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뭘 그렇게 놀란 눈을 해? (171/303)

뭘 그렇게 놀란 눈을 해?

설마 이 자리에서 나랑 기 싸움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마치 먼저 피하는 놈이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나와 정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피해 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보다 먼저 시선을 온더록스 잔으로 돌리며 정태가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너는 그동안 형을 그 정도 눈치도 못 챌 모지리로 보고 있었냐? 언제부터였어?”

“뭐가?”

“내가 아는 내 동생 손정훈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한 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내가 지금 너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녀석의 잔엔 아직 충분히 몇 모금에 나눠 마실 수 있는 수 있는 양의 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그 술을 비워 놓고 정태가 말했다.

“처음에 스너프 기획안이 너한테서 나온 거란 소리를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겼어.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표정 관리 못 하고 빵 터졌던 건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거야.”

“…….”

“그런데 그 기획안이 진짜 너한테서 나온 거더라? 뭐지? 뭘까? 아무리 좋은 쪽으로, 그러니까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을 확률까지 다 염두에 두고 네가 그런 기획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쪽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생각을 해 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야. 내가 더 웃겼던 게 뭔지 알아? 바로 스너프 뱅크 시스템. 미래금융이 그쪽으로 특화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인정. 하지만 네가 미래금융을 콕 집어서 합작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올릴 순 없는 거지.”

정태는 턱짓만으로 내게 잔을 비우라는 눈치를 줘 놓고, 내가 그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술병을 들었다.

이놈이 지금 무슨 짓이야?

온더록스 잔에 술이 절반까지 찼음에도 정태는 술병을 세울 기미가 없었다.

술이 잔에 7부를 넘어 8부, 9부 가까이 찰 때까지도 정태는 따르고 있는 술이 아닌 내 눈을 쳐다봤다.

결국 술이 넘쳤고, 그제야 정태는 술병 주둥이를 틀어 자신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병 안에 든 모든 술이 모두 비워졌음에도 정태의 잔은 7부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왜? 미래금융 쪽에서 하늘이하고의 결혼을 전제로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널 재경의 차기 주인으로 만들어 주기라도 하겠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정훈아아아… 그 정도 욕심을 부려 볼 줄 아는 놈이 감이 그렇게 떨어져서 어떻게 하냐? 도대체 형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거냐? 나 그렇게 바보 아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여? 왠지 아냐? 왜인 거 같아?”

“…….”

“널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거든. 어머니, 아버지? 잘 모르시지. 그런데 형은 아니잖아. 어렸을 때부터 너 데리고 다니면서, 외가 인간들 만나는 날엔 꼭 내 옆에 붙어 있게 만들면서 너 챙겼던 게 바로 나야. 기억 안 나냐?”

강한 척 굴고는 있지만, 정태 놈의 눈이 꽤 슬퍼 보였다.

“너,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여자애 한 명 잘못 건드려서 크게 문제 될 뻔했던 거, 그거 겁나서 어머니, 아버지한테 솔직하게 말도 못 하고 그러고 있었을 때 말이야. 형 그때 그거 해결해 줄 거라고 시험 기간에 네 전화 받고 미국에서 바로 넘어와서 집에는 한국에 왔다는 말도 못 하고 딱 그것만 해결해 주고 다시 넘어갔었잖아. 기억 안 나?”

“…….”

“회사에 입사를 하고도 여기저기 사고만 치고 다니던 놈이 하루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뜬금없이 공채 스타일을 바꾸지를 않나, 노조 터진 걸 단 하루 만에 정리를 하지 않나, 스너프 기획안에 시니어즈 매입, 생뚜앙 지사를 방돔으로 옮기고….”

갑자기 괴기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놓고 큭큭대더니, 이내 얼굴 표정을 다시 바꿔 놓고 날 쳐다보며 정태가 말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짧은 몇 달 사이에 네가 해냈어. 그리고 채서린의 스캔들이 터지지. 빵. 미래기획에서 작정하고 수습을 하더라? 왜 저러지? 저게 어떻게 수습이지? 고작 매장 직전까지 간 연예인 하나 살리겠다고 감히 언론에 내 동생의 얼굴을 풀어? 미친 건가? 그런데 정말 뜬금없이 너랑 하늘이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이였다는 기사가 나와. 아! 이거였구나!”

목소리가 제법 컸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까지 힐긋거리며 우리 테이블을 훑을 정도로….

“이런 거라면 말이 되지.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훈이 뒤에 미래금융이 있었구나. 그래, 이제 이해가 된다. 어떻게 정훈이가 모직에서 그런 거짓말 같은 활약을 할 수 있었는지, 스너프 뱅크 시스템을 생각해 낼 수 있었는지 이젠 이해가 돼. 그렇지. 뒤에서 정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고 있었잖아. 어쭈? 그동안 아무리 큰 사고를 많이 치고 돌아다녀도, 다 내 선에서 커버가 가능한 사고들이었는데 이번엔 내가 커버를 칠 수가 없는 사고를 쳐 버렸네?”

이걸 이렇게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 버리네?

놀랍다.

정태 녀석의 논리대로 따라가 봤는데, 묘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처음 너랑 하늘이 관계를 기사로 확인하고, 사람을 하나 붙여서 확인을 해 볼까 하다가 일부러 안 했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네가 먼저 형한테 전화해서 사실 관계를 이야기해 줄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 그런데 그런 게 없는 거야. 그때 알았어. 아… 정훈이 이 자식이 제대로 된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구나. 거. 기. 까. 지. 는… 거기까지는 내가 기분이 좋았단 말이야”

테이블을 탁탁탁! 때리며 정태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내가 꾸는 꿈을 왜 정훈이라고 꾸지 못할까. 꿀 수 있지. 충분히 꿔도 되지. 그리고 그동안 무시를 하고 있었는데 장태산 회장님. 그 영감탱이를 인정까지 했어, 내가. 너 인간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혼도 내 보고, 욕도 해 보고, 어르고 달래고 별의별 짓을 다 해 봤는데도, 나는 못 해낸 그걸… 그 영감탱이, 미래금융은 단 몇 달 만에 해내더란 말이야. 얼마나 고맙냐, 내 입장에선.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진짜 욕심이 뭔지를 알게 해 주고, 정신을 차린 걸 넘어 모직 쪽 사람들한테 인정까지 받도록 만들어 놨는데! 하아… 그런데… 다른 건 다 좋은데 어떻게 여기에서 손정엽이를 등장시켜? 이건 씨… 이건 선 넘은 거지, 인마.”

“이게 왜 선을 넘은 거야?”

“내가 오늘 괜히 하늘이를 만나 봤겠어? 지난주에 네가 여기에 정엽이 형, 하늘이를 데리고 왔다는 연락받고 내가 얼마나 생각이 많아졌는지 알아? 진짜 바로 너한테 전화 걸어서 욕 박을까 하다가 간신히 참았어. 하늘이는 그래도 똑똑한 놈이니까, 내가 조금만 눈치를 주면 알아서 서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선은 지켜 보려고 노력 정도는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만나 봤는데, 철벽 장난 아니더라. 그래서 내가 오늘 이런 결심을 했어.”

“무슨 결심?”

“더 이상 널 내 동생이라고 봐줘선 안 되겠다는 결심. 말로 해서 안 되면 힘으로라도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줘야지. 안 그래?”

“말로 해서 안 되면 힘으로 해야 된다….”

나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뜻인가?

“정훈아. 내가 지금 너무 궁지에 몰려 버렸어. 내가 생각했던 최선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데리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이번에 정엽이 형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확실히 알겠어. 너는 나랑 같이 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그래서 지금부터는 나도 내 책임이라고 스스로 끌어안고 있는 것들을 좀 내려놓을까 해.”

“…….”

“그 짐들만 좀 내려놔도 많이 수월해질 거 같거든.”

“왜 그렇게 생각해?”

“뭘?”

“왜 내가 같이 갈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냐고.”

“아니야?”

“아닌데?”

“네가 하고 있는 행동들이 맞는데, 말만 아니라고 하면 되냐? 나는 그동안 우리 집에서 작은집 쪽으로 해 준 것들도 너무 아까워. 아까워 미칠 거 같아. 할 수만 있으면 모조리 다 다시 받아오고 싶다고.”

“…….”

“그런데 너는 그런 정엽이 형을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에 데리고 와서 이런 술을 같이 뜯어? 그래, 너는 퍼 줘라. 나는 앞으로 다시 다 가져와야겠으니까.”

“그게 무슨….”

내 말을 자르며 정태 놈이 술잔을 들었다.

내 잔은 조금만 건드려도 술이 넘쳐흐를 만큼 꽉 담겨 있었고.

“비우자, 깔끔하게. 서로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지금 형한테 이 술은 동생에 대한 미련이야, 인마. 미련. 무슨 말인지 알아?”

“…….”

내가 잔을 들기가 무섭게 그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쳐 놓고 단숨에 온더록스 잔을 비워 버린 정태.

나 역시 그 깊은 온더록스 잔 가득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먼저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선 정태는 내 어깨 위로 한쪽 손을 올려놓고 툭툭,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 * *

늦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남필우 사장은 차 안에서 장영석 미래금융 부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사장님이 통화를 시작하신 걸 백미러로 확인한 기사가 요령껏 라디오 볼륨을 낮췄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가야죠, 찾으신다는데. 네. 아이, 괜찮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그쪽으로 차 돌리겠습니다.”

기사는 통화를 끝낸 사장님을 다시 한번 백미러로 쳐다봤다.

그런 기사와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남 사장이 말했다.

“장 회장님 댁으로 차를 좀 돌려야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기사에게 바뀐 목적지를 알려 준 뒤 남 사장은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은 당신 혼자 먹어야 할 거 같다고.

마치 자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미래금융 본가 거실엔 장태산 회장을 중심으로 장영석 부회장과 정엽이, 그리고 하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우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 거야.”

“영우 형님도 부르셨습니까?”

장영석 부회장이 급하게 부른 사정을 설명했다.

“모레 아침에 정엽이, 하늘이 다 같이 아버지 모시고 부산에 내려갈 거야.”

“부경호텔 주주들 쪽이랑 약속이 잡혔나 보네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장 부회장이 말했다.

“방금 잡혔어.”

“다행이네요, 그래도. 정엽이 한국에 있을 때 그런 자리가 만들어져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 회장이 껄껄거리며 농담을 건넸다.

“남 사장도 모레 시간 되면 같이 가지?”

“에이, 저는 회사 출근해야지요. 하하….”

“내일 손 회장한테 가서 보고하고, 우리랑 같이 가면 되지.”

드디어 부경호텔 경영권 확보를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걸, 손홍준 회장에게 알려 주란 의미로 부르신 거겠지.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관련해서 찾아왔을 때부터 장 회장님은 그 부분에 있어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어차피 정엽이를 앞세워 부경호텔의 주주들과 자리를 가지게 되면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진짜 실체와 그 실체의 중심에 있는 정엽이의 존재는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 내용이 부경호텔 오너가를 통해 손 회장님 쪽으로 들어가는 건 당연히 시간문제일 것이고.

“작은아버지 오신 거 같은데요?”

외부 차고가 오픈되었다는 기계 음성이 홈 보이스 인터콤에서 흘러나왔다.

작은 스크린을 통해 차고 안으로 들어서는 차량의 모습은 장영우 대표의 것이었다.

잠시 후 장영우 대표가 안으로 들어왔고, 그가 소파에 앉을 기회 따윈 주지 않고 장태산 회장이 지팡이를 짚고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다들 서재로 들어가자.”

회의 자리 상석에 앉은 장태산 회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는 장영석 부회장과 하늘이가 나란히, 왼쪽으로는 제콤, 레이밤 투자 회사의 대표 장영우와 정엽이가 나란히 앉았다.

모두에게 정해진 자신들만의 자리가 있는 자리.

하지만 남 사장은 어디에 앉아야 하는 건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고민을 해야만 했다.

결국 하늘이의 옆자리를 선택해서 남 사장이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야, 장태산 회장이 입을 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내일 손 회장한테 전달할 때 우리도 이런 내용을 남 사장 자네를 통해서 듣도록 만드는 게 마음이 쓰인다는 거, 꼭 좀 잘 전달해 줘.”

“네.”

“아예 모르게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제가 요령껏 잘 전달을 할 테니까, 그런 부분은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남 사장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장 회장이 말했다.

“이번 일로 손 회장이 다른 오해는 안 했음 싶은 게 솔직한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잘 듣고 오해 없도록 전달을 잘해 달란 말이야.”

“네.”

“부경호텔 장혜선이가 쥐고 있는 지분이 18.7퍼센트야. 그 아들 박현민이가 쥐고 있는 게 7.4퍼센트고. 콘크리트 비슷하게 우호 지분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게 또 한 16퍼센트 정도가 돼. 다 해 봤자 42퍼센트야, 거긴.”

말이 42퍼센트지, 부경호텔 정도 규모의 기업에서 지배 지분 쪽으로 42퍼센트가 잡혀 있다는 건 높은 수치도, 그렇다고 낮은 수치도 아니다.

도대체 그 42퍼센트를 11퍼센트의 드모어 지분으로 어떻게 깨겠다고 하는 건지, 남 사장은 내일 손 회장에게 보고를 하기 위함을 떠나 그 자체가 몹시 궁금했다.

처음부터 재경 그룹이 확보하고 있는 부경호텔의 12퍼센트 지분을 기대하고 준비를 해 온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정엽이가 손 회장을 직접 만나 그 12퍼센트 지분을 지원받기 위해 한국을 온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지분이 29퍼센트 정도가 돼. 드모어 앞으로 되어 있는 11퍼센트를 빼고.”

남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남 사장에게 장 회장이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란 눈을 해?”

29퍼센트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소릴 듣고 안 놀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봐선, 이 자리에 해당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남 사장은 특유의 신중함을 얼굴에 걸어 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움직일 수 있는 지분이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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