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아예 들어올 생각이야?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설립 일자는 2004년으로 나와 있고, 2008년에 ‘드 누락’이라는 호텔 체인을 인수, 현재는 ‘쁘띠 기뿔리’라는 베이커리 브랜드와 ‘코 앤 씨’라는 스파 에스테틱 제품 브랜드의 최대 주주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정태의 한쪽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년이면 20년이라고 하더니, 상장 20년을 말했던 건가?
“방금 말한 호텔 체인 ‘드 누락’의 사업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차 실장은 급하게 서류를 뒤로 넘겨 놓고 그에 해당하는 자료를 찾았다.
“프랑스 전역에 다섯 곳, 알자스 쪽에 한 곳 이렇게 총 6개 업장을 운영 중인데, 객실 200개 이하의 4성급 호텔 등급이 대부분입니다. 프랑스 로컬 브랜드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체인 인수 후 2014년에 새로 올린 ‘드 누락 알자스’ 같은 경우는 객실 350개 규모의 5성급 호텔이고, 스트라스부흐 유일의 특급 호텔인 걸로 나왔습니다.”
그 말에 정태는 다시 한번 어이없는 웃음을 토해 내며 목 근육을 풀었다.
“이야, 참… 남의 돈 야금야금 빼 가서 자기들끼리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었구만. 다른 특이 사항은요?”
“여기까지는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기본적인 업력 자료이고, 예민한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예민한 부분?”
“부경호텔의 지분 11퍼센트를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들고 있는 걸로 나와있습니다.”
정태는 순간 이명이 들리는 착각을 느꼈다.
오른쪽 귀가 잠시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이내 삐잉… 하고 이명이 일기 시작했다.
“뭐라고요? 어디 지분을 얼마나 들고 있다고?”
차 실장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빠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부경호텔의 지분 11퍼센트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왜? 아니, 어떻게?”
차 실장은 정태를 거의 2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중이다.
차가움과 깔끔함, 그리고 약간의 소시오패스적인 기질은 있지만 그런 기질을 적당히 눌러 줄 수 있을 만큼의 신사적인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는 인물.
그만큼 차 실장에게 손정태 사장이라는 인물은 가장 측근에서 그를 모시는 자신에게조차 자기 관리, 이미지 관리를 철저하게 지켜 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허용하지 않는 선만 넘지 않는다면, 모시기에 무척 수월한 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난 2년간 그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셔 왔던 차 실장조차 낯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두 눈을 수차례나 끔뻑거리며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절대 없지 않냐는 듯, 마치 자신이 잘못 조사를 했다고 말을 해 주길 바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은 호텔 체인 하나 인수한 거 정도야 백번 양보를 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쳐. 우리 집에서 뜯어 간 돈이 얼만데. 객실 350개짜리 호텔을 올린 거? 그거도… 그래, 그것도 그럴 수 있어. 투자사들 하는 게 돈놀이인데, 여기저기에서 돈 끌어오고, 영끌해서 회사 통째 담보 잡히고, 새로 올라갈 건물 잡혀서 대출 일으키면 전혀 불가능한 말은 아니야. 그런데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는 너무 간 거 아닌가?”
차 실장은 현재 사장님이 자신을 상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이건 혼잣말이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내용들을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쏟아 내고 있는 중.
“차 실장님.”
“네, 사장님.”
“나는 이해가 아예 안 되는데요? 차 실장님이 해 온 조사대로 하자면 5성급 하나 포함해서 호텔만 6개야. 그죠?”
“…네.”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어요? 베이커리하고 스파 브랜드에도 최대 주주사로 올라가 있다면서요?”
“네.”
“둘 다 난 처음 들어 보는 브랜드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최대 주주사로 올라가 있다는 말은 그쪽에선 상장이 되어 있는 기업이란 소리잖아. 안 그래요?”
“네. 코 앤 씨 스파 같은 경우는 작년 매출 기준으로 40밀리언 유로를 올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 정도 매출 규모면 작은 기업은 아니죠.”
“거기다 어떻게 부경호텔 지분 11퍼센트까지 확보를 하고 있을 수 있냐고요, 내 말은.”
“지분 확보 시기가 절묘하긴 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태의 모습에, 차 실장은 더 이상 그의 기분을 살피며 보고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 했는데요?”
“무혐의 처분이 떨어지긴 했지만, 2011년에 부경호텔 차녀 박지현 씨가 마약 복용, 유통 혐의로 기소된 상태에서 부경호텔 주가가 크게 떨어진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3퍼센트 매입을 시작으로….”
“아니이이….”
정태가 포인트를 왜 그렇게 못 집어내느냐는 듯 짜증 섞인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1퍼센트고 3퍼센트고 간에, 그럼 더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부경호텔이 어디 모텔이에요? 관광호텔이냐고. 2011년에 부경호텔 지분 3퍼센트를 쓸어 가 놓고 단 3년 만에 객실 350개짜리 호텔을 지어 올려?”
그 말을 던지고 나니 정태의 눈앞으로 엉망이 된 퍼즐판을 한 번에 맞출 수 있는 퍼즐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지분 구조는 어떻게 돼요?”
“그곳 대표로 등록되어 있는 마뉴엘 엠흐 앞으로….”
“아니, 아니, 아니. 허, 허, X발… 잠깐만. 그 지분 구조 속에 혹시 한국 투자사 지분은 없던가요?”
“……?”
“있어야 돼요.”
“있어야 된다는 게 무슨….”
“투자사 이름이 미래금융으로 안 되어 있더라도, 그쪽에서 흘러나온 자금이 담길 만한 투자사가 반드시 최소 한두 개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요.”
“이게 한국 투자사인지는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정확하게 파악을 못 했는데,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지분 8.4퍼센트, 7.6퍼센트를 각각 잡고 있는 ‘제콤’이라는 업체, ‘레이밤’이라는 업체가 있기는 합니다.”
“히야, 기가 막히네. 그동안 우리 집에서 긁어 간 돈 가지고 자기들끼리 투자깡을 하고 있었다?”
“투자깡이요?”
“방금 말한 업체 두 개 있죠?”
“네. 제콤, 그리고 레이밤.”
“이름 같은 건 관심 없어요. 결국은 투자깡 일으키는 페이퍼 컴퍼니일 테니까. 그 두 개 다 동시에 털어 봐요. 틀림없이 미래금융이랑 상관이 있는 업체들일 테니. 허, 허허허허. 크크크큭… 하는 짓들 진짜, 미치겠네. 왜 이렇게 귀엽지들?”
* * *
“숙모님하고 같이 오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런 자리가 불편할 거 같아, 집으로 오라는 데도 밖에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니냐.”
고모부를 통해 작은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메뉴를 알아봤고, 그중에서도 즐겨 찾으시는 식당으로 예약을 했다.
복요리 전문점이었다.
룸으로 들어오는 작은아버지를 맞으며, 정엽이는 안내 직원에게 세팅된 자리 하나는 빼는 게 좋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정엽이가 만든 오늘 식사 자리에 나오기 전, 손 회장은 남필우 사장을 통해 드모어 인베스트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전해 들었다.
“하고 있는 사업이 작지가 않더라.”
손 회장이 먼저 시작했다.
그에 정엽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솔직하게 말했다.
“운이 몇 번 따랐어요.”
“네 고모부 통해서 회사 정보를 좀 알아봤다. 장 회장님한테 직접 물어본 내용들이라고 하니, 내가 네 고모부 시켜서 드모어에 관해 알아본 건 다 알고 있을 테고.”
“네.”
“그러라고 제삿날 명함을 주고 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한 게 맞아?”
“그렇게 복잡한 생각까지 하면서 드렸던 건 아니었어요. 확인을 해 보실 거 같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요.”
여러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고 자리에 나온 손 회장이었다.
부경호텔의 11퍼센트 지분을 잡고 있는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정작 지금 손 회장이 불편한 내용은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부경호텔의 지분 11퍼센트를 잡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 있게끔 판을 짠 상대가 다름 아닌 미래금융이라는 것이고, 지금 재경은 그런 미래금융과 사돈 관계로 발전 중에 있다는 거다.
손 회장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형수와 조카를 프랑스로 보낸 건 손 회장 자신이었지만, 정작 자신 몰래 프랑스에서 정엽이를 뒤로 숨겨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키워 낸 건 미래금융, 즉 장태산 회장이다.
과연 이걸 껄끄럽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님 각자의 입장과 가고자 하는 방향이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달랐기에 충분히 인정을 해 줘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정훈이와 하늘이의 혼사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았다면 껄끄러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각자도생.
결국은 각자의 입맛대로, 취향대로, 그리고 능력대로 펼쳐 나가는 게 사업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케케묵은 옛 감정들을 들춰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다시 한번 이런 식으로 장태산 어르신께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생각에 손 회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렇게 뒤에서 정엽이를 키워 놓고,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혼사 이야기를 꺼낸다?
손 회장은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접어 두고, 자신을 상대하고자 자리를 마련한 정엽이를 차분하게 지켜봤다.
“부경호텔 정도 되는 규모의 회사. 그 회사의 지분을 11퍼센트나 잡고 있는 해외 투자사.”
잠시 말을 끊어 놓고, 물수건을 들어 손등을 닦기 시작하는 손 회장이었다.
양쪽 손을 번갈아 닦아 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직접 경영에 참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주주 중 하나로 꼽히는 우리 재경에서 우리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투자사가 정엽이 네 회사라는 걸 몰랐다는 게 참 기가 막힌다.”
“부경호텔 쪽에서도 드모어의 대표가 제 장인인 마뉴엘 엠흐라는 정도, 그리고 드모어가 하고 있는 투자의 종목 정도만 알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결국 오늘 이 자리는 그쪽에 관련된 부탁을 하겠다고 만든 자릴 거고.”
“아니요.”
차마 조카를 상대로 이런 비웃음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방심하는 사이, 그리고 부탁을 위한 자리라는 걸 뻔히 다 알고 나왔음에도 그걸 부정하는 정엽이의 모습에 비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
손 회장은 얼른 물컵을 입술에 붙여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작은아버지.”
정엽이에게도 지금 이 자리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묻어 버려야 되는 지난 세월들.
그럼에도 반드시 알고 싶었던 당시 서로의 입장 차이.
그런 것들을 잠시 뒤로하고 작은아버지, 작은집 사람들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자신의 진심.
“사업 관련해서 부탁을 드릴 거였음 여우처럼 자리를 만들었을 겁니다.”
“여우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사업에 관한 부탁을 드리게 되면, 오늘 자리를 마련한 게 너무 노골적인 게 되는 거잖아요.”
나는 정확한 사람이다, 나는 분명한 사람이다….
정엽이는 그렇게 속으로 되새기며, 지금부터 자신이 작은아버지를 상대로 꺼내려는 말에 용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넘었습니다. 부경호텔의 경영권을 가져 와야겠다는 하기 시작한게요.”
“…….”
“처음 부경호텔의 지분 3퍼센트를 매입했을 때가 2011년이었거든요. 만약 제가 부경호텔의 경영권을 가져오는 데 작은아버지와 재경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면 아마 진작에 찾아뵙고 도움을 부탁드렸을 겁니다. 물론 제가 부탁을 한다고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정엽이의 미소 속에 담겨 있는 씁쓸함을 읽어 낸 손 회장.
“큰 도전이 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도움에 의지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혹시라도 제가 그럴 거라 오해하시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오늘 이 자리는 정말 편하게 같이 식사나 하자는 뜻으로 만든 자린 거네?”
정엽이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돌려드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고요.”
“돌려줘? 뭘?”
“그동안 제 어머니가 작은아버지 상대로 어거지 비슷하게 받아 낸 것들이요.”
손 회장의 눈이 빠른 속도로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보다 작은아버지가 더 잘 아실 거잖아요. 저는 그저 제 어머니가 작은아버지, 작은집을 상대로 그렇게 억지를 부리셨을 거다… 하는 식의 짐작만 하고 있는 거지, 어떤 어거지를 어떻게 부리셨는지까지는… 몰라요.”
“…….”
“항상 마음의 짐처럼 품고 살았어요. 내가 지금 누리며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요. 어렸을 땐 몰랐죠. 그저 어머니가 술만 마시면 작은아버지, 작은집 욕을 하니까 당연히 어머니가 피해자인 줄만 알았죠. 그래서 말 한마디 제대로 안 통하는 파리에서, 물론 주위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절 키우며 외롭게 지내시는 어머니가 참 불쌍하고 애틋했어요.”
정엽이의 시선은 손 회장의 셔츠 단추에 머물러 있었다.
작은아버지 앞에서 자기가 한 잘못도 아닌 일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겠더라고요. 어머니가 저렇게 혼자 아들 하나 데리고 외국으로 쫓겨나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 건 결국 어머니 욕심 때문이었다는 걸요.”
손 회장도 크게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불처럼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진짜 불쌍하고 애틋하게 여겨야 되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
“제가 선택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작은아버지.”
손 회장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아들로, 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제 선택이 아니었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 상대로 제 몫의 재산을 요구했던 것도 제가 아니었어요. 그러기엔 그때의 전 너무 어렸잖아요.”
그제야 눈을 뜬 손 회장은 턱을 달달달 떨고 있는 조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부글거리며 끓던 가슴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들어찬 기분이었다.
“손정엽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데미안으로 살아가는 것도 제 선택이 아니었고, 작은아버지가 주신 제 몫의 재산으로 어머니가 태산이 할아버지와 함께 드모어를 차린 것도 제 선택이 아니었어요. 심지어 그 투자 회사로 호텔 체인을 사들이고, 앞으로 부경호텔의 경영권을 제 앞으로 돌려놓겠다던 것도 그 당시 제 어머니의 결정이고 선택이었지 제 선택은 아니었죠.”
“…….”
“그렇게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뭐 하나 제 인생을 제 선택대로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물 한 모금.
그리고 잠시 이어진 침묵.
그 속에서 격하게 올라온 감정을 적당히 눌러 놓고, 다시 차분해진 음성으로 정엽이가 말했다.
“앞으로는 제 인생, 누군가의 손자, 아들이 아닌, 데미안이라는 이름이 아닌 그저 저 손정엽으로 살고 싶어요. 제가 그렇게 사는 게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많이 고민해 봤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 제 어머니가 작은아버지께 했던 무례와 몰염치. 그걸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릴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신 제 어머니가 했던 행동들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은 항상 가지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 통해 제 어머니가 받아 와 제가 누렸던 것들에 대해….”
정엽이는 마침내 작은아버지의 두 눈을 제대로 쳐다보며 싱긋이 웃었다.
“지금 당장은 제가 여력이 없어서 바로 다 돌려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열심히 살아서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속에 담아 놓고 살았던 진심들을 속 시원하게 쏟아 낸 것 같아 후련했다.
“너무 늦게 용기 내서 죄송해요, 작은아버지. 사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용기를 내는 거보다, 그냥 모르는 척 얼렁뚱땅 넘어가는 삶이 더 쉽기도 했고요. 그런데도… 계속 마음이 불편한 건, 결국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는 내용이라는 걸 제가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겠죠."
“그럼… 크흠….”
힘겹게 입을 연 손 회장은 갑자기 갈라지는 자신의 음성을 헛기침 몇 번으로 바로잡은 뒤 정엽이에게 물었다.
“크흠, 큼. 그럼 앞으로 한국에 아예 들어올 생각이야?”
“지금부터라도 진짜 제 인생을 살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할 거 같아요.”
“처자식 생각을 전혀 안 할 수가 없을 텐데, 안나, 데이빗이 적응을 잘하겠어?”
“데이빗에겐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는 거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처음 적응할 때엔 당연히 힘든 점이 많겠지만, 잘 이겨 낼 겁니다. 그리고 파리엔 외가가 있으니까 언제든 엄마 손 잡고 가면 되는 거고요.”
“안나는?”
“어차피 현재 드모어의 메인 비즈니스는 모두 프랑스에 있으니까요. 안나가 관리를 해야죠. 그리고 안나 역시 그동안 저랑 알고 지내고 결혼해서 같이 살면서 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보니 응원을 해 주고 있는 중이에요.”
“하… 쩝.”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허허실실 환하게 웃으며 정엽이가 말했다.
“너무 늦긴 했지만, 작은아버지하고 같이 꼭 이런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제 주위에 많은 어른이 있었지만, 결국 제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진짜 남자 어른은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작은아버지. 그렇게 세 분만이 진짜 남자 어른이었거든요.”
다시 한번 얕은 한숨을 내쉰 후 손 회장이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다.
“그래서 식사는 언제 들어오냐? 네가 기다리라고 한 거야?”
“네. 지금 넣어 달라고 할까요?”
“술도 한 병 시키고.”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