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 (176/303)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저는 그냥 손 상무님하고 같이….”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이 차 타고 가세요.”

부산 해운대, 거대 갈빗집 앞.

저녁 식사 자리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동명물산, 윤기태 부회장의 참석이 식사 자리가 길어진 이유였다.

거기에 식사 중간에 윤기태 부회장 외 다른 부경호텔 주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장태산 회장이 나이를 핑계로 먼저 자리를 일어난 게 화근이 되었다.

장태산 회장이 호텔로 돌아간 후로, 식사 자리는 곧장 술자리로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너 나 할 것 없이 얼큰하게 취해 갔다.

할아버지를 호텔 객실까지 직접 모시고 가서 쉴 자리를 마련해 드린 뒤 하늘이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한국 소주에 약한 정엽이 오빠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특히나 많이 취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윤기태 부회장이었다.

이미 할아버지가 호텔로 가기 전부터도 두 사람이 많이 마셨다.

그 바톤을 다른 인물들이 차례대로 이어받았고, 술고래 정훈이까지 합세를 했으니 저 정도로 취하는 건 무리도 아니지.

“하늘 씨.”

“네, 부회장님.”

“내가 아까 말을 하다가 말았는데….”

혀가 꼬여 가는 윤 부회장이었다.

“우리 집사람이 하늘 씨하고 라운딩 약속을 꼭 잡아서 올라오라고 나한테 그렇게 말을 했거든요. 언제가 좋을까요?”

“언제든 부회장님, 사모님 편하실 때 여기 손정훈 상무 통해서 말씀만 주세요.”

“진짜죠?”

“그럼요?”

“그럼 나는 우리 하늘 씨 약속만 믿고 올라갑니다?”

“네, 얼른 차에 타세요.”

“근데 진짜 내가 이 차 타고 가도 되는 거예요? 손 상무님하고 같이 왔는데, 그냥 타고 온 차 상무님하고 같이 타고 올라가도 될 거 같은데….”

“다리 쭉 뻗고 편하게 누워서 가시라고요. 가시다가 잠시 눈도 좀 붙이시고.”

하늘이는 윤기태 부회장을 서울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갈 미래금융 본사 수행원에게 윤 부회장의 집 주소를 미리 확인하라고 지시한 뒤 차 문을 직접 닫아 주었다.

“밤길 운전 조심히 하고, 몇 시라도 괜찮으니까 부회장님 댁까지 모셔다드린 뒤에 저한테 확인 문자 하나 보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 부회장을 먼저 보내 놓고, 하늘이는 재빨리 정엽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억지 정신력으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분명 많이 취했다.

얼굴빛이 벌써부터 술 톤이었다.

그런 정엽이를 챙기는 하늘이에게 정훈이가 말했다.

“얼른 데리고 가.”

“그래, 그렇게 해야 할 거 같다. 오빠는 괜찮지?”

“나는 괜찮으니까 얼른 데리고 호텔 들어가서 쉬게 해 주고, 할아버지 잘 쉬고 계시는지 확인해.”

“알았어. 조심히 올라가.”

“올라오면 연락하고.”

“알았어.”

오늘 하루가 너무 길고, 또 정신이 없었기에 하늘이는 윤 부회장을 부산까지 직접 데리고 오기까지 정훈이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계산을 했을지 헤아려 볼 정신이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 정엽이를 객실로 넣어 준 뒤 장 회장의 객실로 향했다.

체크인을 할 때 미리 받아 놓는 카드키 두 개 중, 하나는 객실에 꽂아 놓고 다른 하나는 하늘이가 직접 챙겨서 가지고 있었다.

잠이 없으신 할아버지가 벌써부터 주무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이는 노크 대신 객실 초인종으로 인기척을 넣은 다음 카드를 객실 문고리에 붙여 문을 열었다.

두 뼘 정도 틈만큼만 문을 열어 놓고 들어가 될지 확인을 했다.

“할아버지.”

“들어와.”

거실 사무 책상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서류들을 검토하고 계셨다.

혹시나 싶어 침실 쪽을 확인했는데, 역시나 침구엔 그 어떤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오셔서 샤워를 하고 지금까지 서류 검토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정훈이는 올라갔고?”

“네, 윤 부회장이 많이 취했어요.”

“그럴 거 같더라. 내가 편하게 마시라고 자리 비켜 주기 전부터도 살짝 취해 있었어.”

“정엽이 오빠가 타고 온 차에 태워서 보냈어요. 취한 상태로 정훈이 오빠랑 한 차 타고 같이 올라가게 하는 거 보다는 그게 더 나을 거 같아서요.”

“잘했다.”

장 회장은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녀딸의 상태를 확인했다.

“너는 많이 안 마셨냐?”

“마실 틈이나 있었나? 중간에 할아버지 모시고 왔다가 다시 갔잖아요.”

“술잔 피하겠다고 요령을 피워 놓고, 그거 때문에 못 마셨다고 하기는….”

둘은 거실 소파에 함께 앉았다.

그곳에서 전체 창을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해운대 바닷가엔 어둠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장 회장은 직접 리모트 컨트롤로 티브이를 켜서 방 안에 흐르는 정적을 잡았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예요?”

“뭐를?”

“동명물산이요. 정훈이 오빠가 모직에서 그 많은 브랜드 중 시니어즈를 선택해서 인수를 한 거. 그거 결국은 시니어즈 브랜드 자체가 아니라 동명물산을 끌어안기 위해서였던 거 맞죠?”

“그래서 이 할애비가 너한테 몇 번이나 말했잖아. 정훈이 그놈. 수가 많은 놈이라고.”

“이번 건 진짜 좀 놀랐네.”

“언제까지 놀라고, 인정하고… 그러기만 할 거야?”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미워? 제가 미워요?”

손녀딸이 노력하는 애교에 장 회장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이며 티브이 채널을 돌렸다.

할아버지가 의미 없이 돌리는 채널을 가만히 쳐다만 보다가 하늘이가 말했다.

“어쨌든 동명물산에서 큰 결심을 해 줬네요. 아까 식사 자리에서 다른 주주분들도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는 그런 눈치였어요.”

“아직 거기까지밖에는 안 보이는 거냐?”

“네? 뭐가?”

“진짜 큰 결심은 동명물산에서 한 게 아니라 거기 부회장을 오늘 여기까지 직접 데리고 온 정훈이가 한 거다.”

“…네?”

트로트 채널에 맞춰 놓고 리모트 컨트롤을 소파 협탁 위로 올려놓은 뒤 장 회장이 말했다.

“동명물산에서 할 결심이 뭐가 있어? 그쪽에서 들고 있는 게 부경호텔 지분 4.8퍼센트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시니어즈 5퍼센트까지 가지고 있잖아.”

“…….”

“한국에서 하는 호텔 사업이라는 게 결국은 부동산이라 시총은 크게 잡혀도 주주들한테 떨어지는 배당금은 재미가 없어. 거기에 비해 작년 한 해 시니어즈가 올린 영업 순이익이 어디 재미 수준으로 치부해 버릴 정도야?”

하늘이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동명물산 입장에선 고민이 전혀 필요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오늘 같이 본 그 땅에 정엽이가 리조트 사업을 준비할 때 골프장 운영권만 자기들이 확보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건 알겠는데, 진짜 큰 결심을 한 게 정훈이 오빠라는 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이제 이 반장 선거의 킹 메이커는 우리 미래금융이 아니라 정훈이로 바뀌었다.”

“……!”

“굳이 윤 부회장을 힘들게 부산까지 데리고 내려와야 했을까?”

“…….”

“이미 동명물산에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 왔던 땅이다. 전화 한 통, 밥 한 끼 같이 먹으면 충분할 내용이다. 그런데도 직접 데리고 내려왔어.”

“설마 다른 주주들한테 보여 줄 생각으로 윤 부회장이랑 같이 내려왔을 거란 말씀이세요?”

“어쨌거나 부경은 정훈이 놈한테는 외가다. 이미 제 손으로 직접 부경유통을 반으로 쪼개 놓은 상태에서 이번엔 큰이모 쪽 호텔을 상대로 저항 지분 킹 메이커 역할을 하기로 결심을 한 거야.”

“하지만 이미 우리 미래금융에서….”

장 회장은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아직은 너하고 정훈이의 관계가 공식화된 것도 아니고, 부경호텔과 엮여 있는 게 없잖아. 돈이든 관계든. 하지만 정훈이는 다르지. 아니, 재경 그룹은 다르지. 정훈이가 앞으로 나온 이상 지금부터는 부경호텔 쪽에서 얼마든지 재경 그룹 쪽으로 불편함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아….”

“그렇다고 네가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장기를 둘 때 보면 알아. 정훈이 그놈은 절대 얻을 거보다 잃을 게 많은 싸움을 할 놈이 아니다. 다 생각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하늘이 너는….”

“…네.”

“정훈이 앞에서 그만 좀 틱틱거리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잘 챙겨 줘.”

“제가 언제 틱틱거렸다고 그래요?”

“좋아서 그런다는 거 이 할애비도 다 아는데, 그런 것도 다 상대가 여유가 있을 때 예쁘게 받아 줄 수 있는 거다. 요 며칠 정엽이 한국에 들어온 뒤로 정훈이 놈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인다. 옆에서 네가 잘 챙겨.”

“저는 뭐 놀아요? 언제는 기획 일 정리하고 본사로 들어오라고 하셔 놓고, 꼭 집에서 살림 사는 사람처럼 하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세요? 할아버지도 참….”

“정훈이 그놈은 어디 놀아서 태양이 복학 안 한다고 할 때 자기 집까지 불러다 밥 사 먹이고 복학하게끔 구슬려 줬다더냐?”

“…….”

“하루 종일 회사 일을 하냐? 하루 종일 사업 생각만 해? 잠깐씩이라도 틈나고, 여유 있을 때 딴 곳으로 시선 안 돌리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 쪽으로 눈길 한 번 더 주는 거. 그런 게 관심이고, 그런 게 챙기는 거다, 이놈아.”

* * *

입욕제를 넣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던 입욕제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약간의 취기까지 돌아, 아마 씻지 않아도 이 상태에서 침대 위로 뛰어든다면 눈 감고 3초면 정신을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이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결국 옷을 벗었다.

다리가 퉁퉁 부었다.

새끼발가락도 조금 벗겨졌고.

욕조에 물이 다 받아지기 전까지 하늘이는 호텔 세면대 거울 앞에서 양치를 했다.

“정훈이 앞에서 그만 좀 틱틱거리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잘 챙겨 줘.”

조금 전 할아버지한테 들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그렇게 자주 틱틱거렸나?

요즘은 좀 덜하지 않나?

신경을 쓴다고 쓰고 있는 중인데….

생겨 먹길 애교와는 거리가 먼 걸 뭐 어쩌라고.

누군 뭐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컨디션은 좋은지, 그런 걸 안 챙기고 싶은 줄 알아?

챙겨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막상 만나서 얼굴을 보면 낯간지러워서 그런 걸 물을 수가 없는 걸 어떡해?

그런데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오늘 정훈이 오빠 얼굴에 피곤함이 많이 묻어 있긴 했다.

멋을 부리기 위한 용도라고 생각했던 선글라스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보니까 눈에 실핏줄이 너무 많이 생겨, 그게 보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썼다는 걸 알게 됐다.

도대체 눈에 실핏줄이 설 정도라면 얼마나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그냥 눈에 뭐가 났던 거 아냐?

아님 눈에 뭐가 들어가서 비벼 대다가 선 실핏줄일 수도 있고.

양치를 끝내고 손바닥에 물을 받아 가글까지 마친 하늘이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다시 거실로 나가 테이블 위로 올려놨던 폰을 챙겨 욕조에 들어갔다.

두 번, 세 번, 네 번의 신호음 끝에 정훈이의 목소리가 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크흠, 어. 여보세요.

“잤어?”

―어… 어. 깜빡 졸았네. 어후, 지금 몇 시야?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졸았다고 인정을 하지 않았어도, 전화 받는 목소리 자체가 잠결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자는데 내가 괜히 전화해서 깨운 거 아냐?”

―아냐, 아냐. 전화 잘했어. 안 그래도 메일 확인할 게 좀 있었어. 출발하자마자 확인하다가 도저히 눈이 감겨서 포기를 했었거든.

“괜히 전화했네. 그냥 서울까지 푹 자면서 올라가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너는 내가 곤란해지는 게 그렇게 재밌냐?

“뭔 소리야? 걱정해서 해 주는 소리구만. 지금 이 시간에 확인을 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냥 나랑 통화 끊고 마저 자.”

―시른데… 메일 확인할 건데….

이러니 내가 틱틱거릴 수밖에!

하늘이는 상대가 앞에 없음에도 살살 자신을 놀리는 정훈이의 말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웃음이 나왔다.

그 피곤한 와중에도 이렇게 장난을 칠 힘은 남았나 보다.

“오늘….”

―뭐? 오늘 뭐?

“수고 많았다고. 코앞에 있는 거리도 아니고, 서울, 부산 거리를 하루 만에 쳐 낼 생각을 다 하고… 그것도 그냥 몸만 왔다 간 것도 아니고, 아예 주주들 분위기를 굳혀 놓고 갔잖아. 하여간 대단해.”

―너 뭐 취했냐?

“아니거든? 별로 많이 마시지도 않았거든?”

―그래서 물어보는 거 아냐. 별로 마시지도 않는 거 같던데, 취한 척을 하니까.

“오빠는 나 놀리는 게 재밌냐?”

―엄밀히 말하자면 놀리는 게 재밌다기보다는 놀렸을 때 네가 하는 반응을 보는 게 재밌지.

“그럼 계속 놀려라. 재밌다는 걸 어쩔 거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오호. 이젠 작전을 바꾸네? 하긴, 바꿀 때도 되긴 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널 약 올릴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아직 삼만팔천구백육십일곱 개나 더 남아 있어.

“다시 한번. 몇 개나 더 남았다고?”

―…….

“푸훕. 바보냐? 금방 자기 입으로 한 말도 기억을 못 하게. 아무튼 나랑 전화 끊고 다시 마저 자. 메일은 서울 도착해서 확인하든지 하고.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너 진짜 뭐냐?

“뭐가?”

―뭔데 이렇게 느낌이 달라? 네 입에서 딴 것도 아니고 자는 거 깨웠다고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 거야?

“아까 식당에서 눈 보니까 핏줄 그거 보기 싫더라. 그래서 하는 말이야. 컨디션 조절 같은 건 알아서 좀 하라고. 애도 아니고, 옆에서 컨디션까지 누가 챙겨 줘야 돼?”

―…….

“암튼 전화 끊고 마저 눈 좀 붙여.”

―이놈 이게 오늘 왜 이래? 왜 평소 안 하던 짓을 하지?

“끊는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하늘이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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