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고처럼 들리는 거 같아서 (169/303)

경고처럼 들리는 거 같아서

“하늘아, 여기.”

“어, 오빠.”

미래기획 사옥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

그곳에 있는 작은 커피숍 안으로 하늘이가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갑작스럽게 잡은 정태는 상대가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통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안 추워?”

“오늘이 추워? 이제 완전 봄 날씬데?”

재킷도 걸치지 않고, 블라우스 위로 얇은 니트 하나만 덧입고 자리에 나온 하늘이의 모습에 정태는 약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하늘이는 전혀 추위를 못 느끼겠다는 듯, 깜빡하고 벗지 않은 사원증 목걸이를 벗어 바지 주머니 안으로 챙겨 넣었다.

“언제 왔어?”

“금방.”

“뭐라도 좀 시켜서 마시고 있지. 뭐 마실래?”

“그냥 앉아 있어. 내가 사 올게. 넌 뭐 마실래?”

“어떻게 그래?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직접 오셨는데, 커피 정도는 내가 사야지.”

“앉아 있으라니까. 내가 갔다 올게.”

“나 여기 포인트 카드 있는 사람이야. 오빠는 그런 거 없잖아. 그냥 앉아 계세요.”

하늘이가 커피를 주문하고 오는 동안 정태는 시선을 통유리창 밖으로 돌려, 7층짜리 낮은 미래기획 사옥을 바라봤다.

커피 두 잔이 올려진 플라스틱 쟁반.

정태의 커피는 머그 컵에, 하늘이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일회용 플라스틱 잔에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자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나오긴 힘들겠지만, 기획 투자사에서 팀장 일을 하는 동안 생겨 버린 하늘이의 버릇.

언제든 급한 콜이 들어오면 바로 커피를 들고 뛰어나가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오빠가 사업적으로 나랑 의논할 내용이 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정태는 소파 옆으로 챙겨 놨던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서류 봉투엔 ‘스너프’의 로고가 깔끔하게 새겨져 있었다.

내용물을 대수롭지 않게 꺼낸 하늘이는 그 안에 든 서류철 첫 장에 들어간 기획명을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스너프 오리지널 웹 콘텐츠의 영상화?”

망설임 없이 다음 장을 넘겨 기획의 개요를 확인하는 하늘이의 모습에, 정태는 충분한 시간을 줘야겠단 생각으로 말없이 커피 잔만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시 다음 장으로 넘기며, 상대의 얼굴은 쳐다도 보지 않고 오로지 기획안에 집중을 한 채 하늘이가 물었다.

“이미 스너프 자체 오리지널 작품 중에 영상화 계약을 끝낸 작품들이 꽤 되지 않아?”

“많은 건 아니고, 조금씩 되고 있는 거 같긴 하던데 여기에서 우리가 영상화 쪽으로 푸시를 좀 해 주면 앞으로 길이 시원하게 뚫릴 거 같달까?”

“푸시라면 어떤 푸시를 말하는 거야?”

“불필요한 중간 과정이 생략될 수 있게끔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는 거지.”

기획안의 마지막 장까지 확인을 끝낸 후, 하늘이는 이 기획안을 자기가 따로 챙겨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태는 가져가서 꼼꼼하게 확인을 해 달라는 뜻으로 챙겨 왔다며, 대외비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이니 조심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처음 영상화 계약을 한 작품이 벌써 1년이 넘어. 그런데도 아직 각색 작가를 못 구했다고 해.”

순간 정태는 자신을 쳐다보는 하늘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왜 그렇게 봐?”

“그런 걸 오빠가 직접 다 챙기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왜?”

“아냐, 그냥… 대단하다 싶어서.”

“뭐가?”

“스너프. 투자사들 사이에선 거의 토네이도급 돌풍이라는 말이 나돌아. 무리도 아니지. 그 짧은 시간 안에 커머스 쪽 시장 점유율 2위, 그런데 작년에 부경쇼핑의 절반을 끌어안았어. 커머스 쪽 시장 점유율 톱을 찍는 건 시간문제라는 게 금융권에 돌고 있는 정설이고. 동시에 스크린 골프장 프로젝트도 빠르게 진행을 시키고 있고.”

하늘이는 진심으로 그간 움츠려 있었던 재경가의 저력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손정태라는 사람이 재벌가 사이에서 어떠한 평판을 받아 오고 있었는지, 그간 정훈이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미 스너프 자체가 하나의 그룹화라는 말이 나돌아. 내가 봐도 그렇고. 항공을 중심으로 일으킨 쇼핑 기반의 커머스. 우리 미래금융과 합작한 핀테크, 거기에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오프라인 쇼핑, 준비 중인 스크린 골프장 사업에 지금 이 웹 콘텐츠 사업 분야까지. 이쯤 되면 오빠는 의장으로 타이틀을 바꾸고, 사업 부문별로 분야별 전문 경영인들을 대표로 한 명씩 스카우트해야 하는 거 아냐?”

그 말에 정태는 그저 싱긋이 웃어 주기만 했다.

“그렇게 굵직하게 챙겨야 할 게 많은 사람이 일개 기획 투자사 팀장한테 이런 기획안을 보여 주겠다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게 만들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말이지.”

“우선 너는 그냥 아무 기획 투자사의 팀장이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가져온 건 그저 이런 기획안이 아냐.”

“나 설마 지금 말실수한 건가?”

“으으음, 말실수는 무슨. 그만큼 우리 스너프 자체적으로 웹 콘텐츠 사업부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말이야.”

하늘이는 정태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신경을 써도 될 만한 분야임이 틀림없다.

“처음 영상화 계약을 한 작품이 1년이 넘었다고?”

“넘었어. 우리 쪽에서 웹 콘텐츠 사업부 출범시키고 업계 최고 대우를 해 주면서 타 플랫폼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을 대거 데리고 왔거든. 그중 한 명이 연재한 작품인데, 사실상 그 작품이 스너프 웹 콘텐츠 사업부의 초석을 깔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래서 나도 가급적이면 우리가 직접 투자를 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영상화를 시키고 싶고. 이런 게 하나 크게 터져 주고 하면, 작가 유입도 활발해지고, 동시에 독자 풀도 넓어져서 플랫폼 입장에선 든든하거든. 근데 이놈들이 잘 한번 만들어 보겠다면서 판권을 사 가 놓고, 아직까지 각색 작가도 못 구했다고 하잖아.”

“사장님이 직접 이렇게 안달을 낼 정도라면, 스너프에서 웹 콘텐츠 사업 쪽으로 거는 기대가 크긴 큰 모양이야?”

“결국 우린 얼마나 잠재 수익성이 높은 트래픽을 어떻게 잘 만들어 내느냐가 사업 부문 불문하고 키 포인트인 기업이니까. 웹 콘텐츠 이쪽이 현재 우리 스너프 안에선 해외 신규 유저들을 유입시키기엔 가장 최적화된 사업부거든. 당연히 집중을 해야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한 하늘이었다.

만약 정훈이가 저 자리에 앉아 있다면, 재경 그룹 안에서 가장 사업성이 낮은 모직의 과장이 아니라, 몇 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식품의 본부장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낼 수 있는 스너프의 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어떨까?

정훈이도 지금 정태가 하고 있는 저런 규모의 사업들을 펼쳐 나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쪽 업계에서는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상화시킬 때 아무리 초스피드로 진행을 시킨다고 해도 최소 3년은 걸려.”

하늘이가 말했다.

“각색 작가를 못 구한 게 아니라, 아마 몇 번 교체가 됐을 거야. 그 작업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거든. 우리도 현재 웹툰 원작 IP를 확보해 놓은 게 몇 개나 돼. 그런데도 힘들어. 각색 작가만 픽스가 되면 될 거 같아? 아냐. 투자사를 잡아야 할 거 아냐. 그 투자사는 그냥 잡아? 배우 캐스팅을 해야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순서가 바뀌긴 하지만, 순서가 바뀐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최소 3년은 생각을 해야 해.”

“그래서 내가 널 보자고 한 거 아냐.”

“……?”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어? 원작을 잘 살릴 수 있을 만한 각색 작가 구하는 일, 투자사 잡는 일, 배우 캐스팅… 당연히 다 어렵겠지. 알아. 아는데… 그래도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에 있어?”

정태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하늘이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사람으로 커버를 쳐 가며 어떻게든 해내는 게 사업이라는 건데. 안 그래?”

“그…렇지?”

좋은 분위기 속에서 이만한 생각 차이 정도로 서로 어색해질 상황을 만들어 뭐 할까 싶은 하늘이었다.

“지금 우리 웹 콘텐츠 사업부는 내년까지 스너프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를 분사시키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

“스너프 엔터테인먼트?”

“유씨에이 소프트 알지?”

“영상 스트리밍 기술 업체 아냐?”

“지금 거기랑 가격 협상 중이야. 인수를 하게 될 거 같아. 시스템, 프로그램이 자산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지는 않더라. 괜히 겁먹었어.”

“…….”

“우리 자체 콘텐츠들 영상화 판권을 팔아 놓고, 업계 돌아가는 걸 유심히 살펴보니까, 확실히 우리가 경험이 없었어. 앞으로는 우리가 직접 우리 스너프 자체 오리지널 웹 콘텐츠들을 제작사 쪽으로 연계시켜서, 우리가 만들 채널에서 방영을 하게 만들어야 될 거 같아.”

“OTT 사업에도 뛰어들겠다는 소리야?”

“이미 준비 중이야.”

하늘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미래기획이 앞으로 우리가 계획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 쪽이나, 현재 웹 콘텐츠 사업부 쪽의 가장 끈끈한 파트너가 되어 줬음 좋겠다.”

“…….”

“실력 좋잖아. 국내 영상 투자 회사 하면 미래기획 아냐?”

“우리 역시 웹소설, 웹툰 작품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기는 해. 괜찮다 싶은 작품이 있으면, 콘셉트 맞는 제작사 쪽으로 토스를 해 주기도 하고, 반대로 제작사 쪽으로 투자 검토용으로 토스를 받기도 하고.”

“방금 내가 준 자료, 사무실 올라가서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해 봐. 좀 더 디테일한 내용은 내가 우리 웹 콘텐츠 사업부 총괄한테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까, 너네 쪽 대표하고 같이 미팅 자리를 한번 만들어 봐도 좋을 거 같고.”

“그럴게.”

“나는 있잖아, 하늘아.”

하늘이가 확인했던 자료를 다시 서류 봉투 속으로 넣어 소파에 내려놓을 때였다.

“응?”

“네가 우리 가족이 된다는 게 나는 너무 좋다.”

“갑자기 간지럽게 왜 그래?”

“진심이야.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는데, 든든해. 지금 이 내용도 봐. 이런 영상 제작, 투자 쪽으로 미래기획이 있고, 또 거기에 네가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앞으로 서로 돕고, 도움받고… 그렇게 같이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할 거 같지 않아?"

“…….”

“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이야.”

얼굴에 장난기를 잔득 담아 하늘이가 농담을 던졌다.

“내가 아니라 미래금융이 든든하단 소리겠지.”

“내가 이런 쪽으로는 말주변이 별로야.”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어.”

하늘이가 보여준 미소에 정태도 함께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도, 내 말주변이 부족하더라도 네가 잘 이해해 줘.”

“들어 보고”

“결혼이라는 건 어쨌거나 두 집안이 하나가 되는 거잖아.”

그저 눈썹만 살짝 올렸다 다시 내릴 뿐, 하늘이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정태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하물며 우리 재경과 미래금융의 결혼이야. 그리고 우리 두 집안은 너랑 정훈이가 작년에 장 회장님 생신날 결혼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어쨌거나 서로 그 관계가 다소 불편했잖아.”

결국 하늘이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쪽 입꼬리만 올려놓고 하늘이는 마저 다 듣겠다는 듯 정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지난 세월 우리 두 집안 사이가 불편했던 이유. 그 이유가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어.”

“정엽이 오빠?”

“우리 집은 여전히 정엽이 형의 존재가 불편해.”

하늘이는 “어쩌라고?”라는 말이 입 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음에도 그 말을 억지로 꾹꾹 눌러 냈다.

“주제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한테 이 이야기는 꼭 해 줘야 할 거 같더라고. 앞으로 우린 가족이잖아.”

가족?

지금 웃기겠다고 하는 말인가?

조금 전까지 사업 이야기를 하며 보여 줬던 정확한 모습의 손정태는 어디로 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이가 물었다.

“나 지금 오빠한테 혼나고 있는 거야?”

제법 뼈가 담겨 있는 그 말 앞에서도 정태는 침착했고.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왜 너를 혼을 내?”

더 이상 하늘이의 얼굴에선 조금 전의 미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평온함의 성질은 차가웠다.

“그런데 뭔가 오빠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앞으로 내 행동에 조심을 넣으라는 경고처럼 들리는 거 같아서.”

“경고? 경고… 경고하고는 거리가 먼데, 마땅히 다른 단어가 생각은 안 난다.”

“이건 아까랑은 달리 이해가 쉽게 안 되는 내용인데?”

그 말에 정태의 얼굴엔 차가운 미소가 다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 왜 그렇지? 방금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 싶은데….”

“나는 단순해서 돌려 말하는 걸 잘 못 해. 그리고 이런 내용은 돌려서 말할 내용이 아닌 거 같고.”

하늘이의 표정은 단단했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오빠. 조금 전 오빠가 한 말, 혹시 오빠네에서 정엽이 오빠를 불편해하니까, 우리 집에서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 뜻이었어?”

하늘이가 재차 물었다.

“혹시 이거, 그냥 오빠가 날 조심시키겠다고 하는 말인 거야, 아님 오빠네 부모님이 오빠 통해서 나한테 하는 말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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