내로 임원들 다 같이 식사 자리를 한번 마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리는 성과로 관계가 만들어진 다음에 차근차근 마련해 봅시다. 조 전무. 그런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는 사람 아닙니까.”

“…….”

“관계로 성과를 만드는 거보단 성과로 관계를 만드는 게 회사에 더 큰 도움이 됩니다.”

편 사장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사장 자리에 앉아 계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

“저도 그러겠다고 조 전무와 함께 식품으로 넘어온 거고요. 자, 어제까지 있었던 우리 관계는 이걸로 정리하고 이제 사업 이야기합시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획안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고개를 살짝 들어 내 눈치를 살피며 편 사장이 물었다.

“그게… 끝이십니까?”

“왜요? 뭐가 더 있어야 됩니까?”

그냥 넘어가 준다고 할때, 조용히 넘어가자, 이 친구야.

앞으로 날 도와 해 나가야 할 일이 태산인데, 태산 같은 일을 해 나가야 할 친구가 무슨 그런 먼지 같은 일에 발목이 잡혀 있나.

난 이 친구가 지금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거 같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 줬다.

“사장님. 우리 성과로 관계를 만들어 봅시다. 저는 제 편 만들겠다고 식품 생활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건 사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앞으로 사장님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저와의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면, 좋은 성과를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저도 그렇게 노력을 할 거고요. 저는 진짜 이게 끝인데, 다른 게 더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그제야 편 사장의 두 눈에 안심이라는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 전무가 그랬다.

편 사장.

실력 하나만큼은 괜찮은 친구라고.

나는 아직 그 실력을 보지도 못했는데, 잠시 내 편 안 들어 줬다고 홀대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우리 재경이나 그간 자기 동아줄인 줄 알았던 정태 놈을 배신했다면 또 모를까.

나는 오히려 어떻게든 정태 편에 남겠다고, 그 엉뚱한 짓, 경솔한 행동을 한 게 조금은 예뻐 보이는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니, 마땅히 그렇게 해야 맞는 거지.

그러니 피아 식별도 제대로 못 해 이런 친구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낭떠러지 앞으로 밀어 버린 정태 놈이 내 눈엔 불안해 보일 수밖에.

“자, 그럼 이제 서로 불편할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진짜 일 이야기합시다. 사장님은 좋게 보셨다고 말씀을 주셨고… 다른 분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질문만 받았습니다.”

“어떤 질문이요?”

“직접 맛을 보지 않고 콘셉트만으로 상품성을 말하기는 사실 곤란합니다.”

“그렇겠죠.”

“중앙개발연구소 비스킷․파이팀의 연구원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시켜서 소비자 조사부터 해 보는 게 순서 같습니다.”

당연한 소리.

“내일 아침에 도착을 할 겁니다.”

“도착을 한다면…?”

“당분간 테스트용으로 삐에르 에슈메 쪽에서 매일 한 렉(마카롱 120구, 티라미수 80컵)씩 당일 만든 마카롱과 티라미수를 보내 주기로 했어요. 재경항공 쪽에서 딜리버리 지원을 해 줄 겁니다. 다른 질문은요?”

“만약 내일 아침에 도착을 해서 우리가 그걸 받을 수 있다면, 다 같이 테스트를 하면서 회의를 하는 게 훨씬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제가 받은 질문 중에 맛이 대답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경우도 분명 있을 거니까요.”

“그럼 내일 회의는 그냥 바로 연구소에서 하는 걸로 할까요?”

“연구소에서요?”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