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살 해 (179/303)

살살 해

본가 대문 앞이었다.

차고 앞으로 먼저 나와서 대기 중인 차가 세 대.

차례대로 정태, 나 그리고 정엽이가 타고 갈 차였다.

“다들 많이 피곤한가?”

정엽이 놈이 가끔씩 이렇게 허허실실 허술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는데, 이런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리게도 홍명이 놈의 모습이 정엽이 얼굴에서 겹쳐 보였다.

나와 정태 곁으로 다가와 정엽이가 물었다.

“괜찮으면 간단하게 우리끼리 맥주 한잔 어때?”

그에 정태는 또 정태 놈 특유의 단단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 날이야?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맥주는 다음에 하자. 어제 정훈이한테 듣자 하니 부산 내려갈 때 가족들은 서울에 놔두고 갔다 왔다며? 아무리 붙여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말 안 통하는 나라에 애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할 거야. 얼른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게 좋지 않겠어? 나도 어제, 오늘 퇴근하자마자 호텔 건으로 본가에 오는 거라 좀 피곤하네.”

그리고는 내 표정을 확인 후 이렇게 덧붙였다.

“정훈이 넌 괜찮으면 정엽이 형이랑 따로 한잔 같이하든지.”

난 정태 놈의 이런 날 선 반응, 정엽이를 상대로 선을 그으려고 하는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 아까 그거 진심이었어?”

“뭐?”

“유의미한 결과를 못 만들어 내면 호텔 경영권 우리 쪽으로 넘기겠다는 말.”

“아, 그거?”

“아버지가 중간에 끊으셔서 내가 더는 말을 못 했는데, 우리끼린데 뭐 어때. 안 그래? 나는 그 정도 조건은 붙어야 우리가 형을 일방적으로 도와준다는 생각이 덜 들 거 같거든. 돕는 거 자체가 싫은 건 아냐. 하지만 형은 지금 구걸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 집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거잖아.”

“맞아.”

“그러니까. 우리가 형을 진지하게 비즈니스 상대로 생각하고, 또 그 5년이란 시간 동안 형이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진심으로 지원을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는 서로 거는 판돈의 규모가 비슷해야 할 거 아냐. 우리만 일방적으로 걸고, 형은 깍두기처럼 판돈도 안 걸고 이기면 가져만 가는… 과연 그런 조건에서 형이 얼마큼 긴장을 하고 절실할지 난 회의적이거든.”

오늘 정태 놈이 내게 보여 준 악착같은 모습은 사실상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다.

정석이라고 봐야지.

잘하고 있다는 생각.

몰아붙이고 있는 상대가 정엽이라는 부분이 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사업이라는 게 어디 상대를 가릴 수가 있는 것일까.

현 재경가의 장남으로서 정태가 보여 주고 있는 악착같은 모습은 내 눈에 기특해 보일 정도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엽이 놈까지 날 놀라게 만든다.

“나도 아까 안에서 작은아버지가 중간에 이야기 끊으실 때 많이 아쉬웠어.”

“……?”

“나도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가는 게 맞는 거 같았거든. 네 말대로 내가 그 정도도 안 걸고 지분 지원만 바라면 그건 구걸이잖아.”

그렇게 말한 다음 날 쳐다보며 정엽이가 말을 이었다.

“작은아버지 찾아가서 구걸이나 하겠다고 지난 세월을 한국에도 못 들어오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게 아니야. 그리고 그 구걸을 나만 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젠 둘 다 알겠지만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엔 미래금융의 지분이 꽤 돼. 이번 건 때문에 미래금융이 사돈가에 구걸까지 하는 모습을 내가 만들 순 없지.”

“아무리 그럴싸한 서사가 있다고 해도, 상식 밖의 행동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서로 경계를 하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니까 오해 없었음 좋겠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내가 해 온 노력이 누군가의 눈에 상식 밖의 행동으로 비치는 건 나도 싫거든. 어떻게 해 줄까?”

“뭘?”

“따로 계약서 같은 걸 써서 문서로 남겨 줄까?”

“우린 또 그런 걸 자발적으로 해 주겠다고 하면 굳이 사양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하자. 해당 내용은 누구한테 보내면 되지? 너? 아님 작은아버지? 아, 그냥 정태 너한테 보내는 게 맞겠다. 안에서 작은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만 봐선 내가 보내 드려도 안 받겠다 하실 거고.”

“그럼 나한테 보내. 보관만 내가 하고 있으면 되는 거지. 설마 그걸 쓸 일이야 있겠어?”

그때까지도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었지.

아니, 생각이 아니라 오해라고 해 두자.

확실히 보고 배운 게 정엽이보다는 정태가 많을 수밖에 없었겠다는 오해.

홍준이가 재경을 이끄는 동안 얼마나 옆에서 보고 배운 게 많았겠나.

반면에 정엽이는 아무리 태산이가 영석이, 영우를 시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보고 배운 게 적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딜을 조절하는 경험치가 부족할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태가 먼저 차를 타고 출발한 뒤 담배 한 대를 내게 권해 놓고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정엽이의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왜 그렇게 웃어?”

담배 연기를 뱉어 놓고 정엽이에게 물었다.

그에 정엽이도 함께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결국은 지분 확보하는 데 성공을 했잖아.”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웃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왜 그런 약속을 했어? 결정권은 손정태가 아니라 회장님이 가지고 있는 거야. 그 결정권자가 지원을 하겠다 했고. 그게 구걸이면 어떻게 아니면 어때?”

“정훈아.”

제법 어린 동생을 대하는 형의 모습을 하며 정엽이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참 고마워.”

당연히 그렇겠지.

“그날 부산에서 네가 해 준 쓴소리 듣고 정신을 번쩍 차렸어. 그렇지. 여긴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이지? 그래, 맞아. 그럼 내가 한국 스타일에 맞추는 게 맞는 거지.”

“……?”

“너 혹시 그거 알아? 어째서 프랑스에서 예술이 발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글쎄?”

“인간들이 다들 자기 멋대로거든. 푸조 같은 자동차 회사, 로맹 제롬 같은 시계 회사가 있어도 그런 정밀 산업은 발전할 수가 없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야. 왜? 시키는 대로 안 하거든. 스탠다드를 가져다줘도 그걸 안 보고 자기 맘대로 해. 타이어 벨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백 번을 감아 줘야 한다고 해도 육십 번, 칠십 번만 감고 백 번을 감았다고 하는 사람들이야. 시계 무브먼트 헤르츠는 이천짜리를 쓰라고 해도 그러겠다고 해 놓고 표가 안 나니까 그냥 막 천이백짜리, 팔백짜리를 갖다 넣는 애들이야, 걔네들이.”

“…….”

“반면에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스탠다드를 잘 지키지. 아주 병적이야. 현대, 기아에서 차 만들어 내는 거 봐. 기술적으로 깔 데가 없잖아, 더 이상. 너 한국에서 지하철 타 본 적 있어?”

“있겠냐?”

“놀라워. 그게 어떻게 지하철이야? 호텔이지. 이렇게까지 사회적 약속을 잘 지키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 일본? 아니, 이젠 한국 사람들이 한 수 위야.”

“뭔 쓸데없는 소릴 계속 늘어놔?”

“5년. 최소한 계약서 하나 써 주면 그 5년 동안은 정태가 섣불리 못 움직일 거란 소리야.”

“……!”

와….

나 지금 정엽이 놈한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거 같은데?

“네 눈엔 내가 우스워 보이고 그래서 걱정이 되나 본데, 마음은 고맙지만 따끔한 충고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정훈아. 나 이래 보여도 지난 10년간 더 이상 영우 삼촌의 도움 없이 아시아 페이스로 그 페이크 많은 프랑스인 사이에서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200퍼센트 키워 낸 사람이야. 내가 스탠다드에 맞춰 정공법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게 익숙지 않아 어려운 거지, 정공법에 익숙한 상대를 상대하는 건 너무 쉽다는 말이야.”

“허, 허, 허허허. 하하하하하하….”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참아지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내가 한참 동안 뭘 잘못 먹은 놈처럼 크게 웃었더니 정엽이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함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다고?

좋다, 기분이다.

그럼 정엽이 너도 오늘 이 할애비 눈에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다!

“5년이면 충분해. 5년도 안 걸려. 애초에 너희 집이 잡고 있는 12퍼센트 지분은 기대도 안 하고 준비해 오고 있었던 내용이야.”

“알고 있어.”

“결국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게 되어 버렸지만, 사실 내가 드모어를 앞세워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너희 집에서 태클을 걸어올 거란 생각도 계산에 넣고 있었고. 그런데 네가 날 찾아와서 결심을 빨리하란 소릴 듣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지. 문제는 정태였는데, 계약서 하나 써 주기만 하면 5년 동안 지켜만 보겠다고 하잖아. 얼마나 고마워? 지금부터 난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건데.”

“얼마나 힘 있게 달릴 수 있을지, 지켜볼게. 기대된다.”

담배 불씨를 튕겨 끄며, 정엽이가 말했다.

“어제 쁘띠 기뿔리 대표하고 통화를 했어. 급한 건이라고 빨리 움직여 줘야 할 거 같다고 했더니 다음 주 월요일 비행 편으로 한국에 들어오겠다고 하네.”

“빨리도 잡았다.”

“너무 급한 거 같으면 일정을 조금 뒤로 미루라고 할게.”

“아냐, 나중에 집에 가서 그 사람 일정 받은 거 있으면 문자나 메일로 보내 주기만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럴게.”

“쁘띠 기뿔리 대표는 날 상대로 정직하게 비즈니스를 하겠지?”

웃자고 한 말이었다.

그 웃자고 한 말에 정엽이도 웃자고 대답했고.

“나는 너보다 그 친구가 걱정이다. 살살 해. 그래도 나랑 벌써 7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야.”

“허허허….”

“널 내 코리아 보스라고 소개해 놨어.”

“…….”

“날 보스처럼 대해 주는 친구고. 그날 부산에서 나한테 했던 것처럼 너무 물어뜯지는 마.”

“걱정 마. 말만 잘 통하면 먼 길 오는 손님인데 손님 대접 잘해서 보내야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더 걱정스러워지는데?”

* * *

며칠 뒤, 월요일.

인천 국제공항.

쁘띠 기뿔리의 CEO 마몬 퓌에리가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행한 두 명의 수행원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한국 일정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암시라도 하듯, 작은 기내용 슈트 케이스를 하나씩 끌고 나왔다.

재경식품에서 의전을 나온 사람들도 정장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쁘띠 기뿔리 측 사람들을 단번에 알아봤다.

“퓌에르 씨?”

마몬 퓌에르는 재경식품에서 나온 사람 중 가장 앞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의 유창한 불어에 과장된 표정으로 놀람을 전달했다.

“재경식품 의전팀에서 나왔습니다. 한국 일정이 촉박하게 잡혀 있단 이야기를 전달받고 호텔은 공항과 본사 중간쯤 위치에 있는 곳으로 잡아 놨습니다.”

“완벽합니다.”

“지금 바로 호텔로 이동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셨다가 11시까지 본사로 모시는 스케줄을 잡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때부터 퓌에르 일행은 조금씩 위축이 되고 있었다.

재경 그룹.

기업의 정확한 규모까지는 확인을 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공사를 가지고 있는 대기업.

베이커리 프렌차이즈 기업인 쁘띠 기뿔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상대.

그들이 갖추고 있는 의전 시스템 역시 너무나 체계적이고 빈틈이 없어 퓌에르 일행을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로 미팅을 하러 가는 게 아니고요? 저희는 그러는 줄 알고 일부러 내리자마자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건데요?”

“상관은 없을 거 같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제가 전화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우선 같이 가시죠, 차는 저 앞에 대기 중입니다.”

재경식품의 의전팀장이 구사하는 불어는 로컬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청사를 빠져나오는 동안 의전팀장은 본사로 전화를 걸어 퓌에르 일행을 만났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그리고 그들이 중간에 호텔 체크인을 하고 만남을 가지는 거보다, 손정훈 본부장과 미팅을 먼저 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달하고 답을 기다렸다.

재경식품 본사에서 의전용으로 보낸 두 대의 제네시스 차량.

퓌에르 일행이 가져온 슈트 케이스는 차 두 대에 나눠서 실었지만, 실제 인원은 한 차에 모두 다 같이 탔다.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맨 의전팀장이 강인성 비서실 차장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통화 내용을 퓌에르 일행에게 전달했다.

“본사에서는 퓌에르 씨와의 미팅을 11시로 잡고 있었습니다. 사장님과 전무님이 손정훈 본부장님과 함께 참석을 하시는 미팅인 만큼, 미팅 시간을 앞당기긴 힘들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10시에 중국 공장 쪽과 화상 미팅이 잡혀 계시다고 하네요.”

“괜찮습니다. 그럼 호텔 체크인부터 한 뒤에 재경식품이 미리 잡아 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이도록 하죠.”

“그런데 본부장님께서는 시간이 괜찮으시다고 하네요.”

“본부장님이라는 분이 미스터 손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손정훈 본부장님.”

“저희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미스터 손이니까요. 그렇게 하시죠. 미스터 손과 먼저 만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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