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며느리 역할 제대로 할게요
어느 봄의 화요일.
부경호텔 소공동점의 대연회장.
경영권 교체에 관한 의결을 위해 지난주 있었던 긴급 이사회에조차 일부러 참석을 하지 않았던 장혜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 그게 그녀가 자신의 언니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손정엽을 부경호텔의 새로운 경영자로 지지하는 것과, 자신의 언니를 호텔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벌써 가시게요?”
작은 클러치 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혜란을 향해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언니와 그 반대쪽에 앉아 있는 정엽이의 모습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다 봤잖아요. 주저리주저리… 내가 새 대표의 부임 소감까지 다 듣고 앉아 있을 필요가 있겠어요?”
“…….”
“끝나면 정엽이한테 축하한다고 말만 좀 전해 줘요.”
“…네.”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런 노년을 기대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제 손으로 동생의 것을 빼앗고, 이젠 언니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것마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도왔다.
장혜란이 희망했던 자신의 노년은 거창할 게 없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이미 다 경험을 해 봤고,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성가신 것들인지도 이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저 자신의 가족들, 남편의 건강과 자식들이 서로를 위하며 함께 재경이라는 그늘 아래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자신의 형제들과 아무 고민 없이 가깝게 지내며 함께 아름답게 늙어 가는 것.
그것 말고 바라는 게 뭐가 더 있었나.
그런데 그게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그녀의 두 아들은 재경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고, 그 눈치 싸움 끝에 본가를 향하는 발길마저 뜸해졌다.
그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부추기고 있는 남편 역시 언제부턴가 처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장혜란 그녀가 직접 손정엽의 손을 들어 준 이 결정으로… 그녀는 자신의 언니까지 잃었다.
혼자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
주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
이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지 쥐고 있는 부경물산과 부경건설의 계열 지분뿐이라는 생각.
갑자기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차창에 날아와 부딪힌 빗방울이 꽤 굵게 방울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 장혜란은 차고 안에 세워져 있는 며느리, 원수경의 차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얘는 온다는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현관물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승현이가 집안일을 도와주는 도우미와 함께 거실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사모님, 오셨어요.”
“애들 언제 왔어요?”
가사 도우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주방 쪽에서 앞치마에 물 묻는 손을 닦아 내며 원수경이 나왔다.
“일찍 오셨네요, 어머니?”
“넌 언제 왔어?”
“저희는 한 시간 정도? 조금 더 됐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거기 호텔 주총 10시 아니었어요?”
“온다는 말도 없이….”
“어머니 심란하실 거 같아서요.”
“뭐?”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며느리가 함께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냥요. 제가 감히 오늘 같은 날 어머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 제가 만약 어머니 입장이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호들갑이냐는 듯 피식하고 웃어 보였지만, 장혜란은 며느리가 마음을 쓰는 게 예쁘게만 보였다.
“그나마 친정 형제분들 중에선 이모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셨잖아요. 오늘 자리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니.”
무뚝뚝한 아들놈들과는 이번 후계자 경쟁으로 거리가 멀어진 것 같지만, 그나마 살가운 며느리는 변하지 않고 자신의 옆을 지켜 주고 있다는 생각에, 장혜란은 괜히 그 관심이 고맙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얼른 손자를 들어 안은 장혜란은 말없이 주방 쪽으로 향했다.
“무슨 냄새야? 뭐 하고 있었어?”
“고구마 맛탕 좋아하시잖아요. 오늘 같은 날은 적당히 단 걸 먹어 주는 것도 좋으실 거 같고.”
“번거롭게 그걸 또 집에서 한다고… 됐어, 하지 마.”
“거의 다 했어요.”
“아줌마들 시켜. 아줌마들 시키고, 너는 나랑 같이 커피나 한잔하자.”
“그럴까요?”
“아 참, 밖에 비 온다.”
“그러니까요. 저 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승현이를 안고 다시 거실로 나온 장혜란은 거실 전체창을 통해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원수경에게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점심에 밥 먹지 말고, 아줌마들한테 부침개 부치라고 해서 커피 말고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씩 할까?”
“막걸리 생각 나세요?”
“비가 오잖아.”
“그래요, 그럼. 마음 편하게 어머니랑 막걸리 마시려면, 저는 지금부터 승현이를 재워야겠어요.”
“그렇게 해라. 비도 오고, 노곤하게 잠 잘 올 거다.”
* * *
남편을 재경의 차기 주인 자리에 앉히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를 승현이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원수경이 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자신의 친정이 미래금융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집안이지만, 원수경은 그 부족함을 채울 만한 근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재경가에 들어와 지난 5년을 어떻게 지내 왔던가.
철저하게 시어머니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재경이라는 큰 집안을 이끌고 계시는 시아버지에게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치밀함까지 철저히 지켜 내며 자신의 욕망을 숨겨 왔던 원수경이 아니었던가.
“하늘이하고는 가끔씩 연락을 하고 지내?”
“하늘 씨요?”
“하늘 씨가 뭐니? 나이도 한참 아래고, 어쨌거나 곧 네가 손위 동서 되는 사람인데.”
“따로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서요.”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기회가 찾아온다니? 어색해도 밖에서 따로 만나고, 이야기도 자주 하고… 그렇게 해야지.”
“하늘 씨가 저처럼 한가한 사람인가요, 어디. 미래금융 후계자로 이젠 본사 생활 시작한다고 하는 거 같던데. 곧 서로 편해지고 나면 호칭 정리 하도록 할게요. 호칭 정리 전에 도련님 장가가 먼저예요, 어머니.”
장혜란과 원수경은 2층 거실에서 분위기를 내겠다고 낮은 상을 펼쳐 놓고, 그 위에서 막걸리 술상을 받았다.
그 거실 한쪽엔 이동용 유아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승현이를 재워 놓고 낮은 수면 음악을 틀어 놓았다.
“너는….”
장혜란은 며느리를 불러 놓고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어머니의 모습에 얼른 원수경이 대답했다.
“네.”
“하늘이 말이야. 어떤 거 같아?”
“하늘 씨요? 예쁘죠. 너무 부러워요.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나이 아니에요. 하늘 씨만 보고 있으면 딱 그 나이 때의 제 모습도 생각나고….”
“시어머니 앞에 앉혀 놓고 못 하는 말이 없네.”
“히히. 그냥요. 너무 예쁘다고요.”
“예뻐?”
“예쁘죠. 생긴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똑똑해, 자신감 넘쳐, 거기다 싹싹하기까지 해. 저는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 같아요.”
“왜?”
“자상하신 시아버지에, 뭐 하나 예쁜 구석도 없을 텐데 친딸처럼 챙겨 주시는 따뜻한 시어머니, 거기에 다정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들. 그런데 이미 이렇게 완벽한 집안에 새로 들어오는 새 식구가 하늘 씨처럼 너무 예쁜 사람이에요. 도대체 몇 번을 다시 태어나야 지금 저처럼 이런 완벽한 집안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 볼 수 있을까요?”
자신에겐 부족한 감성을 가진 며느리를 장혜란은 진심으로 예뻐하고 아꼈다.
“하늘이가 싹싹해?”
“어머? 그걸 어머님이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저보다 더 오래 아셨잖아요. 너무너무 싹싹해요. 경우도 도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바르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 자체가 그냥 너무너무 예뻐요.”
“너는 다 좋은데, 그게 문제야.”
“뭐가요?”
“사람이 너무 선해. 너무 선질이야. 네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너처럼 선하고 아무 계산 없이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올 거라고 믿는 거고.”
“제가요?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얼마나 계산적인데요? 우리 어머님이 아직도 절 잘 모르시네.”
“네가? 하! 네가 계산적이야? 네가 조금만 계산적이었어 봐라. 내가 오늘처럼 이런 불편한 일을 처리하고 올 일이 있었는지.”
“그게 무슨….”
“어쩜 너는 애 엄마까지 돼서 아직까지 순둥순둥, 아직도 세상 물정을 그렇게 몰라?”
“제가…요? 제가 왜요?”
막걸리 한 잔에 벌써 취한 것일까.
장혜란의 입에서 평소였다면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을 진심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정엽이가 들고 있는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거기에 미래금융 지분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알아?”
“많아요?”
순간 원수경은 자신이 펼친 연기에 스스로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40퍼센트 넘게 들어가 있다.”
“헉. 우와 엄청 많네요?”
“우리 집안 몰래, 뒤에서 정엽이 앞에 세워 놓고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키워 낸 게 바로 미래금융이라고. 얼마나 응큼하니? 뒤에선 우리 몰래 그렇게 해 놓고, 앞에선 세상 신사인 척 스너프 쪽으로 투자 지원하고 사돈을 맺자고 하고 있어.”
시어머니가 하고 계실 생각을 이렇게 직접 말로 듣게 된 건 원수경 입장에서는 아주 큰 수확이었다.
“네가 조금만 네 말대로 계산적이었어 봐라. 네 남편이 정엽이 쪽으로 호텔 지분을 지원해 주자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겠어?”
“못 하게 해야 했던 거예요?”
“이렇게 순둥순둥,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고 있는 널 상대로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넌 네 남편을 지금처럼 계속 저렇게 동생이랑 회사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만들 거야?”
“미래금융처럼 실력 좋은 회사가 우리 집안이랑 합쳐지게 되면 결국 길게 놓고 봤을 땐 우리한테 좋은 거 아니에요?”
“우리?”
“네, 우리요.”
“에휴, 그래. 네 말이 맞는다. 우리가 맞지. 그런데 수경아. 네가 말하는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은 우리일 거 같니?”
“그게 무슨….”
“네가 말한 그 우리 재경이라는 곳 안에서 미래금융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네 남편만 힘들어지는 거야. 내가 이런 거까지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거니? 어쩜 넌 하나만 알고 둘을 몰라.”
“죄송해요. 제가 많이 부족해서….”
“그걸 왜 네가 나한테 죄송해해? 이렇게 마음까지 약하면 어쩌자는 거니? 내가 참 걱정이 된다, 걱정이 돼.”
“저는 그저 도련님도 제가 너무 좋아하고, 하늘 씨도 몇 번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인상이 너무 좋아서, 이번 일로 어머님이 많이 힘드실 걸 알면서도 결국 우리 재경 입장에선 잘된 일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네 말이 맞아, 수경아. 나만 조금 힘들면 돼. 내 새끼들, 우리 집안 챙기는 게 먼저지 내 형제 집안일까지 내가 무슨 수로 다 내 일처럼 알뜰하게 챙기겠어? 그리고 정훈이는 어디 뭐 내 아들 아니니? 똑같이 내 배 아파서 나은 내 자식이야. 내 아들이라고.”
“그런데요?”
“그러니 내가 지금 속이 타는 거지. 정훈이 처가가 될 집이 저렇게 응큼하고, 이젠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는데, 앞으로 네 남편이랑 정훈이 관계가 좋을 수가 있겠어?”
원수경은 속으로만 미소를 지으며, 얼굴엔 말도 안 된다는 듯 시어머니의 생각을 기우라 치부하는 표정을 띄워 놓고 말했다.
“누구보다 자기 동생을 아끼는 사람이에요. 승현이 아플 땐 저더러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하면서 도련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는 사람이라고요. 저도 하늘 씨가 정식으로 우리 가족이 되고 나면 그렇게 할 거고요. 저는….”
급기야 부끄럽고 미안한 표정까지 서슴없이 연출해 내는 원수경이었다.
“저희 집안이 하늘 씨 집에 비해 너무 부족한 거 같아서, 그게 요즘 너무 죄송스러워요.”
“무슨 그런 말을 해.”
“제가 하늘 씨처럼 능력이 좋지는 못해도, 미래금융처럼 저희 집안이 재경 그룹에 큰 도움이 되어 주진 못하더라도… 대신 어머님, 아버님 걱정 안 하실 수 있도록 제가 ‘맏며느리’ 역할 제대로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중간에서 잘할 테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