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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제가 한 말 못 들었어요? (185/303)

방금 제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스너프 본사 앞 카페.

스너프의 직원 명찰을 달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사장 손정태가 그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서로 마주 보고 앉은 하늘이와 정태 사이엔 아직 어색한 기류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 지금 긴장하고 있어.”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정태가 먼저 입을 열었고, 긴장이란 표현 앞에 하늘이는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왜?”

“또 내가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해서. 어쩐 일이야?”

“이야기 들었지? 부경호텔.”

“어. 정엽이 형이 대표 자리 잡았다고 들었어. 그렇게 될 거였잖아.”

“조심스러웠어.”

“뭐가?”

“진작에 그날 있었던 일로 오빠랑 자리를 한번 만들고 싶었어. 그런데 정엽이 오빠가 부경호텔 대표 자리 잡기 전에 만나서 그날 있었던 일 풀겠다고 하면, 괜히 오빠 입장에선 내가 속 보이는 짓을 하는 거라 오해를 할 수도 있겠더라.”

“그날도 내가 일부러 오해를 했던 거지.”

“내가 먼저 할게, 오빠. 일부러 오해를 한 건 오빠가 아니라 내가 했던 거고, 그래서 사과도 내가 먼저 하고 싶어.”

하늘이는 그간 진심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정엽이에 관한 내용, 그리고 그 내용을 꺼내는 정태의 입장을 몰랐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두 번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풀 액셀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하늘이에게도 그만큼의 이유는 있었다.

“그날은 내가 오버를 했어. 아마 오빠가 해 주는 걱정을 일부러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모양이야.”

“혹시 정훈이가 나 만나서 그날 있었던 일 사과하래?”

“그렇게 말하면 힘들게 찾아온 내 입장이 뭐가 돼?”

“왜?”

“정훈이 오빠가 시켜서 찾아온 거라고 하면 내 진심이 줄어드는 거고, 아니라고 하면 정훈이 오빠는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게 되어 버리잖아.”

“그렇게 되나? 정훈이도 그날 너랑 나 사이에 있었던 일 신경을 쓰고 있어?”

“…….”

“신경도 안 쓰고 있구나.”

“누구보다 오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야.”

“누가? 정훈이가?”

정태는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가벼운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오빠랑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쉽게 오빠 편을 못 들었어. 오빠, 그리고 우리 미래금융과 묶여 있는 스너프 때문이었겠지.”

“억지다, 그건.”

“억지 아니야. 진짜 그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랑 이유 없이 만난 적이 없어. 항상 사업, 사업과 관련된 다른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사람이야. 그래야 만나. 그래서 난 지금도 이유거리를 만들고 있고.”

“……?”

“그중에서도 정훈이 오빠가 가장 관심 있게 묻고 이야기하는 게 바로 스너프고.”

“부경호텔 아니었고?”

“전혀. 나랑 부경호텔에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없었어. 아마 그건은 우리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거 같아. 난 항상 할아버지 통해서 손정훈의 생각을 듣고, 이해를 해야 했거든.”

하늘이는 다시 한번 그날 자신이 밟았던 풀 액셀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날 일은 내가 정말 미안해. 도둑이 제 발 저렸어.”

“그렇게까지 표현을 할 내용은 아니고.”

“그렇게까지 표현을 해서라도 사과를 해야 하는 상대니까. 나 진짜 오빠랑 서로 어색해지는 거 싫거든.”

“어색해질 이유가 어디에 있어? 이미 이렇게 다 풀고 있는데.”

“사과받아 주는 거야?”

“내 사과도 네가 받아 주면. 그날은 나도 좀 많이 갔어. 사방에서 나만 공격해 들어오는 그런 기분이었거든. 물러설 곳이 없는 거야. 그러는 와중에 정엽이 형이 부경호텔 대주주 중 하나인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대표라는 걸 알게 되고, 그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너희 미래금융가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니까, 사람이 딱 미쳐 버리겠더라고.”

“지금도 나, 우리 미래금융 쪽으로 배신감 많이 들고 있을 텐데?”

그 말에 정태는 고개를 짧게 흔들어 놓고 대답했다.

“이해를 해 보기로 했어. 너희 할아버지가 20년 전부터 너랑 정훈이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갈 걸 미리 알고 계셨을 리가 없잖아. 정엽이 형 앞으로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준비하신 건 20년도 더 전이고. 부경이 하고 있는 호텔 사업을 다시 정엽이 형 앞으로 가져오겠다는 계획을 잡으셨을 당시, 당연히 너희 할아버지는 우리 집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으셨어. 내가 그 부분을 그날 억지로 끼워 맞춰서 너한테 서운함을 표현했던 거고.”

“그 부분은… 솔직히 나도 좀 불편해.”

“그렇겠지. 충분히 이해해. 그러서 쪽팔리는 거고. 네 입장 모르는 거 아닌데, 알면서 그런 자리 만든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그 상황 자체가 짜증 나고 답답했던 모양이다.”

하늘이가 테이블 위로 챙겨 온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건 뭐야?”

“피드백.”

“무슨 피드백?”

“그날 나 찾아와서 스너프가 앞으로 집중할 웹 콘텐츠 사업 기획안 보여 줬잖아. 표정이 왜 그래? 설마 그 기획안은 그날 자리 만들겠다는 핑계였던 거야?”

“그럴 리가.”

“진짜 신경 많이 써서 만든 피드백이야.”

“그럼 하늘이 실력을 좀 볼까?”

“그걸 내 실력이라고 믿으면서 보면 깜짝 놀랄걸?”

“그럼?”

“말했잖아. 진짜 신경 많이 써서 만든 피드백이라고. 우리 미래기획 쪽 드라마 영상투자팀이 다 달라붙어서 만든 피드백이야.”

그 말에 정태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마치 뭘 그렇게까지 신경을 썼느냐는 식으로.

“오빠네 기획 자체가 현재 드라마 영상투자팀이 포커싱하고 있는 쪽이랑 거짓말처럼 딱 맞아떨어졌어. 어쩔 수 없지. 웹 콘텐츠 IP 기반의 영상화가 이젠 대세니까.”

정태는 처음 한두 장은 형식상 넘기다가 그 뒤부터는 숨도 쉬지 않고 집중을 해서 미래기획이 체크해 준 피드백을 확인해 나갔다.

“우리 쪽 드라마 계약된 작품들 진행이 더딘 이유가 이거 때문이야?”

“아마 판권을 가져간 제작사 쪽에선 이런저런 핑계들을 갖다 붙일 거야. 실제 그 핑계들이 진짜 이유일 경우도 더러 있고. 그런데 오빠네 작품 중에 영상화 계약이 된 작품들을 우리가 신경 써서 확인을 해 보니까 문제점이 많아. 그 내용이 지금 오빠가 보고 있는 내용들이고.”

“결국은 장르의 한계라는 거네.”

“그렇지. 원작 자체는 좋아. 문제는 이게 2차 창작물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사 영상 쪽으로 가기엔 투자 비용이 너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 그걸 드라마 작가들이 현실적인 제작비 안에서 각색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쉽지가 않지.”

“그래서 우리 스너프 웹 콘텐츠 사업부가 남성향 판타지 쪽보다는 여성향 로맨스 쪽을 더 키워 낼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참고로 현재 미래기획에서 웹 콘텐츠 IP 기반의 영상화 쪽으로만 집중을 할 투자팀을 새로 꾸리고 있어. 당연히 투자 대상 우선순위는 스너프 웹 콘텐츠 사업부 독점 작품 위주로 가게끔 지시를 내려놨고.”

한쪽 입꼬리에 미소를 걸어 놓고 정태가 농담을 던졌다.

“우리 종종 싸울래?”

“뭐?”

“돌아오는 게 너무 큰데? 하하하. 근데 그걸 네 마음대로 그렇게까지 해도 되냐?”

“당연하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신의 명함을 끼워 놓고 하늘이가 말했다.

“지난주부터 본사에서 기획 투자 총괄로 있거든. 미래기획 관련 투자 내용은 다 내 소관이야. 본사 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지금 상태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기획투자 쪽이기도 하고.”

“하늘이 네가 고민 중이던 나한테 확신을 주는구나.”

“고민할 게 전혀 없어 보이던데? 이미 우리 쪽 피드백 없이도 훌륭한 기획이었어.”

“아니, 그거 말고 딴 게 있어.”

“딴 거? 뭐 암튼. 오늘 몇 시에 퇴근해? 화해한 기념으로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내가 조금 이따가 다른 약속이 있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다음에 하면 되지. 아 참, 맞다. 그건 어떻게 됐어?”

“그거? 뭐?”

“부경통신이랑 제휴 깨진 거. 지난주에 뉴스에도 나왔잖아. 딱 봐도 부경통신 쪽에서 돈 주고 만든 영상이긴 했지만. 아예 작정을 하고 스너프를 몰아가던데? 그거 부경통신에서 먼저 제휴 해지하자고 했던 거 아냐?”

“맞아.”

“근데 왜 그래? 왜 딱 봐도 스너프 백화점인 거 알겠던데, 거기에 모자이크를 씌우고 소비자들이 자기네 할인 혜택을 더 이상 못 받게 된 걸 스너프의 일방적인 변심 때문인 것처럼 기사를 만들어?”

“그러게. 그런 인간이 우리 가족인 게 너한테 쪽팔릴 지경이다, 내가 지금. 그렇지 않아도 그쪽이랑 약속이 있어.”

“아, 그래? 좋게 풀기는 힘들 거 같던데….”

“좋게 안 풀겠다고 내가 지금까지 그런 뉴스 기사가 나오는 거 다 무시해 가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더는 안 참아 주려고.”

* * *

부경통신 본사 건물 앞.

회색의 재규어 차량 한 대가 그 앞으로 멈췄다.

운전석 문이 먼저 열렸고, 그 운전석에서 내린 인물은 서둘러 반대쪽 뒷문을 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재규어 차량의 날렵한 모습만큼이나, 날카로운 인상의 정태가 표정까지 굳힌 후 풀고 있던 재킷 단추를 채우면서 차에서 내렸다.

“끝나면 전화할게요.”

“네.”

운전기사가 차에 올라 지하 주차장으로 사라졌음에도 정태는 여전히 부경통신 본사 건물 앞에 서서 건물의 높이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어렸을 땐 부경통신이 아주 큰 회사인 줄 알았다.

그리고 부경통신의 주인 역시도 아주 큰 사람인 줄 알았고.

그래서 어려워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의 앞에서 그러하셨으니까.

하지만 어느덧 서른의 중반을 넘긴 정태에게 부경통신, 그리고 그 부경통신의 주인은 더 이상 크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만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지난주 언론을 움직여 스너프와 재경 그룹을 압박했던 그의 얕은수를 보며, 정태는 긴장이 아니라 여유를 느꼈다.

그의 바닥과 한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손정엽이 부경호텔의 새로운 대표로 올라섰단 이야기를 듣고 지난주 내내 일부러 전화를 피했던 장선길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스테이지.

현재 스너프와 부경통신 사이에 오고 간 마찰을 정태는 부경호텔과 연계시킬 마음이 없었다.

그게 지난 한 주 일부러 장선길 회장의 연락을 피했던 이유였다.

부경호텔 건과 연계를 시키게 되면, 스너프와 부경통신 사이에 벌어진 어색한 관계도 동시에 일단락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정태가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대기 중이던 부경통신 쪽 직원 한 명이 곧바로 회장실로 안내했다.

“아이고, 우리 조카! 이쪽으로 와.”

장선길 회장은 정태를 데리고 온 직원에게 커피 한 잔을 새로 넣으라고 지시한 후 정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다른 손으로는 정태의 반대쪽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지금껏 보지 못했던 친밀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부경통신 회장실 안으로는 다른 인물 셋이 함께 모여 있었는데, 그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스너프 사장, 손정태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정태에게 상석 바로 옆자리 소파를 양보하며, 미리 모여 있던 인물들은 각기 한 자리씩 옆으로 이동했다.

“혹시 이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인 겁니까?”

정태는 자리에 미리 모여 있던 인물들과 인사를 나눌 생각 따윈 전혀 없음을 표정으로 보여 준 뒤 장선길 회장에게 물었다.

그에 장선길 회장은 흐물거리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지난 2주 사이에 엉킨 내용이 많잖아. 풀어야지.”

“글쎄요, 뭘 어떻게 풀자고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분들이 함께 자리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있겠습니까? 집안 문제에 남이 끼어들면, 제 입장에선 지켜야 하는 예의마저 느슨해질 거 같은데요?”

눈치 빠른 장선길 회장은 재경 그룹을 대표해서 이 자리를 찾아온 정태가 평소 집안 모임에서 줄곧 보아 왔던 모습과 아예 딴사람이 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미리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에 한 인물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

“왜?”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부분은 한시가 급한 내용이라 이 부분만 제가 확인을 받고 자리를 비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거. 그래, 그렇게 해. 그건 진짜 한시가 급하다. 빨리 정상화를 시켜야지.”

정태는 그들이 하고 있는 모습에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장선길 회장.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다른 사람의 상태 따윈 안중에도 없는 인물이지.

그걸 알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인정하는 건 금방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던 자리엔 차가운 이성만이 들어차고 있었다.

“손정태 사장님. 부경통신 법무팀장 노경환입니다. 지난 2주일간 스너프에서 일방적으로 저희 쪽 제휴 서비스 혜택을….”

“저기요.”

얼음보다 차갑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그 음성보다 더 섬뜩한 눈빛으로 정태가 말했다.

“방금 제가 한 말 못 들었어요?”

“…….”

회장실 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장선길 회장도 정태가 이렇게까지 경우 없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 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는 중이었다.

“집안 문제에 남이 끼어들면, 제 입장에선 지켜야 하는 예의마저 느슨해질 거 같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는데?”

“…….”

“그렇게 급한 내용이면 난 잘 모르겠으니까, 협박을 하든 구걸을 하든 해서 우리 쪽 법무팀장하고 직접 이야기를 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하는 게 법인데, 지금 이 기분에 나랑 같이 그걸 이야기하자는 게 말이 되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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