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해
공터 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낮은 언덕.
그곳에 정엽이 놈과 나란히 섰다.
윤기태 부회장이 다른 부경호텔 주주들의 관심을 끄는 동안 정엽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난 녀석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그 손길이 어색했을까, 날 잠시 쳐다보던 녀석도 이내 시선을 다시 공터 부지 쪽으로 던졌다.
“멋진 땅이네.”
“그러게.”
“어때?”
“뭐가?”
“땅 말이야. 보면서 그려지는 게 있어?”
그 말에 정엽이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껴 놓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려 놓았던 걸 다 지우고 새로 그려야 될 거 같네.”
“아예 다 지우는 건 아깝지 않아?”
“내가 그린 그림 속에 골프 코스는 없었거든.”
“내가 윤 부회장을 데리고 왔다고, 거기에 구애를 받을 필요는 없어.”
“아니, 잘 모시고 왔어. 고맙다. 좋은 가능성을 연결시켜 줘서.”
이 할애비가 너한테 더한 걸 못 해 주겠냐.
네놈이 욕심이 난다고만 하면 부경호텔이 아니라 부경의 모든 걸 뿌리째 뽑아다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는 더 많은 걸 만들어 낼 역량이 있다는 걸 이 할애비 앞에 증명만 해내면 돼.
네놈이 앞으로 호텔 사업을 얼마나 잘 관리해 나갈지, 얼마나 더 키워 낼 수 있을지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 보고 싶구나.
지난 세월 외국에 나가 외롭게 살아왔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겪었을 여러 정신적 고통들….
최소한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에 들어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이 할애비가 애를 써 보마.
그걸 해 줄 수 있기 위해선 우선 내게 힘이 생겨야 한다.
녀석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걷어, 바지 주머니 속으로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판을 유리하게 잡아 줬는데 고맙다 그 한마디로 퉁치겠다는 건 아니지? 인사를 말로만 하는 사람은 매력 없다?”
“보답을 해 주고 싶어도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게 있겠어?”
“없어도 만들어야지. 누군 뭐 지금 시간이 남아돌아서 지원 사격 해 주겠다고 여기까지 내려와 있어? 없는 시간 억지로 쪼개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그런 걸 우린 성의라고 하지.”
내가 장난스럽게 요구의 암시를 줬더니 이번엔 정엽이 이놈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네?
좋다, 기분이다.
하고 싶으면 한번 해 봐라, 어깨동무.
혼은 조금 이따가 낼 테니까, 지금 당장은 기분을 좀 내보자.
이렇게라도 한국에 태산이 말고도 또 다른 마음을 열어 보여 줄 상대가 너에게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또 그게 이 할애비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성의를 보여라?”
“그런 건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알아서 미리 준비를 좀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중에 지금 너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내가 어디 가서 눈치 없다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닌데, 너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널 못 따라갈 때가 많아.”
“괜찮아. 알려 주고, 가르쳐 주고, 그러고 나서 다시 또 기다려 주고… 나한테는 아주 익숙한 일이야.”
“너 이럴 때 보면 하늘이 말 하나 틀린 게 없어.”
“무슨 말?”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게 되는데, 확실히 재수는 없다고.”
“푸하하하… 하늘이가 그래?”
“농담.”
농담이 아닌 거 같은데?
이번엔 정엽이 놈도 내 어깨를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자기 가슴 앞으로 다시 팔짱을 꼈다.
뭔가 지키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저렇게 가슴 앞으로 팔짱을 자주 끼는 걸 보아하니.
보통, 지키려 하는 게 많고 비밀도 많아서, 그래서 자기만의 계산이 많은 놈이 지금 정엽이 이놈이 하고 있는 것처럼 가슴 앞으로 팔짱을 자주 끼지.
정작 본인은 자신이 팔짱을 끼고 있다는 걸 인지도 못 한 상태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공터 부지를 넓게 쳐다보며 정엽이 놈이 말했다.
“굳이 가르쳐 주고, 기다려 줄 필요까지는 없어. 그래도 필요한 게 뭔지 알려는 줘. 내가 너한테 필요한 거까지 독학으로 알아낼 순 없는 거 아냐.”
“쁘띠 기뿔리.”
정엽이의 몸이 아예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돌아와 버렸다.
하지만 난 공터 부지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거기 최대 주주사지?”
“그런…데?”
“긴장하지마. 설마 내가 그걸 달라고 하겠어?”
“뜬금없이 쁘띠 기뿔리 이야기가 여기에서 왜 나와?”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게 철벽부터 치기 있어? 그런 자세는 별로 안 좋은 자세인데?”
“철벽을 치는 게 아니라….”
“라이선스를 좀 받아다 줘.”
“라이선스? 에이, 난 또 뭐라고. 그 정도야 값만 맞으면….”
“아시아권 전체 라이선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재킷 가슴 주머니 속으로 끼워 놓고 나도 함께 정엽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로열티는 5퍼센트 이상 못 줘. 그렇게 큰 브랜드는 아니잖아, 아직.”
“아무리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도 로열티 5퍼센트는….”
“프랑스 전역, 그리고 그 옆에 살짝 걸쳐 있는 스위스 바젤에 하나. 현재 쁘띠 기뿔리가 하고 있는 가맹 사업이라고 해 봤자 그게 전부 아냐? 프랑스 자체 점유율은 높게 잡히고 있지만, 해외 마케팅은 현재 전혀 안 하고 있는 거 같고, 아시아 진출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 아닌가?”
“…….”
“5퍼센트 로열티까지 줘 가며 우리가 브랜드 홍보를 해 주겠다는 건데 크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 않을까?”
아무리 내 피 같은 손주 놈이라도 세상에 공짜 같은 건 없다는 것쯤은 너도 지금부터 배워야지.
그리고 작전 한번 잘못 쓰면, 잘못된 그 작전 한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습 비용이 드는지도 지금부터는 배워야지.
그동안 태산이가 얼마나 귀하게 대했을까.
다 해 줬을 거 아닌가.
제 친손주들 하늘이, 태양이보다 더 금이야, 옥이야 하며 보살폈을 게 불 보듯 뻔하다.
몇 해 전까지는 정엽이 놈 한국에 들어온다고 직접 공항에 마중까지 나갔다고 하니, 말 다 한 거지.
영석이 시켜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만들어 줘, 그간 둘째 영우를 시켜 그 드모어를 관리까지 해 줘.
지금부터는 이 할애비와 함께 기회비용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 보자꾸나.
“지금 흐르고 있는 이 대세의 기운을 꺾지 않으려면, 중간에서 드모어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우리 쪽으로 5퍼센트를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동명물산이 가지고 있는 부경호텔의 지분 4.8퍼센트? 잘 봐.”
난 고개를 뒤로 돌려 윤 부회장 주위로 모여 있는 다른 주주들의 모습을 정엽이에게 보라고 했다.
“사람들 표정이 어때? 내가 윤 부회장 데리고 오기 전이랑 비교해서. 오히려 나랑 윤 부회장이 등장하기 전보다 더 긴장을 하고 있는 거 같지 않아? 생각이 많아진 얼굴들로….”
“…….”
“4.8퍼센트. 크지. 거기다 부경호텔의 우호 지분이고. 그 우호 지분이 저항 지분으로 바뀌고 있는데, 다들 든든한 아군이 생겼으면 얼굴 표정이 가벼워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더 무거워진 거 같지?”
“…그렇네.”
“저게 사람 심리야. 함정일 수가 없는 건데도, 동명물산은 20년 넘는 세월을 부경호텔의 우호 지분으로 있었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여기에 왔을 거란 생각들을 사람들이 못 한다는 거야. 실제로도 그렇지. 그 4.8퍼센트는 판을 결정짓는 캐스팅 보트가 될 수가 없어. 부경호텔. 사업 규모에 비해 지분 구조가 너무 잘게 쪼개어져 있거든. 재경 그룹이 들고 있는 12퍼센트 정도는 되어야 확실한 캐스팅 보트가 될 수 있는 거야.”
“…….”
“며칠 전에 회장님 만난 자리. 그 좋은 기회를 고작 자기변명, 얼굴에 금칠하는 데 다 써 버릴 줄은 몰랐어. 그렇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감정에 호소하면 재경 그룹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12퍼센트 지분을 지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
“아서. 한참 멀었다. 그동안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에서 상대해 왔던 사람들은 그런 얕은수로도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번지수가 틀렸어. 어떻게 부경호텔 경영권을 다시 가져오냐, 못 가져오냐 그걸 결정지을 수 있는 캐스팅 보트를 앞에 두고 나는 당신에 대한 아무런 원망도 없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내가 좀 더 노력하겠다… 하는 식의 체면치레로 기회를 날려 버리나?”
다시 공터 부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12퍼센트를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저기 저 사람들을 확실히 구워삶아도 아슬아슬할 판에, 이걸 배짱이라고 봐야 하는 거야, 아님 정작 본인만 절실하지 않다고 봐야 하는 거야?”
“…….”
“프랑스에서 동네 구멍가게들 상대하던 버릇은 버려. 거긴 고작 몇백억 단위였겠지만, 지금 여긴 조 단위야.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는 기업들만 해도 재경, 부경, 미래금융… 그리고 저기 저 사람들이 사장, 대표, 회장으로 앉아 있는 사업체들, 부경호텔의 우호 지분을 담고 있는 기업들까지. 그렇게 감정에 호소하겠다고 안일하게 접근을 하기엔 판이 너무 크잖아.”
“작은아버지가 결정을… 안 하신 거야?”
“무슨 결정을 어떻게 해? 회장님이 먼저 말을 꺼냈는데도,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는다고 달란 말을 안 했다며?”
“…….”
“달라고 해도 어떻게든 안 주려고 하고, 주더라도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못해 주는 게 사업하는 사람들 심보야. 도와 달란 말을 안 하는데 고민을 왜 하나? 고민이 없는데 결정이 어떻게 나오고.”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걸 눈치챈 정엽이는 혀끝으로 바싹 말라 있는 입술을 적셔 놓고 길게 숨을 뽑아냈다.
정신 못 차리겠지?
그럴 거다.
사업이라는 게 결국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 싸움인 건데, 아무리 프랑스에서 칼을 갈며 지금까지 버텨 왔다지만 그게 한국에 들어와서 하루아침에 네 맘대로 다 된다면 그게 더 사기지.
“전력 질주 해, 매 순간. 다음 스텝을 위해 힘을 비축하겠단 말 같지도 않은 생각 따윈 버리라고. 살아남지 않으면 다음 스텝 같은 건 없어. 왜 호미면 충분할 걸 가래를 가져와도 막을까 말까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으로 만들어? 쁘띠 기뿔리. 해 줄 수 있어, 아님 힘들 거 같아?”
“…….”
“안 급하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 주는데도 표정을 보아 하니까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태산이 할아버지, 미래금융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하는 표정이다? 태산이 할아버지가 손정엽이를 위해 미래금융 전체까지 걸 수 있겠어? 그걸 다 건다고 해도 부경 전체를 상대로 미래금융이 게임이나 되고? 샹갈렌 상대 수석 입학, 최우수 장학생 데미안. 정신 차려. 여기 한국이야. 상대가 부경이고. 당신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날고 긴다는 스펙을 장착한 놈들 수백, 수천 명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부경 그룹 안에서 자기 자리 지켜 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고. 자존심, 체면 그런 거 다 집어던져 가면서.”
난 저 멀리 윤 부회장과 함께 있는 태산이를 보라고 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런 곳이야, 지금 당신이 상대하겠다고 하는 부경 그룹이. 그런데 당신은 부경 그룹 안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평소 10분만 걸어도 숨이 차서 헥헥거리는 저 양반이 저기에서 저렇게 회장 자존심, 체면 다 내려놓고 주주들 마음 잡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어떻게 혼자 고상해?”
“……!”
“왜? 당신 작은아버지 앞에서 절실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아쉬운 소리는 도저히 할 엄두가 안 나더나? 말로 해서 안 되면 무릎을 꿇고, 그래도 안 되면 그 앞에 드러누워서라도 12퍼센트 약속을 받아 냈어야지. 그걸 내가 지금 대신 가서 해 주겠다는 거 아냐. 이미 손정엽이는 기회를 날려 버렸으니까. 그래도 쁘띠 기뿔리에 고민이 필요해?”
“알았어. 그렇게 진행할 수 있도록 우리 쪽에서 준비할게.”
“내가 직접 넘어가기엔 회사 일이 바쁘고, 그렇다고 사람만 보내자니 그것도 아쉬워. 쁘띠 기뿔리 대표한테 말해서 한국에 한번 들어오라고 해. 내가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하면서.”
“알았다. 그 부분도 안나한테 말해서 준비시킬게.”
“직접 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지금부터는 새로 시작한단 마음가짐으로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다 직접 해. 누굴 시키는 건, 내가 먼저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
“여기 이 땅에 들어설 리조트도 그냥 사람 시켜 적당하게 지어 올리기만 할 생각인가?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그 전문가들보다 더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돈을 주고도 시키는 게 아니라 끌려가게 되는 거야. 이 땅에 대한 밑그림 직접 그려. 손정엽이가 자신의 왕국을 만드는 첫걸음이잖아. 그 첫걸음마저 다른 사람이 대신 걷게 만들면 쓰나. 그게 얼마나 귀한 걸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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