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대로 가실 겁니까?
“정말 이대로 가실 겁니까?”
원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편승일 사장과 모범태 전무가 마주 보고 앉았다.
간단한 중식 요리 몇 가지와 독한 백주 한 병이 테이블 위를 채우고 있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술잔을 비워 놓고 안주를 집고 있는 편 사장에게 모범태 전무가 이건 아니지 않으냐는 식으로 재차 물었다.
“진짜 브레이크 한번 안 걸어 보고 이대로 진행을 하시겠다고요?”
“우리한테 브레이크가 어딨어? 그리고 객관적으로 해 볼 만한 기획 아니야? 아까 회의할 때 사람들 반응 봤잖아.”
도대체 이 사람이 어제, 오늘 왜 이러는 것일까.
편승일 사장이 보이고 있는 입장이 어제부터 계속 신경이 쓰이는 모범태 전무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편승일이 재경 그룹 안에서 오너가를 제외하고 이례적으로 빠른 사장 승진을 할 수 있게 도왔던 인물이 바로 모범태 전무였고, 그런 자신의 사람이 빠르게 전무 승진을 할 수 있도록 판을 설계한 인물 또한 편승일이었기에.
그랬던 만큼 현재 재경 그룹 안에서 사장과 전무 모두가 원 맨 출신인 곳은 재경식품이 유일하고, 그 부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두 사람이었다.
“그야 기획을 낸 당사자가 손정훈이고, 바로 자기들 눈앞에 있는데 다들 괜찮다고 하지 면전에 대고 뭐라고 하겠어요? 그리고 어떤 부분이 해 볼 만하다는 겁니까?”
“에이, 좀 그렇게 눈에 쌍심지 켜고 말하지 말고. 뭘 그렇게 흥분을 해?”
편승일은 모범태가 무엇 때문에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손정훈 본부장이 가진 능력을 의심하는 형식으로 표출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정훈 본부장이 식품으로 넘어오기 전까지 모범태는 재경식품의 전무로 확고한 이인자 자리를 지켜 내고 있었다.
물론 1년, 2년짜리 계약직 사장, 전무 자리를 맡아 나가면서 일인자, 이인자 자리를 운운한다는 게 얼마나 유치한 발상이고 부질없는 집착인지 모를 편승일, 모범태가 아니다.
그래 봤자 자신들은 재경이라는 거대 집안의 고급 집사들일 뿐, 재경의 원 맨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까닭에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느껴 볼 겨를이 없었던 존재들 아닌가.
하지만 사람 기분이라는 게 있다.
한순간 공식적인 윗사람으로는 조동희 전무가 함께 식품으로 넘어왔고, 조직의 실질적인 리더는 오너가의 손정훈 본부장이 되어 버렸으니 모범태 전무의 위치는 두 계단이나 뚝 떨어져 일반 본부장 수준이 되어 버린 것.
편승일 사장이야 어쨌거나 사장이라는 타이틀이 크게 먹고 들어가니 어쩌면 그 힘을 다음 계약 때까지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동일 직급에 그룹 최장수 임원인 조동희 전무가 함께 있으니 그 불안함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닐까.
“저는 전혀 납득이 안 되는 기획인데요? 자기가 자기 입으로 외식사업 부문이 메리트가 있겠냐고 사장님한테 물었다면서요?”
“화가 단단히 났네?”
“사장님. 제가 언제 사장님 앞에서 누구 험담하고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예 없지는 않았지.”
“누가 지금 대리, 과장 시절 이야기합니까? 그리고 저 지금 진지합니다.”
“그래, 알았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조 전무님 넘어온 게 그렇게 불안해?”
“누가 조 전무님 오신 걸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조 전무님까지 모시고 와서 하고 있는 행태가 불안한 거죠. 손정태 사장이 식품에서 외식사업 부문을 키워 보겠다고 했을 때 그거 다 누가 했습니까? 제가 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 내용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입에 담은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외식사업 부문을 단 몇 년 만에 이렇게까지 성장시킨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모범태 전무였다.
그리고 모 전무가 손정태 사장의 기획과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동안 가공사업부의 매출을 유지하며, 외식사업 부문을 지원했던 게 바로 편승일 사장이었다.
손정훈 본부장의 식품 출근 첫날, 자신에게 외식사업부 브랜드 매장의 메뉴 가격을 물었을 때 눈앞이 캄캄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편 사장은 자신의 사장 자리를 조금이라도 길게 가져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당연히 그게 목적이었고, 목표일 수밖에.
결국은 자신도 월급쟁이니까.
그래서 모두가 재경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고 실제 회장님까지도 지원을 해 주라는 지시가 있었던 손정태 사장의 기획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을 모범태 전무에게 맡겼다.
하는 시늉만 하기엔 거기에 들어가야 할 투자가 적지 않게 보였고, 그렇다고 식품 전체를 외식사업부 쪽으로 집중을 시키기엔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컸다.
어쨌거나 자신은 월급쟁이나마 사장이 아닌가.
결국 모 전무가 외식사업부 확장에 사할을 걸 수 있도록 모든 배경을 만들어 주며 식품 전체 살림을 꾸리느라 정작 외식사업 부문에 관한 자세한 내용까지는 챙길 여력이 없었던 편승일 사장.
지금에 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복기해 보면, 자신을 비롯해 결국 방향만 있고 목표는 없었던 손정태 사장의 의욕을 지지했던 그 당시 재경식품 경영진들의 몸 사리기가 화근이었다.
“꼴랑 모직에서 인사부 과장 생활 2년 하다가 넘어와서는, 오자마자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자기가 현장을 알기나 하냐고요. 자기들은 말로만 하면 되지. 이거 이렇게 하면 괜찮은 사업이 될 거 같은데 진행해 봅시다, 이걸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당장 바꿔요… 그런데 실제 사업이라는 게 그렇게 되는 거냐고요.”
“…….”
“그동안 우리가 외식사업 부문으로 쏟아부은 시간과 정성이 얼마고, 운영되고 있는 업장이 몇 갠데 그걸 식품의 식 자도 모르는, 고작 모직 생활 2년이 전부인 사람이 넘어와서 혁신을 해 보겠다? 이게 어떻게 혁신입니까? 억지고, 막무가내죠.”
“…….”
“아, 무슨 말을 좀 해 보세요, 사장님. 진짜 이거 이대로 브레이크 한번 안 걸어 보고 손정태 사장 때처럼 저한테 맨땅에 헤딩하자고 할 겁니까?”
* * *
저녁 8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손홍준 회장은 저녁을 먹고 서재에서 계열사별로 올라온 사업 현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일과.
재경의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이후부터 지금까지, 손 회장은 아버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떠서는 대표 신문사들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구상하는 것으로 시작을 해, 침대로 올라가기 전엔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결재를 해 줄 사업 현황들을 확인하는 삶을 강박적으로 지켜 가며 살아왔다.
서재 안은 온통 뿌연 담배 연기로 잠겨 있었다.
항공 쪽에서 들어온 사업 현황을 확인하려고 파일철을 열었을 때였다.
웅… 웅… 웅….
사무 책상 위로 올려놓은 폰이 묵직한 진동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국제 전화라고만 뜨는 발신자 번호.
습관처럼 사무 책상 위로 올려진 그 상태로 폰을 열어 통화를 연결시켜 놓고 천천히 그 폰을 귀에 갖다 댔다.
“네, 손홍준입니다.”
―작은아버지.
상대 쪽에서는 곧바로 그다음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손 회장이 느끼기에 그 틈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예상을 하지 못했던 전화.
그랬기에 대비 자체가 불가능했던 목소리.
그래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도록 만드는 상대였다.
―저 정엽입니다.
“어….”
실제 손 회장은 조카의 연락을 어떻게 받아 줘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그래, 정엽이.”
―혹시 바쁘신데 제가 전화를 드린 건 아닙니까?
“아냐, 괜찮아.”
손 회장의 손은 자신이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 담뱃갑 뚜껑을 열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사이 상대가 말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는 어때? 잘 지내고 있지?”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붙인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빠는 동안 손 회장의 머릿속으로는 그의 형수, 정엽이의 어미라는 존재의 젊은 시절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얼굴.
그 염치없는 처가 쪽 인간들보다 더 자신을 괴롭게 만들고 궁지로 내몰았던 존재.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손 회장에겐 모멸 그 자체였다.
재경을 위해, 이 집안을 위해 손 회장 자신이 인내하고 버텨 냈던 모든 것을 한낱 욕심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 존재를 손 회장은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때 건강이 좀 많이 안 좋으셨어요. 다행히 지금은 요양을 잘하고 계시고요.
그정도 내용은 남 사장을 통해 가끔씩 전해 들었던 손 회장이었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 침묵을 깨뜨리는 정엽이의 목소리에 손 회장은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 혹시 저 결혼한 거 알고 있으세요?”
―그래, 가끔씩 네 고모부 통해서 네 소식 듣고 있다.
그 말을 해 놓고 보니 괜히 민망해졌다.
이런 전화를 받기 전엔 느껴 볼 이유가 없었던 민망함.
이젠 집안의 최고 어른이 되어 있는 자신이 형님이 남기신 유일한 혈족의 결혼조차 모르는 척, 담을 쌓고 살았던 게 못내 민망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더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제가 사는 게 바빴습니다. 결혼한다고 연락드릴 심적 여유가 없었어요.
“아니다. 애 아빠 됐다는 소리를 듣고도 아직 연락 한 통 못 넣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혼을 해서 내 가정 꾸려 애 아빠가 되어 보니까,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그럴 수 있다.”
―제가 그동안 사는 게 바빴다는 이유로 제가 해야 할 도리를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작은아버지.
“열심히만 살기도 버거운 게 사람 인생이다. 그거 좀 못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 다들 못 하고 사는 게 도리니까.”
―다음 주에 가족들 데리고 한국에 잠시 들어갈까 합니다.
“다음 주에?”
―달력을 보다 보니까 다음 주가 할머니 기일이더라고요.
다시 또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손 회장이었다.
―실은 작은아버지한테 전화 드리기 전에 정훈이하고 먼저 통화를 했어요.
“정훈이하고?”
―제 와이프하고 아들 데리고 할머니 기일에 맞춰서 한국에 들어갈 테니까 작은아버지하고 숙모한테 말 좀 전해 달라고 제가 부탁을 했거든요.
정훈이 이놈이 그런 연락을 정엽이하고 주고받았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 주던가 안 하고….
―그랬더니 저더러 작은아버지한테 직접 전화를 드려 보라고 하네요.
그 말을 듣고서야 손 회장은 둘째 아들의 생각이 깊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걸 자기 통해서 말을 전하게 하는 것도 우스운 거 아니냐고. 못 갈 곳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조심하고 생각을 많이 하냐면서.
“그래, 잘했다. 이렇게 하면 되지.”
―네. 진작에 제가 이렇게 해야 했는데, 막상 하니까 별거 아닌 이 일이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무척 하기 힘든 일이었네요.
“와서 지낼 곳은 있고?”
―항상 한국 들어가면 태산이 할아버지가 다 준비를 해 주시니까요.
“네 할머니가 많이 반가워하시겠다. 그래, 그럼 그날 보는 걸로 하자.”
―네. 그럼 작은아버지하고 숙모님께 인사는 그날 정식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카와의 통화를 끝낸 손 회장은 둘째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엽이와 무슨 통화를 했는지 물어볼까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은 이 역시 집안일인데, 아내를 시켜 정태와 정훈이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들어가도록 하는 게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을 것이다.
손 회장은 폰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 놓고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한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밤늦게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깜빡할 거 같아서 생각난 김에 전화한 거야.”
―네, 편하게 말씀 주십시오.
“내일쯤 사람 시켜서 형님 산소 정리 한번 하지.”
―큰 회장님, 큰 사모님 산소도 같이 정리를 시킬까요?
“그래, 하는 김에 같이 손 좀 봐. 형님 산소는 각별히 신경을 좀 쓰고. 다음 주에 정엽이가 온다네.”
―…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