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게 좀 있어
재경식품 중앙개발연구소(재경 R&D CENTER), 관능평가실.
비스킷·파이팀의 선임 연구원 조가영으로부터 삐에르 에슈메 마카롱을 완벽하게 카피해 낸 시제품이 만들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꼬박 두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두 달 동안 조가영 선임은 보름간 일정으로 직접 파리에 넘어가 삐에르 에슈메의 베이커리뿐 아니라 식자재 관리, 매장 운영에 관해서도 꼼꼼하게 연구 분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시간과의 싸움.
처음 식품으로 넘어와 삐에르 에슈메를 모델로 디저트 숍 오픈에 관한 프로젝트를 던졌을 때, 내가 가장 신경을 써서 주문을 했던 건 가성비도 아니었고 콘셉트도 아니었다.
바로 맛.
삐에르 에슈메가 가지고 있는 마카롱과 티라미수의 맛이었다.
내가 처음 파리에서 경험해 보고 감탄을 숨기지 못했던 삐에르 에슈메의 맛을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그대로, 똑같이 전달을 하기 위해선 맛을 만들어 내는 것 이외에 유통이라는 시간을 정복해야만 했다.
마카롱의 경우 상온 보관으로는 최대 3일, 티라미수는 24시간.
여기에 유통 과정에서 냉장 보관이라는 편의를 적용시켜 버리면 내가 원하는 사업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재 재경식품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통 공급망.
그 유통 공급망의 한계를 스너프가 가지고 있는 물류 시스템의 도움으로 해결해 보라는 지시를 내리기가 무섭게, 조가영 선임은 자신의 역할 이외의 것들까지 완벽하게 수행해 나갔다.
더불어 같은 유통 공급망을 사용하게 될 쁘띠 기뿔리의 국내 1호점 론칭이 가속화됨에 따라 식품 자체적으로 스너프의 물류 시스템을 카피한 독자적 물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그 의견을 토대로 구체적인 내용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내가 앉은 관능 평가 책상 위로 딸기 맛 마카롱 세 개가 올라왔다.
작은 스테인리스 쟁반 위로 세 개가 올려져 있었는데, 각각의 마카롱 옆으로는 제조 3일, 제조 2일, 당일 제조라는 손글씨가 적힌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내가 시작할 관능 평가를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은 우리가 제품 폐기일로 잡아야 하는 제조 3일 차 마카롱부터 한 입 베어 먹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게 3일 차짜리라고?
“으음….”
혀끝으로 잇몸 사이에 번져 있는 맛을 모두 긁어 놓고, 물 한 모금으로 입을 헹궜다.
그리고 제조 2일 차 마카롱을 살짝 베어 먹었다.
난 3일 차짜리 마카롱을 먹었을 땐 따로 남기지 않았던 코멘트를 2일 차 마카롱을 테스트한 후 키보드를 이용해 남기기 시작했다.
제조 2일 차짜리 맛이 이런데, 굳이 당일 제조된 거까지 맛을 봐야 할까 싶은 마음.
하지만 다시 한번 물 한 모금으로 입을 헹궈 놓고 마지막 남은 평가 제품까지 한 입 베어 먹었다.
세 마카롱의 맛을 모두 비교한 후였기에 당일 제조 마카롱은 아예 통째 입에 넣어 버렸다.
혹여나 입에 든 음식물이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눈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난 마카롱을 다 씹어 삼킬 때까지 관능 평가 책상 속으로 내 표정을 숨겨 놓고 코멘트 작성에만 집중했다.
“아무래도 딸기 향이 첨가가 되어서 그런 거겠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묻자, 조가영 선임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맛에 차이가 느껴지셨습니까?”
전혀.
아예 작정을 하고 차이점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런데도 못 찾았다.
“아뇨, 미세하게나마 3일 차짜리하고 2일차 짜리 사이에 질감의 차이는 느껴졌어요. 2일 차짜리가 베어 물 때 확실히 더 파이를 씹어서 끊는다는 느낌이 강했고, 입속에선 촉촉했어요. 그렇다고 3일 차짜리가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소비자들 입장에서 그 정도 차이까지 확인을 하겠다고 각기 다른 날 산 걸 동시에 맛을 보지는 않겠죠.”
그 말에 조가영 선임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걸렸다.
“2일 차짜리, 당일 제조는 아예 똑같던데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딸기 향이 첨가가 되어서 기본형보다 맛이 강하기 때문에 미묘한 차이를 못 느끼는 건지, 아님 기본형도 이 정도 퀄리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건지.”
“오히려 기본형이 더 구분이 힘들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질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큰 차이를 못 느끼셨다고 하시면, 아마 초콜릿이나 땅콩, 커피, 피스타치오, 민트 쪽에선 아예 못 느끼실 거예요.”
“그래요?”
“네. 저희 팀에서 오늘 본부장님 관능 평가에 딸기 맛을 올린 이유가 맛의 변질이 가장 쉽고 빠르게 나타나는 게 바로 딸기 맛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다른 마카롱 업체들과 달리, 삐에르 에슈메는 딸기 맛에 직접 만든 딸기잼을 첨가시킵니다.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딸기 파우더나 색소를 섞는 게 아닌 딸기잼으로 색을 잡고 향을 살리는 거죠. 잼을 사용하는 이유로 당 코팅이 높게 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만큼 퍼석한 느낌이 크게 잡히는 거죠.”
“그럼 기본형의 경우는 3일 차짜리에서도 질감의 차이를 크게 못 느낄 거란 말인가요?”
“딸기 맛에 비하면 그 차이가 아주 미미합니다.”
됐다.
영업을 뛰는 친구도 아니고, 연구 일을 하는 친구가 날 상대로 저 정도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만족스러워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고객들의 눈높이는 항상 우리보다 높은 데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티라미수는 언제쯤 테스트가 가능할까요?”
“빠르면 이번 주 목요일, 늦어도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테스트가 가능하게끔 준비해 놓겠습니다.”
“오케이. 다음 주 월요일로 하죠. 서두르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급하게 뛰는 건 본사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건 연구소가. 그렇게 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조가영 선임에게 다시 한번 무척 만족스러운 테스트였다는 걸 말해 준 뒤 연구소로 함께 발걸음을 한 조 전무에게 이동을 하자는 눈치를 줬다.
그에 조 전무는 나와 함께 걸음을 옮기다 잠시 조가영 선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조가영 선임이라고 했지요?”
“네, 전무님.”
“어디 조씨예요?”
“창녕 조씨입니다.”
“역시. 내 우리 집안 사람일 줄 알았어. 일하는 거 깔끔해. 마음에 들어요.”
“아, 네… 가, 감사합니다. 하하.”
* * *
식품 본사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조동희 전무와 차 한 대로 같이 움직였다.
“아까 오는 길에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끊겼던 내용 있잖아요. 재경항공 기내식 쪽으로 밀어 보자고 했던 내용.”
외식 관련해서 노하우가 많이 쌓여 있는 만큼, 모범태 이 친구가 꽤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조 전무 쪽으로 공유했던 모양이다.
항공 쪽 경험이 많았던 만큼, 해당 내용에 대해선 자신이 있다는 듯 조 전무가 입을 열었다.
“초반 로스를 최소한으로 가져가자는 거죠. 일리가 있는 내용이었어요. 현재 우리가 측정 중에 있는 마카롱, 티라미수의 객단가는 단일 매장 기준으로 하루 턴 오버가 340에서 370 중간 정도는 나오는 매장이 전국에 최소 60개가 넘었을 때, 투자 대비 흑자 전환이 가능합니다.”
“그렇죠. 본사 입장에선 로스 비율이 타 프랜차이즈 외식업에 비해 너무 크게 잡히기는 해요.”
“폐기 일자가 하나같이 다 짧은 아이템이니까요. 이걸 가맹점주들 부담을 허용선까지 줄여 주기 위해선 폐기가 아니라 교환으로 유도를 해야 하는 거죠.”
“그렇죠.”
“그때 본부장님께서 생각하셨던 객단가의 70퍼센트까지 본사가 지원해 준다고 쳤을 때, 가맹점주들의 부담은 크게 줄겠지만, 그만큼 본사가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는 커지는 겁니다. 그 리스크 폭을 줄이겠다고 가격을 더 높게 측정하는 건 무리고요. 현재 측정 중인 가격대만 해도 소비자들의 가격 저항선에 아슬아슬한 수준이죠.”
“그래서 모범태 전무님 생각은 생산 물량을 끌어올려서 아예 생산 객단가를 낮춰 보자는 거죠?”
그에 조 전무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스너프 쪽에서 전 지점을 상대로 매장 확보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긴 했지만, 백화점, 아웃렛 통틀어서 32곳입니다. 구조상 초반 로스가 너무 크게 잡힐 수밖에 없는 거죠.”
“현재 재경항공 쪽으로 이코노믹 기내식을 개당 얼마에 납품 중이죠?”
“모 전무 생각은 현재 우리가 개발 중인 마카롱 자체가 단가가 높기 때문에 이코노믹 기내식 말고, 비즈니스석, 그리고 미주발, 유럽발에 들어 있는 일등석 기내식에 디저트로 포함을 시킬 수 없겠냐는 거였습니다.”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니죠, 아니죠. 할 거면 아예 다 풀어야죠.”
“그러기엔 항공 쪽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죠. 재경항공의 하루 이용자 수가 몇 명인데, 그 많은 이용자에게 기내식 디저트로 개당 생산 단가가 2천 원 넘게 잡히는 걸 준다는 건, 이코노믹 기내식 기준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거예요.”
“대신 우린 그 많은 재경항공 이용자들을 상대로 큰돈 안 들이고 우리의 마카롱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미디어를 통한 시각적 홍보가 아닌, 오감의 홍보요.”
“…….”
“더불어 재경항공의 서비스 수준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거예요. 항공은 교통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입니다. 이동 거리에 따라서 호텔보다 더 오랜 시간 고객들을 특정 공간에 머물게 만드는 강제성도 띠고 있죠.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아직 숍 브랜드도 만들어지지 않은 프로젝트에 획기적인 영업 전략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3박 4일 가족들 다 같이 가까운 동남아 여행을 해요. 좋은 추억이죠. 여행 중에 이것저것 사진을 찍습니다. 비행기에 올라서 한 컷, 기내식 한 컷. 창밖으로 펼쳐지는 구름 떼 한 컷. 누군가는 그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릴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좋았던 여행을 추억하고자 한 번씩 사진첩을 보면서 여행 당시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 보기도 하겠죠.”
“…….”
“그런데 이상해요. 기내식으로 나와서 별생각 없이 맛있게만 먹었던 그 디저트가 백화점 푸드 코트에 있네? 아웃렛 푸드 코트에 있는 거예요.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 보죠. 이 브랜드 뭐지? 몰랐던 브랜드였는데, 유명한 건가? 고객의 충성도는 바로 그런 익숙함에서 나오는 거죠.”
“하긴, 어쨌거나 우리 마카롱은 최소한 맛으로는 비교 대상이 없으니, 그런 최상급 마카롱을 기내식 디저트로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재경항공의 기업 이미지에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어요.”
“그 안에서 매출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항공기 안에서요?”
“그렇죠. 기내 면세 시스템 다 들어가 있잖아요. 누가 우리 마카롱을 하나 먹어 보고 달고 질린다고 멈출 수 있겠어요? 아까 먹었던 마카롱 하나만 더 서비스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고객. 분명히 나옵니다. 그럴 때 승무원들이 자연스럽게 응대를 하면 되는 거죠. 여행객들 지갑만큼 쉽게 열리는 지갑은 없어요. 하물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길에 나서는 부모들 지갑이야 오죽하겠어요? 땅에 붙어 있는 건물,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매장만 매장입니까? 날아다니는 매장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하하, 허허허… 참,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어.”
“항공 쪽으로 가까운 분들 많이 있으시잖아요. 그분들보다 항공 내부 상황도 더 잘 알고 계실 거고. 전무님이 직접 그쪽이랑 이야기를 나눠 봐 주시죠.”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본사 들어가는 대로 항공 쪽이랑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겠습니다.”
R&D 센터에서 조 전무, 김 소장, 그 외 몇몇과 회의를 하는 동안 휴대폰을 매너 모드로 바꿔 놨던 걸 내가 깜빡하고 있었다.
본사에 거의 다 도착해 갈 즈음, 습관처럼 폰을 꺼내서 봤는데 하늘이한테서 카톡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한 시간 이상 늦게 확인을 하게 됐다.
―저녁에 마치고 시간 괜찮아? 줄 게 좀 있어.
부랴부랴 답장을 보냈다.
저녁에 따로 약속 같은 건 없다고.
회의 중에 매너 모드로 바꿔 놓은 걸 확인을 못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그랬더니 곧바로 답장이 들어왔다.
―나는 6시 퇴근. 오빠는?
―6시까지 회사 앞으로 갈게.
―혹시 강인성 차장님도 같이 오는 거야?
―강 차장? 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