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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 산소까지 인질 잡냐? (163/303)

돌아가신 분 산소까지 인질 잡냐?

“자신감인지 열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앉아 계신 전무 자리까지 걸어 가며 저한테 보여 주신 그것들이 타깃 설정을 잘못하고 있단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매출이야 오르겠죠. 저도 그 정도 그래프는 읽을 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브랜드들이 그려 내고 있는 그래프의 천장이 너무 뚜렷하다는 거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 친구가 이렇게 날 설득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표정, 자세 모든 것들이 너무 재밌다.

열정.

그런 게 느껴진달까?

“이 부분은 본부장님께서 약간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무슨 오해요?”

“사장님한테 우리 브랜드 중 수출이 가능한 브랜드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들었습니다.”

“네.”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사실 거의 모든 브랜드가 수출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이 된 브랜드들입니다.”

하이고….

답이 없다, 답이 없어.

누구 하나 태산이처럼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는 놈이 없구나.

내가 진짜 꼭 수출시킬 브랜드를 이야기한 거였겠나.

그래도 일단은 들어 줬다.

“그런데 계속 코로나 핑계를 대게 되는데, 지난 2, 3년 정도가 브랜드 수출이 무척 난해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고 또 인정합니다.”

“그 난해했던 기간을 브랜드별로 적자가 나는 브랜드도 분명 있었지만, 브랜드 수출 빌드 업을 쌓는 준비로 잘 막아 왔고요.”

“그래서 현재 수출 가능한 브랜드가 뭐가 있습니까?”

“우선 시골통닭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 치킨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게 과연 될까요?”

이건 내가 안 될 거라는 부정적인 확신으로 던진 질문이 아니라, 모 전무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그 많은 국산 치킨 브랜드 중 해외에 진출을 해서 유의미한 성공 사례를 만들어 낸 브랜드가 있단 소린 못 들어 봤는데요?”

“지금까지 없었다고 앞으로도 계속 없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본부장님.”

“이게 과연 한 조직의 전무라는 분한테서 들어야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없었다고 앞으로도 쭉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이제쯤 유의미한 성공 사례가 하나 정도는 나올 때가 됐는데, 그걸 우리 재경에서 만들어 보자? 보통 이런 말은 저를 상대로 할 말이 아니라, 신제품 개발에 도전 정신을 넣지 못하는 직원들을 불러다 놓고 해야 할 소리 아닌가요?”

“…….”

“참 이상하죠?”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 전무였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꼭 전무님이 절 상대로 하고 계신 게, 전무의 역할이 아니라 외식사업부 부문장이나 본부장 정도의 역할처럼 느껴져서요. 외식사업 부문이 아니라, 재경식품 전체의 경영을 읽으셔야 할 분이, 특정 부문의 실무에 집착을 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

“그 부분은 그렇다고 치고요, 시골통닭이 얼마나 유의미한 실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보이세요?”

“물론 기대치는 높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기준을 잡는 게 더 중요하겠죠.”

“그래서 제 말은 전무님이 현재 높게 잡고 싶어 하는 기대치가, 신라면, 불닭볶음면, 허니버터칩, 육개장면, 햇반… 그런 대박 성공 사례만큼 스코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느냐는 겁니다.”

“그건….”

“그리고 저는 솔직하게 말해서 현실적인 기준으로 잡는 유의미한 스코어도 시골통닭 수준으로는 만들어 내기가 무척 힘들 거 같은데요?”

“전 세계가 지금 K 열풍입니다.”

이제는 하다 하다 K 시리즈까지 들고나오네.

“처음부터 싸이, 블랙핑크, BTS가 빌보드 차트 순위에 이름을 올리며 K팝의 시대를 연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상을 받고, 오징어 게임 같은 K드라마가 전 세계 OTT 채널을 휩쓴 게 아니죠. 그 전부터 꾸준히 많은 음악, 영화, 드라마가 세계로 나가서 길을 닦아 가며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거죠. 요식 사업 역시 저는 마찬가지라고 확신합니다. 벽제갈비, 서라벌, 강호동… 많은 고기 브랜드들이 이미 아시아권으로 나가서 큰 가능성을 확인시켰습니다. 칠성포차 역시 중화권에서 아주 좋은 성공을 거뒀고요.”

“거뒀었죠.”

“…네?”

“꾸준히 거두고 있는 게 아니라, 잠깐 거뒀던 거죠. 닭강정 브랜드도 뭐 하나 있지 않나요? 컵밥도 있었던 거 같고. 한 번 확! 하고 인기를 끓었다가 한국에 들어왔던 대만 카스테라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브랜드요.”

“…….”

“전무님.”

“네.”

“BTS. 진짜 대단합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그리고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 수준 높은 한국 영화, 드라마들… 정말 저 스스로 제가 한국인인 게 자랑스러울 정도로 뿌듯하고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언제 적 기생충입니까?”

뭔가 반박을 하려다 말고 마땅한 반박거리를 찾아내지 못한 눈치.

그런 모 전무에게 다시 물었다.

“언제 적 오징어 게임이고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뭘 말씀이십니까?”

“그게 현재 우리 재경식품의 한계라는 걸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지, 제가 지금 언뜻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래, 이해.

내가 봐도 그게 안 되고 있는 거 같다.

“우리가 아무리 시골통닭을 글로벌적으로 성공을 시켜도, 그 유행에는 어쩔 수 없는 유효 기간이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시골통닭을 KFC, 맥도날드 수준으로 키워 내지 못하는 이상은요.”

“하지만….”

“여기에 하지만 같은 건 없습니다. 그게 팩트니까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건, 그런 유효 기간이 명확한 콘텐츠, 즉 수출 가능한 요식 브랜드가 아니라 바로 넷플릭스, 디즈니, 오스카 시상식, 또 뭐야? 그래, 빌보드 차트. 그런 구조가 되어야 할 거란 말입니다.”

“……!”

“왜 전무씩이나 되시면서 넷플릭스를 만드실 생각을 안 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오징어 게임 같은 콘텐츠에만 집중하고 계십니까? 그런 거 미친 듯이 잘 만들어 내는 사람들 많잖아요, 백종원 같은 애들.”

난 소파 테이블을 단단하게 몇 차례 두드리며 모 전무를 집중시킨 뒤 말했다.

“그런 건 그냥 그런 애들한테 하라고 하고, 우린 재경답게 좀 더 큰 판을 보자고요. 제가 왜 모직에 있으면서 스너프를 인수하자고 기획을 만들었는데요?”

“…….”

“상품, 브랜드. 즉 콘텐츠는 좋은 제품력을 생산해 내고, 그 이미지를 유지해 나가는 데 너무 많은 수고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비슷비슷한 제품력군의 경쟁이 너무 치열하죠. 반면에 시스템. 즉 플랫폼은요? 세팅만 제대로 해 놓으면 콘텐츠 제작사, 유통사들이 어떻게든 그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네 상품을 노출시켜 보겠다고 돈을 들고 찾아옵니다.”

마침내 모범태의 두 눈이 방향 잃은 불길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계속 우리 직원들한테 맨땅에 헤딩을 하게 만드십니까? 크게 돈도 안 되는 걸 가지고. 전무님. 물론 파는 상품의 가치가 그 기업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재경 그룹쯤 되면 좀 더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언제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맹주들 구슬려 가며, 때론 강하게 겁을 줘 가며 마른오징어 진액 뽑아내듯 쥐어짜는 일을 우리 재경식품 직원들에게 시키실 생각입니까?”

모 전무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꿀꺽.”

“조금만 더 크게 봅시다. 그럼 분명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졌던 안개가 걷어진 듯, 조금은 명쾌해진 얼굴로 모범태가 물었다.

“외식사업부의 규모를 줄여 보자 하셔 놓고, 마카롱, 티라미수 베이스의 디저트 숍 브랜드를 만들자는 기획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장르가 다양해야 사람들이 그 채널을 선택하죠. 넷플릭스, 디즈니에 액션, 로맨스만 있다면 그게 어디 경쟁력이 있겠습니까? 애들이 좋아할 만한 에니메이션도 갖춰 놓고, 무협, 판타지, SF 같은 장르도 다양하게 갖춰 놔야 경쟁력이 생기죠.”

“…….”

“그리고 저는 외식사업부의 규모를 줄여 보자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리가 필요하단 말은 했어도. 규모가 아니라, 식품 안에서 외식사업부의 비중이 불필요하게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외식사업부 쪽으로 너무 많은 투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현재 우리 재경식품은 가공사업부에서 좋은 실적을 만들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평균치를 외식사업부에서 다 까먹고 있는 상황이죠.”

“그건… 네,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내일 제 할머니 제사입니다. 파리에서 사람도 오고, 여러모로 제가 이번 주말엔 정신이 없을 거 같습니다. 고성표 본부장도 출근 시작했으니까, 다음 주쯤에 임원 전체 회의를 한번 건의하겠습니다. 제가 이번 기획을 가지고 임원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다 상대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선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 전무였다.

“고성표 본부장이 회의때 논의할 자료들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좀 더 디테일한 내용은 다음 주에 마저 이어서 하는 걸로 했음 싶은데,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봐라.

또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모 전무 이 친구를 상대하면 진이 싹 다 빠지는 기분이다.

대신에 시간은 알차게 잘 가는 거 같아, 기분은 좋고.

재경식품.

분명 식품으로만 업계 순위권에 진입을 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종목이다.

나는 그렇게 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기획에 더 많은 아이디어가 모여만 준다면, 어쩌면 스너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해야 할지도.

그리고 더 크게 보면 해당 기획은 장기적으로 유통의 스너프와 호텔 쪽과의 연계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 * *

정엽이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2년 반 전, 아버지의 기일에 맞추어 찾았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묘비에 아들 데이빗의 이름이 한글로 ‘데이비드’라고 새겨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즐기셨다던 양주 한 병과 담배 한 개피, 그리고 몇 가지 과일만 간단하게 올려놓고 데이빗을 옆에 세워 절을 가르쳤다.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트라우마처럼 정엽이를 괴롭히는 기억이 있다.

7년 전, 아버지의 산소 이장 문제로 고모, 고모부 내외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작은집에서는 정태가 작은아버지를 대신해서 왔었다.

어머니와 마주치는 게 껄끄러워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일부러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던 그 날, 시종일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던 정태가 던졌던 말이 아직까지 정엽이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날 새겠다. 적당히 좀 하지?”

이런 문화에 대해선 아무런 경험이 없었던 정엽이었기에 고모부가 하라시는 대로, 이장 일을 도와주셨던 인부들과 함께 아버지의 분묘를 발로 꾹꾹 최대한 정성껏 눌러 밟고 있을 때였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 모두가 경악을 했을 정도로 컸던 녀석의 말.

고모가 이럴 거면 넌 그냥 돌아가라고, 어디 싸가지 없이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툭툭 내뱉느냐고 꾸중을 했지만 그 꾸중을 비웃으며 자신의 곁으로 다가왔던 정태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었지.

“직접 관리도 안 할 거면서 이렇게 옮기는 이유가 도대체 뭔데?”

솔직히 말하면 정엽이도 그 당시엔 그 이유를 몰랐다.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 당신은 죽어서 손씨 집안 선산에 묻히기가 싫다는 핑계로 아버지의 산소만 따로 이장을 시키셨다는 걸 알게 됐지, 그전까지는 어머니가 왜 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하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정엽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들을 정태는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지금에 와 그때의 분위기를 기억해 보면 고모와 고모부도 다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이장 다 끝내 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긴 거지만, 결국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 큰아버지 산소 대신 관리하는 우리 집만 피곤해지는 거 아냐?”

“…….”

“이젠 잡을 게 없어 돌아가신 분 산소까지 인질 잡냐? 안 부끄럽냐?”

“뭐 이 새끼야?”

그때의 정엽이는 알지 못했다.

표현의 경우가 없었다는 것뿐, 결론적으로는 정태의 말이 맞는 거였고 정작 경우가 없는 결정을 한 건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걸.

어른들이 다 있는 앞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까지 어색해져 버린 사촌 동생의 멱살을 잡았는데, 멱살이 잡힌 상태로 자신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던 정태의 한마디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백모님한테 그냥 제발 좀 평범하게 하시라고 해. 이렇게 말 같지도 않은 짓 하겠다고 집안 들쑤시지 말고. 고작 돌아가신 분 산소 하나 가지고 이렇게 들쑤신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빡해 줄 거 같아?”

“…….”

“뭘 더 얼마나 뜯어 가겠다고 이런 생쇼를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살고 있는 것도 결국은 우리 집 때문인 줄 알고 감사할 줄 알라고.”

죽어서 손씨 집안의 선산에는 묻히기 싫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핑계가 결국은 아버지 산소 이장을 인질로 작은아버지에게 금전적인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어머니의 얕은 수였다는 걸 알고 난 뒤, 정엽이는 그날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였던 정태의 말들이 한마디, 한마디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가슴에 새겨진 그 문신 같은 말들은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결국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라는 걸 되새김질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산소 이장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 그날이 정엽이에겐 인생의 가장 치욕적인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정엽이 자신이 누리며 살았던 모든 것이 그런 치욕의 부산물이었음을 알게 해 준 정태와 7년 만에 다시 만나는 날이다.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크게 불편하지가 않았다.

정태라는 너무 불편한 상대가 그곳에 있기에.

하지만 이 정도 불편함쯤은 충분히 견딜 만하다.

더한 불편함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데이빗.”

“응.”

“할아버지한테 다음에 또 찾아오겠다고 인사해. 그만 가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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