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거든 (165/303)

나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거든

자리가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힘들어했다.

승현이는 칭얼거림으로 우유를 찾았고, 안나의 품에서 데이빗은 점점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런 데이빗의 상태를 눈치챈 정훈이가 정엽이와 안나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손 회장의 양해를 구했다.

“애라서 그런지 시차 적응이 힘든가 봐. 애 잠 오는 거 같은데 데이빗은 데리고 들어가서 재워야겠다.”

자신의 이름에 잠시 반응을 했지만, 데이빗은 이내 엄마의 품을 더 깊게 파고들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손 회장이 말했다.

“그렇게 해라. 수경아.”

“네, 아버님.”

“네가 방 하나 안내해 줘. 정훈이 쓰던 방으로 데리고 가면 되겠네.”

“네.”

그 순간 원수경의 입에서 꽤 유창한 불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엽이와 안나가 동시에 놀랄 정도로 매끄러운 발음이었다.

“나 따라와요. 내가 안내해 줄게요.”

안나가 원수경의 안내를 받아 데이빗을 재우러 간 사이 승현이를 건네받은 장혜란은 손자를 안고 주방으로 들어가 분유를 타 왔다.

그렇게 자리엔 손 회장과 손여정, 남필우 사장, 그리고 재경의 3세대만 남게 되었다.

“한국엔 얼마나 있다가 들어가는 거야?”

손 회장이 물었다.

“아직 정확한 날짜는 못 잡았어요. 저도 코로나다 뭐다 해서 꼬박 2년 반 만에 들어온 거거든요. 사업차 만나 봐야 할 사람들도 많고, 이것저것 해결해야 할 일들도 있어서 상황 봐 가며 들어갈 생각이에요.”

손 회장은 정엽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형님을 보고 있었다.

생글거리는 표정부터 능글거리는 말투, 손짓까지….

생긴 것부터 기질까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자기 아버지를 닮아 있을 줄이야.

“아 참, 작은아버지.”

“어.”

큰일이 아니라는 듯, 데이빗에게 주겠다고 준비해 놓았던 비스킷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린 뒤 정엽이가 말했다.

“다음 주 중에 하루 정도 저한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세요?”

“다음 주?”

“네, 주말엔 작은아버지도 쉬셔야 할 거 아니에요. 저야 언제든 상관없지만 작은아버지는 바쁘신 분이잖아요.”

그 순간 정태의 이마 근처 핏줄들이 날카롭게 서기 시작했고, 남 사장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건 정태뿐만이 아니었다.

승현이를 안고 있는 장혜란의 표정도 눈에 띄게 불편해져 있었다.

“바쁘고 안 바쁘고를 떠나서… 왜? 나한테 따로 무슨 할 말 있어?”

“할 이야기야 많죠. 그간 소원했던 시간이 얼만데.”

“그러자고 오늘 가족들 다 데리고 온 거 아니냐. 오늘 같은 이런 자리에서 하면 되는 거지.”

상대가 보여 주는 명백한 거리 두기에도 정엽이는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제삿날 가족들 다 모인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엔 조금 민망한 내용이 될 거 같아서요.”

기다렸다는 듯 정태가 말했다.

“그럼 그렇지. 필요한 게 없으면 찾아올 이유도 없지.”

정태가 꺼낸 그 한머디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일제히 굳어졌다.

다들 왜 그렇게 잘하지도 못하는 연기들을 하느냐는 식으로 정태가 말했다.

“제가 어디 틀린 말 했어요? 제 말이 맞잖아요. 20년 넘게 명절, 할머니, 할아버지 제삿날 얼굴 한번 안 내비친 사람이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할머니 제삿날이라고 찾아왔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

“그리고 형.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가급적이면 하지 마. 하는 사람이 민망할 거라는 걸 안다면, 그게 언제든 안 꺼내는 게 좋지 않겠어?”

손 회장의 엄한 눈빛이 정태에 닿았고, 그에 정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린 채 코로 뜨거운 숨을 뽑아냈다.

정태가 그러거나 말거나, 정엽이의 표정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엽이의 단단함을 읽어 가며 손 회장이 물었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가족들 다 데리고 왔는데 회사로 찾아오는 건 네가 불편하지 않겠어?”

“아버지.”

정태는 무엇 하러 상대를 해 주려고 하냐며 정색을 했지만, 다시 한번 아버지가 보내는 엄한 눈빛에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그리고 정엽이는 거실의 분위기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일정을 잡을 때부터, 사업적 일정이 많을 거 같아 미리 말씀을 드렸더니 태산이 할아버지가 따로 사람을 한 명 붙여 주셨어요. 와이프하고 아이는 따로 옆에서 챙겨 줄 사람이 있어 크게 문제 될 거 같지는 않고, 저는 어디로 찾아가든 작은아버지 편하실 때, 편하신 곳이 찾아가는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손 회장 역시 난처했다.

틀림없이 뭔가 부탁을 하겠다고 다른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소리일 테지?

자리에 동생 손여정, 그리고 남 사장이 없다면 모를까, 20년 넘게 만에 만난 조카가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 요청하는 자리를 딱딱하게 거절할 명분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

“그럼 일요일 저녁은 어떻겠어?”

아버지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회사에서 보는 거보다는 편하게 밖에서 보는 게 좋지 싶은데?”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럼 일요일 저녁으로 할까요?”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일요일 저녁으로 해서 제가 괜찮은 식당을 알아보겠습니다.”

“식당은 무슨. 그냥 집으로 오면 되지.”

“에이, 괜히 또 집에 사람 온다고 하면 숙모님 피곤하세요. 자리만 괜히 길어지고. 편하게 그냥 제가 밖에서 작은아버지 식사 한번 대접하는 자리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 * *

제사를 끝내고 가진 식사 자리는 다른 제삿날과 달리 무척 빨리 끝이 났다.

손 회장이 제사용 정종 말고는 따로 다른 술병을 뜯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손 회장의 행동을 남 사장이나 정태가 눈치를 못 챌 리 없었다.

“이름이 안나라고 했지?”

정엽이의 옆에 앉아, 힘들게 젓가락을 움직이는 안나를 쳐다보며 손 회장이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정엽이가 대신 대답을 했다.

“네, 작은아버지.”

“음식도 입에 안 맞고, 시간도 늦었는데 힘들겠다.”

“아니에요. 파리에서도 1년에 한 번이지만 아버지 제사는 지내는데요, 뭘.”

“그래도. 어제 한국 들어와서 아직 시차 적응도 제대로 안 됐을 건데, 거기다 이런 자리도 처음일 테고. 많이 불편할 거다. 앞으로 꾸준히 이런 자리 함께하면서 얼굴 익히고 하면 되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자리 정리를 하자. 정태 너도 수경이하고 같이 승현이 데리고 얼른 집에 가.”

“네, 아버지.”

밤늦게 시작된 식사 자리를 정리하고 모두가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여정이하고 남 서방은 나하고 같이 차 한잔하고 그렇게 가.”

남필우는 현재 회장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낸 손 회장은 남 사장만 데리고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문 손 회장을 마주 보고 앉은 남 사장.

“야, 남 서방.”

“네.”

“이건 뭐야?”

손 회장은 테이블 위로 정엽이에게 받았던 명함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남 사장도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표정 그건 뭐야? 설마 자네도 그동안 전혀 몰랐다는 거야?”

“몰랐습니다.”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아님… 앞으로 미래금융을 조심하라는 거야?”

“…….”

“아, 그렇잖아. 정엽이 말대로 하자면, 이 회사 이게 20년이 된 회사라며? 이걸 정엽이가 만들었겠어, 아님 형수가 만들었겠어? 자기들끼리 만들었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런 회사가 어떻게 20년이나 유지가 돼? 틀림없이 뒤에서 장 회장님, 미래금융이 회사 운영을 맡아 왔단 말밖에 더 되냐는 거야.”

“그렇다고 보는 수밖에는 없긴 합니다.”

“그렇다고 보는 수밖에는 없긴 해? 지금 그게 자네가 나한테 할 말이야?”

“…….”

남 사장은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아니, 그동안 도대체 뭐했어? 그렇게 장 회장님네 뻔질나게 드나들고, 주기적으로 정엽이 만나 왔으면서 이런 내용 하나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저도 지금 회장님 앞에서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져 버렸는데, 진짜 몰랐던 내용입니다. 제가 그걸 다 알고도 회장님께 따로 보고를 안 올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동안 이런 거 하나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도대체 뭐 했냐고.”

“…….”

“장 회장님이 또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네. 정엽이가 자기 입으로 이렇게 밝히는 걸로 봐선 더 이상 숨길 마음은 없다는 걸 테니까, 자네가 장 회장님을 통하든, 정엽이한테 직접 물어보든 이 회사 정보 좀 구해 봐.”

“네.”

“그리고 정엽이가 이번에 한국에 왜 들어왔는지까지. 이런 거까지 보여 주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하는데, 할머니 제삿날이라고 찾아온 건 아니란 소리잖아.”

“네.”

“X놈 새끼. 뒤늦게 철들어서 자기 할 도리를 찾아온 건가 내심 기특해 해줬더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집안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살길만 생각한다 이거지? 빨리 좀 알아봐. 나도 뭘 좀 알고 일요일에 정엽이 놈을 만나야 대비를 할 거 아냐.”

“…네.”

“남 서방.”

“네, 회장님.”

“아니, 남 서방.”

“네, 형님.”

“나 외롭다.”

“…….”

“자네까지 나 외롭게 만들지 마. 내가 그동안 자네 입장 배려 많이 해 줬잖아.”

“이건 정말 저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형님.”

“알아. 그렇겠지, 아니 그래야지. 자네가 이렇게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내가 지금 외로워. 꼭 나 혼자 싸우고 있는 기분이야. 이 세상이랑.”

“…….”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역할을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까지 봐야 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아닙니다, 형님. 왜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라는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아닌 게 될 수 있도록 날 좀 도와 달란 말이야, 이 사람아. 정식으로 한번 붙어 보라고 아들놈들 싸움까지 붙여 놓은 내가 지금 자네 말고 이런 소릴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 * *

집으로 향하는 동안 원수경은 아무런 말도 못 꺼내고 정태의 심기만 살폈다.

자고 있는 승현이를 대신 받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고 있는 아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전자 담배를 뻐끔거리기 시작한 남편.

“당신 괜찮아?”

평소 같았음 승현이가 옆에 있는데 무슨 담배냐고 신경질을 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원수경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었나?”

“무슨 말?”

대답을 해 놓고도 원수경은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인간 유형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주제 파악 못 하는 인간들?”

“아니.”

“그럼?”

“염치없는 인간들.”

“…….”

“내가 그런 인간 유형들을 정말 극혐해. 그런 인간들은 상대가 조금만 틈을 보여 주잖아? 그럼 그 틈을 기회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 내가 그런 인간들을 곁에 두고 싶겠냐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데.”

“오늘 왔던 당신 사촌 형 이야기하는 거야?”

그 물음에 정태는 원수경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그게 누구라도.”라고 대답했다.

“…….”

그리고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려, 운전석에 대고 말했다.

“차 실장님.”

“네, 사장님.”

“내일 집안 잔치가 있어서 광주에 내려가 보셔야 한다고 했죠?”

“네, 큰 행사는 아니고 아버지 칠순이라 가족들 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거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죠? 급하게 좀 알아봐 주셔야 할 게 생겼는데.”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수행 비서 쪽으로 정엽이에게 받은 명함을 내미는 정태였다.

수행 비서는 운전을 하면서 얼른 한 손으로 그 명함을 건네받았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그걸 털어 봐야겠어요.”

“급하신 내용입니까?”

좌석에 등을 기대며 정태가 대답했다.

“급한 거니까 내가 차 실장한테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한 거 아니겠어요?”

잠시간 흐른 정적.

그 정적 속에서 원수경은 억지로라도 숨을 삼켜야만 할 것 같은 질식감을 느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 보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오후까지는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뭐 하는 곳인지 내가 정확하게 알아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확인한 정태는 그제야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100만 원권 수표 5장을 뽑아 운전석 변속 기어 옆 컵 홀더 속으로 끼워 넣었다.

“차 실장님 아버님 칠순이신데, 내가 딱히 해 드릴 건 없고 용돈하시라고 보내 드리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고맙긴요. 나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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