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름만 거창합니다 (164/303)

이름만 거창합니다

“언제부터였어?”

“뭐가?”

부분 조명이 들어와 있는 정원을 함께 내려다보며 정태와 마주 보고 앉았다.

2층 거실로 난 데크 발코니였다.

여정이, 남 사장까지 모인 시끄러운 자리라 그런지, 정태는 나와 따로 시간을 가지길 원했고 아직 정엽이가 도착을 하지 않았기에 그러자며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정엽이 형이랑 따로 연락하고 지내는 거 같던데?”

찻잔을 입술에 붙인 채 가만히 있었더니 정태가 다시 말했다.

“너한테 먼저 연락이 왔었다며? 이번 제사에 자기 가족들 데리고 오겠다고.”

“모직에 있을 때 방돔 지사 출장 다니면서 두 번 정도 따로 본 적이 있어.”

“넌 왜 그런 걸 형한테 말을 안 하냐?”

“안 했나?”

“정훈아.”

잠시 날 쳐다본 후, 다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정태였다.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아니? 왜?”

“왜 자꾸 나는 네가 내가 아는 내 동생, 정훈이가 아닌 거 같지?”

“…….”

“너 혹시 형한테 섭섭한 거 있냐?”

내가 하는 것들이 정태 놈을 제법 섭섭하게 만드는 모양이네.

자기 섭섭한 걸 에둘러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까.

“작년, 재작년은 너도 알겠지만, 형이 정신이 없었어. 승현이도 태어났고, 스너프 매입부터 사람들 들이는 일까지…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봐도 승현이 태어나기 전이랑 비교를 해서 집안일에 많이 소홀해졌던 것도 사실이야.”

“형수가 잘하더만.”

“요즘 내가 널 보면 좀 아슬아슬하다.”

가만히 보면 정태 이놈은 정훈이를 상대로 형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훈이를 완벽하게 컨트롤을 하려고 하는 거 같다.

내 눈에는 그런 게 명확하게 보이는데, 정훈이 놈 눈에도 그런 게 보였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하고 있다고 하던데?”

“정엽이 형이랑은 왜 연락을 하고 지내?”

“따로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까지는 아니야. 그냥 이번에 전화가 왔더라고. 그래서 회장님한테 직접 전화를 해서 말을 해라, 날 통하지 말고. 그렇게 말한 게 전부야.”

“지금도 그래. 집에서까지 아버지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 형이 예전부터 이상하단 생각은 했는데, 일부러 크게 신경은 안 썼거든? 그런데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거 지금 내 기분 탓이야?”

“그럴 리가 있어?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는 건데.”

“그 노력이 요즘 들어 나는 참 부담스럽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노력을 하지 말란 소리야?”

“…….”

“도대체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지? 망나니처럼 살지 말고, 이제 회사 생활도 시작했으니까 정신을 좀 차리라길래, 그러고 있는데 정신을 차려 볼 거라고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형은 또 그게 부담스럽다고 하고.”

다시 또 찻잔을 입술에 붙여 한 모금 마신 뒤, 그 잔을 내려놓으며 정태를 쳐다봤다.

정태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이 맞는다고 하고, 나도 정신 못 차리고 막 지낼 때보다 지금이 더 즐겁고 뭔가 하루하루를 알차게 쓰고 있는 거 같아서 보람이 느껴지고 그래. 좀 부담스럽더라도 좋은 쪽으로 변해 보려는 내 노력을 인정해 줘.”

“나도 보기가 좋아. 보기가 안 좋다는 말이 아냐. 그런데 변한 네 모습에서 변하기 전의 모습이 전혀 안 보여서 그래.”

“…….”

“네가 하고 있는 노력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게 아니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노력이 아닌 원래 네 모습인 거 같단 말이지. 하, 이거 참 말로 설명하기가 애매하네.”

“애매할 거 없어. 그냥 손정훈은 손정태와 다른 사람이다, 형제, 가족 관계를 떠나 다른 하나의 인격체다… 하는 것만 인정해 주면 되는 거지. 내가 봤을 땐 다른 사람들 다 그렇게 인정을 해 주고 있는데, 형만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

“…그런가?”

“형이 평생 날 책임져 주지는 못할 거 아냐.”

“당연한 거고,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인데 그걸 네가 그렇게 말을 해 버리니까 이거 왠지 모르게 섭섭하다, 인마.”

동생을 숨 막히게 만들었던 건 생각도 못 하고, 조금 직설적인 소릴 들었다고 자기 섭섭함부터 찾는다?

“나라도 이렇게 선을 그어야, 형이 집중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집중?”

“지금부터 형이 집중을 해야 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승현이고 형수지. 형이 그쪽으로 집중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나도 나중에 결혼해서 내 가정을 꾸리면 내 가정에만 집중을 할 수 있을 거 아냐. 결국 사람은 자기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형과 내가 형제로 태어난 건 우리 선택이 아니잖아. 반면에 형수, 그리고 승현이는 형의 선택이고. 앞으로는 형이 한 선택에만 집중을 해. 나는… 내가 알아서 최선을 다해 볼 테니까.”

서로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침묵을 깨뜨리며 정태가 약속을 받아 내듯 내가 말했다.

“정엽이 형하고는 엮이지 마라.”

“…….”

“아무리 지금 너하고 하늘이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고, 우리 스너프 쪽으로 미래금융의 투자가 크게 일어난 상황이라고 해도 이 부분은 내가 정확하게 해 줘야 할 거 같다. 언제 기회 봐서 하늘이한테도 이야기를 해 줘. 그동안 장 회장님이 정엽이 형네 쪽으로 많은 지원을 해 줬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잖아. 하늘이도 정엽이 형이랑 관계가 좋을 거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집안이랑 상관이 없을 때 말이고, 앞으로는 하늘이도 조심을 해야 해.”

정태 이놈이 이런 눈빛도 할 줄 아는구나.

“형이 몇 번이나 말했지? 큰집 그 인간들. 진짜 염치가 없는 인간들이야.”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정태 놈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이번에 너한테 할머니 제사에 자기 가족들 데리고 참석을 하겠다고 연락을 했다는 것도, 결국은 너랑 하늘이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니까 그 틈에 하늘이 통해서 너랑 어떻게 엮여 보겠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조심해. 어떻게든 우리한테서 뭐라도 빼먹겠다고 그 궁리만 하는 인간들이니까. 내가 왜 남 사장을 사람 취급 안 하는데?”

“…….”

“똑같은 인간이야. 고모랑 결혼해서 그 자리까지 힘들게 올라갔으면, 가족이라고 그 자리에 앉혀 준 사람한테 충성을 보여야지. 은혜는 여기에서 받고, 의리는 딴 데 가서 지켜? 결혼으로 신분 상승 한 사람들끼리 동병상련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더는 듣고 싶지가 않았다.

내 손주 놈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너무 큰 충격이었으니까.

“이래서 사람은 근본이 중요하다는 거야. 백모라는 인간이 자기 아들, 자기 남편 산소 인질 삼아서 이것저것 쏙쏙 다 빼먹는 거 옆에서 다 지켜봐 놓고, 중간에서 그러면 안 된다 우리 편을 들어 줘도 뭐 할 판에 박쥐처럼 우리 쪽으로 필요한 건 다 받아 가고 뒤로는 큰집 인간들을 챙겨? 나는 고모는 큰아버지 살아 계셨을 때 관계가 워낙 좋았다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남 사장이 우리 아버지 밑에서 일하면서 그러는 건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 왜 대답을 안 해?”

“무슨 대답?”

“정엽이 형이랑은 엮이지 말라고. 네가 주체적으로 살아 보겠다는 건 인정.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런 거랑은 별개로 하늘이 통해서 정엽이 형이랑 연락 주고받는 거, 그런 건 하지마. 그건 내가 인정 못 한다.”

바로 그때.

정원 저 끝 대문 쪽 계단 위로 정엽이의 모습이 올라오고 있었다.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 뒤로 데이빗의 손을 잡고 있는 안나의 모습도 함께 올라왔다.

“왔나 보네.”

찻잔을 내려놓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정태였다.

“저 애랑 여자도 본 적 있어?”

안나를 말하는 거겠지?

“한 번.”

정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 내려다보며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내가 한 말 흘려듣지 말고, 명심해. 내려가자.”

* * *

정엽이의 가족이 현관에 들어설 때에 맞춰 2층으로 각자의 찻잔을 들고 올라간 정태와 정훈이도 실내 계단을 통해 거실로 내려왔다.

정엽이는 고모와 고모부가 가장 앞에서 자신들을 반기는 모습에 습관적으로 얼굴에 가면을 썼다.

허허실실.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걸어 놓고 작은아버지 손홍준 회장의 모습을 찾았다.

고모부 뒤쪽에서 현관으로 다가오는 작은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주방 쪽에서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숙모님, 그리고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대충 닦아 놓고 그 앞치마를 급하게 벗고 있는 저 여자가 정태의 처 원수경이라는 여자겠지?

7년 만에 다시 만난 정태의 모습에는 현 재경 그룹 장남의 무게가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평상시와는 달리 선뜻 안나와 데이빗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있는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작은아버지와 숙모, 그리고 정태와 녀석의 처.

정훈이만이 정엽이를 향해 큰 용기 낸다고 수고했다는 식의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그래, 온다고 고생했다. 안으로 들어와.”

“네!”

작아지지 말자, 주눅 들지 말자.

환영을 바라고 찾아온 게 아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도리를 하기 위해 찾아온 건 더더욱 아니고.

정엽이는 자신이 이곳에 안나와 데이빗을 데리고 온 목적만을 생각하며 숙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숙모.”

“어후, 이게 누구야.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얼른 들어가자. 가족들 소개도 시켜 주고.”

“네.”

그리고 정태를 보며 눈이 감길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정태야.”

“그렇네. 한두 시간 거리도 아니고, 애까지 데리고 온다고 고생이 많았어.”

“애가 고생이지 어른이 고생인가.”

“안으로 들어와.”

정태는 정엽이 가족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비켜 준 다음, 아내 원수경에게 제사 음식 준비는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고 지금부터는 거실에 나와 있으라고 했다.

그 넓은 본가의 거실 소파 자리가 부족할 만큼, 온 가족이 모인 첫 자리.

느끼고 있는 불편함을 모두가 속으로만 삼키고 있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말은 할 줄 아는 거야?”

품에 데이빗을 안고 있는 안나를 보며 장혜란이 물었다.

그에 안나는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려서 “조금이요.”라는 어설픈 발음으로 한국말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보여 주었다.

정엽이는 특유의 허허실실로 자신이 꾸린 가정을 작은집 사람들에게 소개시켰고, 정태가 꾸린 가정을 소개받았다.

그러는 동안 정엽이는 한국으로 들어오기 며칠 전 정훈이와 했던 통화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직접 회장님한테 전화해서 이번 할머니 제사에 가족들 다 데리고 참석을 하겠다고 말을 해. 혹시 전화번호를 모르는 거야?

“번호야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지.”

―그럼 직접 하면 되지, 그걸 왜 날 통해?

“네가 할머니 기일엔 꼭 참석을 하라며. 나는 지금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걸 말하는 거야.”

―나는 진작부터 받아들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네가 말했던 부경호텔 지분 12퍼센트. 그거 지원해 줄 수 있는 거 확실한 거지?”

―확실해. 내가 약속했잖아. 나 믿으라고. 그렇게 되도록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마.

“앞으로 내가 해야 될 건?”

―그 지분 이야기는 한국에 들어와서 직접 꺼내?

“내가 직접?”

―내가 그 지분을 손정엽이 쪽으로 지원해 주란 말을 꺼내는 건 여러모로 보기가 이상하잖아. 이상하지 않겠어? 내가 내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 버리면 손정태가 가만히 있겠어, 그렇다고 현재 그 12퍼센트의 지분 주인이 그러라고 하겠어? 당연히 펄쩍들 뛰겠지.

“그러면?”

―직접 꺼내라니까? 그럼 내가 지지를 할게.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장난처럼 들려? 내가 말했지? 나만 믿으라고. 이런 일엔 내가 앞으로 나오는 거보다, 손정엽이가 앞으로 나오고 내가 뒤에서 반대하는 사람들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리는 게 제일 쉽고 빠른 길이야.

“…….”

―내가 그때 조건들 다 말해 줬잖아. 5년 뒤에 손정엽이가 호텔 사업을 업계 1위로 만들어 내면 12퍼센트 지분을 손정엽이에게 던지겠단 내용만 빼고 내가 던졌던 조건들로 회장님을 설득시켜. 그럼 옆에서 내가 흔들어 줄게.

그 통화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려 놓고 정엽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걸어 놓은 채 작은집 사람들을 상대해 나갔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숙모의 물음에 정엽이는 준비해 온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작은 투자 회사 하나 운영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투자 회사?”

손 회장을 시작으로 정태, 장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손여정과 남필우 사장까지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존재에 대해선 장태산 회장과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다.

고모와 고모부에게도 밝히지 말라고 했던 장태산 회장.

혹여나 해당 내용이 고모부를 통해 작은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셨다.

그랬기에 정엽이는 그 존재를 밝혀낸 정훈이가 놀라웠던 거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손 회장은 정엽이가 건넨 명함을 실눈을 뜨고 천천히 확인했다.

“이름만 거창합니다. 실상은 그냥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고요.”

“그거 나도 하나 줘 봐.”

정태가 손을 뻗으며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했다.

그에 정엽이는 민망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명함을 쑥스럽게 정태 쪽으로 내밀었다.

그런 정엽이에게 정태가 물었다.

“언제 차렸어?”

“차린 지는 꽤 됐어. 내년이면 벌써 이십 년 차야.”

“뭐, 이, 이십 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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