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정훈이 아니잖아
일부러 봐준다는 듯, 애써 한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며 정태가 말했다.
“야, 하늘아. 이게 네가 지금 이렇게까지 정색을 할 내용은 아니지 않냐? 나는 좋은 의도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거야.”
정태가 뒤로 한발 물러선 만큼, 다가가며 하늘이가 얼굴에 다시금 미소를 띄웠다.
“정색을 한 게 아니라, 당혹스러워서.”
“당혹스러워?”
당연한 거 아니냐며 하늘이가 말했다.
“당혹스럽지. 오빠가 나라면 근무 시간에 사업 이야기 하자고 자리를 만든 사람이 사업 이야기 하자는 건 핑계였던 거 같고,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데 안 당혹스럽겠어?”
“그런가?”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거였다고 생각을 할게. 혹시라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런데 오빠가 이건 알아야 할 거 같아.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작은아버지, 그리고 나, 태양이… 지금까지 우리 집 사람들은 정엽이 오빠를 우리 가족으로 생각해 왔어. 오빠네랑은 그 관계가 불편하다는 거 알아. 나 역시 신경이 쓰여. 어떻게 전혀 신경이 안 쓰일 수 있겠어? 내용을 다 아는데. 하지만 반대로 오빠네 역시 우리가 정엽이 오빠와 어떻게 지내 왔는지 다 아는 거 아니었어? 내가 그 관계에 신경이 쓰이는 만큼, 오빠네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존중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흠….”
하지만 정태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오빠네 할머니 기일에 정엽이 오빠가 안나, 데이빗 다 데리고 제사에 참석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푸흡, 부경호텔 지분을 정엽이 형이 가지고 있더라?”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하늘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거기에 한국 투자사 두 곳이 다년간 집중 자금을 부어 왔어. 투자사 이름이 ‘제콤’, ‘레이밤’으로 되어 있던데… 그 두 투자사 대표가 동일 인물이야. 장영우. 네 작은아버지가 그 두 투자사 대표로 계시길래 깜짝 놀랐다. 네 작은아버지는 여의도 건물로 임대 사업하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
“…….”
“뭐 그건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정엽이 형 말이야. 부경호텔 11퍼센트를 확보하고,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얼굴 한 번 안 내비친 사람이 우리가 작년에 부경 계열사 지분으로 부경유통 절반을 다시 가져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 집에 찾아왔어. 그것도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가족을 데리고.”
결국 하늘이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어머니가 작은집을 상당히 껄끄러워해. 그래서 내가 조금 걱정이 되는 거야. 괜히 그거 때문에 네 입장이 난처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이야.”
“그럼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오빠?”
마치 비꼬는 듯한 하늘이의 표정과 말투에 정태는 결국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나는 왜 오빠 입에서 부경호텔 지분 이야기가 나오고,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정엽이 오빠 도와서 드모어 설립부터 운영에 도움을 준 내용이 나오는지, 그 내용 때문에 내가 왜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다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뭐?”
“부경호텔 지분이야. 재경항공, 재경식품, 재경모직 지분이 아니라. 그 부분에 있어서 오빠가 불편해하고 있는 포인트를 내가 못 집어내겠어.”
“…….”
“왜 정엽이 오빠가 부경호텔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왜… 이상한 거지? 이상한 게 아니라 대단한 거 아닌가?”
“진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라면, 상당히 의외인데?”
“진짜 그렇게 생각을 해, 나는. 부경호텔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정엽이 오빠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그리고 만약에 그런 걸로 오빠네 집에서 내 입장이 난처해지는 거라면… 시작하기도 전에 힘든 길이 눈에 훤한데 결혼을 어떻게 해?”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더한 말을 내가 먼저 들어 버렸잖아. 그것도 정훈이 오빠를 통해서 들은 게 아니라, 오빠를 통해서. 이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받아들여지는 강도가 조금 다르지 않겠어?”
* * *
정태 놈이 하늘이를 찾아가서 그런 말을 했다고?
경솔하다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님 딴에는 그게 장남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했던 걸까?
나한테 이미 정엽이와의 거리를 두라는 말을 한번 하지 않았나.
물론 난 그럴 마음이 없지만, 나한테 이미 한 말을 다시 또 하늘이를 찾아가 똑같이 했다는 건 정태 이 녀석이 지금 정엽이로 인해 큰 불안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 불안을 견뎌 내는 모습은 실망스럽지만,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자세만큼은 높게 사 줄 만하다.
―오빠는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전화했어.
통화를 하며 하늘이에게 조금 전 있었던 상황을 다 전해 듣자, 정태 놈을 따로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당연히 배가 아프지.
하물며 그 땅을 지난 세월 남보다 더 못한 관계로 지내 온 정엽이 놈이 사겠다는 거 아닌가.
그것도 정태 놈 입장에선 우리 집 돈을 이용해서 사겠다고 하는 건데, 정엽이 놈이 하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못마땅할까.
“그래, 알았다. 내가 통화 한번 해 볼게.”
―그게 끝이야?
“어? 뭐가?”
―그게 끝이냐고.
“뭐 때문에 남의 직장까지 찾아가서 그런 말을 하고 간 건지, 직접 내가 물어봐야 할 거 아냐.”
―보통은 있잖아.
“보통?”
―됐다, 말을 말자. 내가 오빠랑 이런 내용으로 무슨 말을 하겠어?
“보통이 뭐?”
―양쪽 집안에 서로 인사 다 하고, 결혼까지 이야기가 다 나온 사이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 보통은 괜찮냐고 물어봐 주거나, 아니면 왜 그랬냐, 그래도 내 형인데 네가 조금 참지…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
그렇지.
그건 그렇네.
내가 괜찮냐고 안 물어봤던가?
―상황이 그랬어. 처음부터 일부러 뾰족하게 상대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가 거기에서 무르게 대처를 해 버리면 정태 오빠한테 우리 집이 염치없는 집이 될 거 같았거든.
“…….”
―내가 당당하게 굴어야겠는 거야.
하늘이 놈도 마음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네.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잘했어.
―잘하긴. 내색은 안 했지만, 뾰족하게 굴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하고 얼마나 나 스스로를 의심했다고.
“내가 봤을 땐 적절하게 잘 상대를 한 거 같은데?”
거기에서 억지로 웃으며 “앞으로 내가 조심을 할게….” 하는 것만큼 미련한 대처가 어디에 있겠나.
하늘이가 정태에게 말했다는 것처럼 30년 가까운 세월을 태산이가 정엽이를 친손주처럼 챙겨 왔던 게 사실인데.
―진짜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갑자기 내 편 들어 주니까 이상하잖아. 입에 달고 있던 잔소리도 한마디 없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고. 네가 있는 말 줄이고, 없는 말 보탠 게 아니라면 서로 어색해질 상황을 먼저 만든 건 네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뭐 하러 서로 어색해질 상황을 만들어?
“그럼 네가 한 대응이 맞았던 거지.”
―참 이럴 땐 진짜 대화 안 통해. 누가 지금 오빠한테 잘잘못 가려 달라고 전화를 한 거야? 괜히 나 때문에….
“그래서 괜찮냐?”
―빨리도 물어본다.
“얼마나 매운맛으로 쏘아붙였어?”
―쏘아붙이긴 뭘 또 내가 쏘아붙여?
“그거 네 주특기잖아. 한 대 쥐어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굴면서 따박따박 한마디도 안 지고 할 말 다 해 버리는 거. 얼마나 매운맛으로 그랬어?”
―별로 맵게 안 했어. 뭐 한 7.5 정도?
“예전에 나 볼 때마다 틱틱거렸던 건 맵기가 얼마 정도였어?”
―에이, 그건 매운맛도 아니지. 그때 내 맵기는 한 5.5?
“아따, 오늘 우리 손정태 사장 골이 좀 띵했겠네. 일단 알았어. 내가 전화 한번 해 볼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일해.”
정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전화를 건 이유를 다 알고 있을 텐데도 하늘이와는 달리 정태는 평상시 유지하고 있는 침착함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 하늘이 만났다면서?”
―아… 하늘이하고 벌써 통화했어?
“방금 전화가 왔네. 금방 헤어졌다면서. 지금 회사 들어가는 길이야?”
―어. 마저 봐야 하는 서류들이 좀 있어서. 형이 의도한 건 아닌데, 이야기 중에 서로 오해가 좀 생겨 버렸다. 하늘이가 이야기하지?
“그랬다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나중에 네가 따로 만나 가지고 하늘이 편 좀 들어 줘. 맛있는 거 먹이면서 내 욕을 하면 같이 씹어도 주고. 조만간에 언제 기회 봐서 형이 너랑 같이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볼게. 어쨌거나 앞으로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인데 오해가 생겼으면 빨리빨리 풀고 해야지. 아까 거기에서는 도저히 풀 엄두가 안 나더라. 왜 그런 거 있잖아? 이럴 땐 최대한 눈앞에서 빨리 사라져 주는 게 상책이다 싶을 때. 하하. 아까는 그래서….
“저녁에 일 마치고 같이 술 한잔할까?”
―하늘이 안 만나고? 야, 오늘은 형 말고 하늘이 만나라. 형이 걱정 많이 하더라면서, 말한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헤어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도록 내가 말을 잘못한 거 같아 마음이 안 좋다고도 전해 주고.
“나랑 술 한잔하자니까?”
잠시 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더니, 정태 이놈이 별안간 날 뜨끔하게 만들었다.
―그럴까, 그럼? 어디에서 볼까?
“어디가 편하겠어?”
―손바닥만 한 서울 땅덩어리에서 편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디에 있어? 그럼 소공동 호텔 어때?
“소공동?”
―나도 우리 할아버지 술맛 좀 보게.
순간 이놈이 나한테 사람을 붙여 놨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말이 없어? 왜? 정엽이 형, 하늘이는 데리고 가서 마셔도 형이랑은 같이 안 마시고 싶은 거야?
“어떻게 알았어?”
―세상에 없는 게 세 개가 있어, 정훈아. 그게 뭔지 아냐?
“…….”
―공짜, 정답, 그리고… 비밀.
근데 이놈이 진짜 어떻게 알았지?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 인마.
“누구한테서?”
―누구긴 누구야? 현민이 형이지. 소공동점 총지배인한테 보고를 받았다고, 지금 소공동점에서 할아버지 술 뜯겠다고 하는 중이냐면서 전화가 온 거야. 무슨 소리냐고, 할아버지 술은 또 뭐고, 내가 지금 거기에서 왜 술을 마시느냐고 했지. 그랬더니 이 형이 분명히 자기는 거기 총지배인한테 술 주인의 장손주하고 막내 손주가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와서 할아버지 술을 달라는 보고를 받았다는 거야.
“…….”
―그 형은 장손주라고 하니까 당연히 난 줄 알았나봐. 하하. 딱 봐도 네가 정엽이 형, 하늘이 데리고 거길 갔겠다 싶은 거야. 그래서 난 같이 안 있다고, 아마 정훈이가 거기에 있는 거 같으니까 정훈이한테 전화를 걸어 보라고 했지.
“그랬어?”
―그 술 되게 구하기 힘든 술이라고 하는 거 같던데, 술맛 괜찮더나? 셋이서 양주 한 병을 다 마신 건 아닐 거 아냐. 거기서 보자. 나도 할아버지가 얼마나 귀한 술을 거기에 꽁꽁 숨겨 놓으셨는지, 그 술맛 좀 보게.
거참 별것도 아닌데, 더럽게 신경 쓰이네.
정태 놈과의 통화 후 좀처럼 회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정태 놈을 상당히 섭섭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은 정엽이, 정태 두 다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정엽이만 끼고 돌았던 할애비로서의 미안함이었다.
똑같은 손주 놈인데, 두 놈 다 따로 만날 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놈들이었는데, 정말 나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두 놈이 같이 있을 땐 정엽이 놈에게 한 번 더 눈이 가고, 똑같이 예쁜 짓을 해도 정엽이 놈이 더 예뻐 보이고… 그랬었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퇴근을 조금 일찍 해서 강인성 차장과 함께 소공동 부경호텔로 향했다.
분명히 내가 먼저 도착해 있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정태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번의 안면이 있었고, 그 안면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그곳 매니저가 곧바로 날 정태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안내를 했다.
“왔어? 앉아.”
테이블 위로는 지난 주말 내가 정엽이와 하늘이를 데리고 와서 뜯고 남겨 놨던 달모어 1941이 세팅되어 있었다.
“야, 이거 신기하더라.”
위스키 코르크를 직접 따 놓고, 그곳 매니저에게 우리끼리 알아서 마실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볼일을 보라고 말한 다음, 정태는 직접 빈 온더록스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스포이드로 물을 두세 방울 온더록스 잔 안으로 떨어뜨렸다.
“물 몇 방울 들어간 거랑, 안 들어간 게 향도 향이지만 혓바닥에 감기는 질감이 달라. 이런 거 맛 한번 들이고 나면 그다음부터 다른 술은 어떻게 먹냐?”
“…….”
“여기 매니저 저 양반이 그러는데, 이건 값을 매길 수가 없는 술이라며?”
“아마도.”
“자, 한잔하자.”
가볍게 서로의 잔을 부딪쳐 놓고, 적당량 혀끝으로 입속에 담았다.
정태도 함께 술맛을 음미한 후 잔을 내려놓으며 내게 말했다.
“여기에 할아버지 술이 있다는 걸 넌 어떻게 알았어?”
“아까 전화로 나한테 그랬잖아. 세상에 없는 거 세 가지. 공짜, 정답, 그리고 비밀.”
“재밌네. 너는 할아버지 비밀을 알아내고, 나는 네 비밀을 알아내고.”
“내 비밀? 아, 지난주에 정엽이 형, 하늘이 데리고 여기에 온 거?”
“아니.”
다시 한번 온더록스 잔을 입술에 붙인 뒤 정태가 말했다.
“그게 무슨 비밀이야?”
“그럼?”
“그 전에 내가 하나만 물어보자.”
그러라고 했더니, 정태 이놈 얼굴이 갑자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너는 이 새끼야.”
와….
화가 단단히 났네?
꽤 살벌한데?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정태 이놈이 나, 그러니까 자기 동생한테 이렇게 욕을 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랬네.
“여기에 할아버지 술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아. 이깟 술 한 병 가지고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이 새끼야, 이걸 하늘이하고 둘이 와서 분위기를 내겠다고 뜯는 것도 아니고, 누굴 부를 거였음 그게 나여야 맞는 거냐, 아님 손정엽이어야 맞는 거냐?”
이건 진짜 정태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면 내가 할 말이 없네.
“이러니까 내가 그간 해 왔던 의심에 확신이 생기는 거야.”
“무슨 의심?”
“너 누구냐?”
“…뭐?”
“너 누구냐고. 누군데 내 동생인 척하냐?”
“…….”
“너 정훈이 아니잖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