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른데…
혹여나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지는 않았을까, 하늘이는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몸을 돌려 할아버지 곁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몰래 확인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 정훈이와 윤기태 부회장.
그리고 뒤늦게 차에서 내려 재킷을 바로잡은 뒤 빠르게 그 두 사람 쪽으로 붙고 있는 강인성 차장.
그들을 쳐다보며 정엽이가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 4.8퍼센트는 부경호텔의 가장 가까운 우호 지분이기도 하고.”
“…….”
어느새 정훈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늘이 하이?”
역시 제정신이 아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그것도 늦게 도착을 해서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란 이목은 다 끌어 놓고 한다는 인사말이 하늘이 하이?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분위기 파악을 좀 해 달라고 눈치를 줬지만, 전혀 들어 처먹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늘이가 아랫입술을 엄하게 깨무는 모습을 정훈이한테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사이 동명물산의 부회장 윤기태가 다가와 하늘이에게 아는 체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하늘 씨.”
하늘이는 정훈이에게 짓던 표정을 싹 숨겨 놓고, 환하게 웃으며 다소곳이 윤 부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부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아뇨, 유감스럽게도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
“어, 어째서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배가 아파서요.”
“…네?”
“요즘 국내외로 올라오는 시니어즈 반응 때문에, 이걸 괜히 재경모직에 넘겼나 싶어, 하루하루 배가 아파 잠을 설칩니다. 하하하.”
그제야 윤 부회장이 자신을 상대로 농담을 건넸다는 걸 눈치챈 하늘이는 재빨리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맞췄다.
윤 부회장은 장난은 그쯤에서 정리를 하겠다는 듯, 이번엔 제대로 인사를 건넸다.
“집사람이 오늘 손 상무님하고 같이 부산에 내려간다고 했더니 하늘 씨도 만나느냐고, 그럴 거 같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만나면 안부 인사 꼭 전해 주고 라운딩 약속까지 잡아 놓고 그렇게 올라오라네요. 하하하.”
재빨리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한 하늘이는, 얼른 할아버지 쪽으로 길을 터 주며 윤기태 부회장이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라운딩 약속 잡기 전에 저쪽에 제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그래요. 저는 회장님하고 인사부터 좀 하고 올게요.”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늘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자리에 동명물산의 윤기태 부회장을 데리고 온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동명물산이 부경호텔의 가장 가까운 우호 지분 4.8퍼센트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 중 한 곳이라고?
동명물산이 부경호텔의 가장 가까운 우호 지분이라는 정엽의 오빠의 말이 맞긴 한가 보다.
윤기태 부회장의 등장으로, 할아버지의 초대에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 다른 주주들의 반응이 무척 산만해졌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지?
동명물산 부회장 부부를 상대로 손정훈이 접대 골프를 치는 자리에 함께 나갔었다.
당시 재경모직에서 론칭을 앞두고 있던 골프 웨어 브랜드 퍼스펙티브를 동명물산이 가지고 있는 전국의 모든 골프장 미니멀 숍에 깔아 보고, 그와 더불어 골프 관련 인플루언서들을 상대로 라운딩 협찬을 해 줄 수 있겠냐는 내용으로.
접대 골프를 함께 쳐 준 뒤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정훈이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고작 이 정도 내용을 가지고 동명물산 부회장한테 재경의 차남이 접대 골프를 쳐 줄 이유가 있어? 얼마든지 해당 부서 담당자들 시켜서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이었던 거 같은데?”
그 말에 정훈이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고, 그저 싱긋이 웃기만 하며 대화 주제를 얼렁뚱땅 바꿔 버렸다.
기억이 거기까지 머물자, 하늘이는 또 다른 의심을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 많고 많은 의류 브랜드 중 동명물산의 시니어즈를 재경모직이 매입하게 만든 이유가 바로 동명물산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서였다고 봐야 하나?
당시 기준으로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미 그때부터 이런 판을 설계해 나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비록 할아버지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손정훈을 높게 평가하고, 실제 하늘이가 보기에도 비범한 구석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 걸까 싶은 의심.
그 의심과 동시에 하지만 그것 말고는 동명 쪽에서 시니어즈를 매각하면서 여전히 시니어즈의 5퍼센트 지분은 유지를 하고 싶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요구를 해 왔을 때, 그걸 정훈이가 앞장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준 부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온 사람이 이게 전부야?”
생각이 복잡해져 있는 하늘이 곁으로 바짝 붙어서 정훈이가 물었다.
“어?”
얼른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하늘이는 여전히 버퍼링에 걸려 있었고 그런 하늘이에게 정훈이가 다시 물었다.
“땅 보러 온 사람들 이게 전부냐고.”
“어, 어.”
“꽤 많을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니….”
“누가? 할아버지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정훈이에게 하늘이가 조심히 말했다.
“괜히 또 할아버지한테 왜 이거밖에 안 왔냐고 묻지는 말고.”
“왜? 기분 별로 안 좋으셔?”
선글라스를 콧등 아래로 걸쳐 놓고 테 너머로 장 회장을 쳐다보며 정훈이가 물었다.
그 물음에 하늘이는 조금 전 차 안에서 자기 아버지와 통화를 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말해 줬고, 지금은 사람들 앞이라 내색을 안 하고 계시는데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실 거라고 말해 줬다.
“봉만춘이 그 사람이 뭔 죄야? 하여간 속 좁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정작 하늘이 자신도 조금 전까지 정훈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할아버지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도 배신감 느껴지는데, 할아버지 입장에선 오죽하시겠어? 우리 미래금융이랑 같이한 세월이 얼마고, 그 세월 동안 자기네 위기 때마다 우리가 돈 줄 풀어서 막아 준 게 몇 번인데.”
“의리는 뭐 아무나 지키냐?”
“뭐?”
“의리도 힘 있고, 돈 있는 놈이 지키는 거야. 있는 놈이 지키는 게 의리, 없는 놈이 지키는 건 충성. 그런 거야, 최소한 이 비즈니스판 안에선.”
“…….”
“힘 있는 놈이 까불면 국물도 없다? 하고 겁을 주는데, 거기에 의리가 어딨어?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렇게 찾아간 살길에서 만나는 게 결국은 절벽뿐이라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힘, 돈. 둘 다 없는 상대한테 뭘 바라는 거야? 하긴. 그렇게라도 땜질을 해 놓고 이슈를 만들어 놔야 그나마 여기에 같이 있는 저 사람들이라도 지킬 수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긴 하다.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지. 암….”
웃어?
우와, 사이코패스인가?
그런 내용에 웃음이 나온다고?
미친놈….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인간 이거 진짜 뭐야?
뭔데 이렇게 조금 전 차 안에서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쳐 주셨던 투자의 한 수를 다 꿰뚫고 있는 거야?
그래서일까….
하늘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미친놈이 우리 편이라는 게 너무 든든하기만 했다.
자신을 지나쳐, 아직까지 서로 인사 중인 할아버지와 윤기태 동명물산 부회장이 있는 곳으로 정훈이가 가려고 하는 걸 급하게 잡아 세운 하늘이.
“왜?”
“설마 선글라스 그거 계속 쓰고 있을 거야?”
“어. 왜? 어울려?”
“벗지? 원래부터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처럼 사는 사람이 그 시꺼먼 선글라스까지 쓰면 그나마 보이던 것까지 더 안 보이는 거 아냐?”
“잘 어울리나 보네.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들 거기서 거기야. 그지?”
“미친… 오늘처럼 중요한 자리에 선글라스는 좀 아니지 않냐?”
“자리를 만든 사람한테야 중요한 자리지, 나한텐 딱히….”
“벗으라고. 벗고 가.”
“시른데….”
정훈이는 작정을 한 듯 하늘이를 놀려 놓고 가볍게 그 앞을 지나쳐, 아직까지 인사 중인 장 회장과 윤기태 동명물산 부회장 앞으로 섰다.
“구글 맵으로만 확인을 해 봤지, 저도 실제로 와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명당도 이런 명당이 없네요.”
윤 부회장 몰래, 선글라스 너머로 장 회장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인 후 곧바로 정훈이는 윤 부회장의 등판에 손을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다니는 강인성 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은 차 빼서 입구에 세워 놓고 잠시만 대기해 주세요.”
“네, 본부장님.”
정훈이는 윤 부회장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도로 앞 평지에 4만 8천 평이라서 그런 건지, 실제로 보기엔 5만 평도 훌쩍 넘어 보이네요.”
“유명하죠, 이 땅은.”
“아, 그래요?”
정훈이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윤기태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할 수밖에 없는 땅이라고 말했다.
“허가 내기에 따라서 용도가 어마어마한 땅이에요. 제가 알기로 배명건설에서도 장 회장님을 몇 번이나 찾아갔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배명건설 말고도 메이저 건설사 대부분이 관심을 크게 뒀던 땅이에요. 이 땅이 지금 15년 이상 묵혀 있어서 그렇지, 처음 장 회장님이 매입을 하셨을 때만 해도 부산에 18홀이 가능한 골프장이 없었어요.”
“아… 부산에 골프장이 없어요?”
“이제 몇 개 생기긴 했죠. 부산에 골프 인구가 몇 명인데. 그래도 시간 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다들 밖으로 나가요. 남해, 사천, 양산 이쪽으로. 이 정도 규모를 잡을 수 있는 땅이 부산엔 없어요, 이제. 있어도 다들 뭐 아파트 지어 올리지 손 많이 가는 골프장을 지으려고 하겠어요? 우리처럼 직접 운영을 하는 기업이라면 모를까.”
윤기태 동명물산 부회장의 눈엔 이 땅에 초록 잔디가 깔리고 호텔 본관부터 시작해 군데군데 들어서게 될 그늘집의 위치들이 벌써부터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축구장이 일반 평수로 따지면 2,200평이 나온다고 하네요. 그런 게 대충 스물두세 개 정도가 나온다고 봐야 되는 거잖아요.”
정훈이의 물음에 윤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걸음을 옮겼다.
“여긴 그것보다 더 나올 겁니다. 저 뒤쪽으로는 아예 노는 부지라 따로 주인이 있는지는 몰라도 충분히 더 업을 수도 있을 거고요.“
“도로에 바로 붙어 있어서 따로 빠지는 땅도 없을 거고.”
“그렇죠. 그게 이 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죠. 아무리 어라가 넓어도 입구까지 길을 닦아야 하는 땅은 70퍼센트 정도밖에 쓸 게 없는데, 이 땅 이건 있는 그대로 다 쓸 수 있잖아요. 이런 땅이 없어요, 요즘은.”
“여기에 동명물산이 투자해서 잔디 깔고, 길 만들어서 골프장 사업만 딱 제대로 맡아서 나가면 최소한 부산, 경남 이쪽 밑 지방으로는 향후 2, 30년 안에 이 로케이션을 깰 만한 골프장은 나오기 힘들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힘들죠. 아니, 불가능이죠. 바다 끼고 있어, 차로 해운대까지 15분이면 도착해, 바로 옆에 동부산몰 쇼핑 아웃렛 있고, 아난티도 차로 5분 거리 아닙니까.”
“아 참, 내 정신 좀 봐라. 제가 아직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손 대표 소개 안 해 드렸죠?”
“대표…인가요? 거기 대표는 마뉴엘 엠흐로 나와 있던데….”
“필요에 따라 대표 한 명 앞에 세워 놓고 뒤로 빠져 있기도 하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앞으로 나오기도 하고. 결국은 그런 걸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주인인 거죠.”
걸음을 멈춰 고개를 뒤로 돌린 정훈이가 한참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정엽이를 향해 손짓을 했다.
“손정엽 대표님!”
정엽이 역시 얼른 눈치껏 정훈이에게 존대를 했다.
“네.”
“이쪽으로 잠깐만 좀 와 보세요. 제가 우리 윤기태 부회장님 소개 좀 해 드리게.”
정훈이와 윤 부회장은 정엽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우선 정훈이는 정엽이에게 자신과 함께 온 윤기태 부회장을 소개시켰다.
“제가 아주 어렵게 모셨어요. 원래라면 지금 이 시간에 서울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으셨는데, 어제 같이 식사하면서 부탁을 드렸고, 아침에 거의 부회장님 집 앞에서 납치를 하다시피 해서 모시고 온 거예요. 하하.”
“납치는요, 무슨. 전날 이미 같이 보러 가자고 제가 약속을 다 드렸구만. 굳이 따로 움직일 필요 있겠냐고, 내려갔다 올라오는 동안 차 안에서 사업 이야기도 할 겸 같이 움직이자고 하셔서 상무님 차 편하게 얻어타고 내려온 거예요.”
그에 정엽이는 특유의 여유를 되찾고, 그가 부경호텔의 가장 가까운 우호 지분이라는 점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상대해 나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손정엽입니다.”
“동명물산의 윤기탭니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손중길 회장님의 장손자 되시는 분께서 운영하는 투자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해 봤습니다.”
“그동안 앞으로 나오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없는 사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없는 사정도 필요에 따라선 만들어 갖다 붙이는 게 사업인데요. 사정은 모르겠지만, 충분히 이해합니다.”
“좋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할 거나 있습니까? 눈앞에 있는 게 진실인 거죠.”
두 사람은 정훈이를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눴다.
서로가 상대의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힘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나눴던 악수를 풀고 정엽이가 물었다.
“방금 두 분 말씀 나누시는 거 듣자 하니, 그럼 오늘 바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시는 겁니까?”
“그렇게 해야죠.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땅을 보러 부산에 내려왔다고 하기보다는, 우리 손 상무님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 땅은 제가 이미 몇 번 와서 본 적이 있는 땅이라.”
“아, 그러시군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시니어즈 때문에라도 자주 만나시겠습니다?”
정훈이가 싱긋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앞으로는 더 자주 만나야죠. 손 대표님도 그렇게 하셔야 하고.”
셋은 동시에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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