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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으로 알아 (188/303)

영광으로 알아

“한방 오리백숙은 또 뭐야? 이거 실화야?”

카톡으로 오리백숙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부터 내가 놀리긴 했었다.

나야 좋지.

즐겨 찾는 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때 되면 먹으러 다니던 그런 음식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메뉴를 내가 하늘이하고 먹으러 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이걸 하늘이가 먹으러 가자고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장사가 잘되는 집인가 보지.

미리 예약을 안 하고 찾아오면 줄을 서도 먹을 수가 없는 그런 집이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가게 앞에서 예약자 이름을 불러 주고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하늘이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미 가스버너 위로 백숙이 올라가 있었다.

“타이밍 딱 맞춰서 왔네. 1분만 더 기다려 보고 전화할까 하던 중이었어.”

자리에 앉으면서 냄비에 담긴 오리 크기를 봤는데, 이건 사고에 가까웠다.

“야, 이걸 우리 둘이서 다 먹냐?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최소 세네 명은 붙어야 되는 거 아냐?”

“이게 기본이야. 자리 꽉 찬 거 안 보여? 이런 집에서 어떻게 반 마리를 시켜? 팔지도 않고.”

“이럴 줄 알았음 그냥 강 차장도 같이 와서 먹으라고 할 걸 그랬다. 남은 걸 싸 갈 수도 없고, 아깝잖아.”

“누군 뭐 좋은 거 나눠 먹기 싫어서 혼자 오라고 한 줄 알아? 아 참, 강 차장님은 퇴근시킨 거지?”

“어, 요 앞까지만 같이 오고 먼저 갔어.”

“잘했어. 집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어도 혼자 먹는 게 마음 편하지, 저녁까지 모시는 상사랑 같이 먹으려고 해 봐라. 그것만큼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어?”

“참 쓸데없는 데 생각 에너지 잘 뺏겨.”

하지만 하늘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불편한데 어떡해? 내가 보자고 할 때마다 강 차장님 혼자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아님 다른 테이블에서 우리 식사 끝날 때까지 우리 속도에 맞춰서 밥 먹고… 다음부터 내가 보자고 할 땐 혼자 나와. 아님 내가 데리러 가도 되고. 술 한잔을 더하자고 할래도 기다리는 강 차장님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말 못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았어. 접수 완료. 야, 근데 이건 어떻게 먹냐? 누가 와서 좀 찢어 주나?”

“기다려. 다 알아서 해 줘.”

“오리 좋아해? 나하고 같이 먹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나 먹자고 오자고 했겠니?”

“그럼?”

“오빠 먹이겠다고 오자고 했지.”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요즘 오빠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잔소리를 얼마나 듣는지 모르지?”

“나 때문에? 왜?”

“오빠 안 챙긴다고. 내가 뭐 이 나이 이때까지 오빠 챙겨 주겠다고 공부하고, 일을 배운 사람도 아니고. 인간적으로 자기 컨디션 조절은 자기가 알아서… 그런 게 잘 안 되나?”

“내가 지금 컨디션 조절을 잘 못 하고 있다는 말이야?”

내가 살다 살다 자기 관리 못 한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 보네.

“그나마 오늘은 좀 낫네. 지난주에 봤을 땐 푸석해서, 아예 못 봐 주겠더라.”

“누가? 내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니? 밥때는 잘 지켜 가면서 일을 하는 거야?”

내가 말없이 피식하며, 미리 깔려 있던 나물 반찬을 집어 먹자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이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잖아? 그럼 말이 많아져.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요즘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 나만 보면 정훈이 잘 챙겨라, 먹는 거 신경 쓰게 만들어라… 어후, 진짜 내가 요즘은 여기가 조선인가 싶다니까? 완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는 그런 기분이야.”

“기분이 좋네.”

“변태니? 나는 지금 그 잔소리 때문에 노이로제까지 걸릴 지경인데, 기분이 좋아?”

“강 차장 빼고, 내 건강 걱정을 이렇게 직접 해 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인 거 같다.”

“…….”

“고맙네. 그런데 걱정하지 마. 알아서 좋은 거 잘 챙겨 먹고 다니니까.”

“뻥치시네.”

하늘이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너한테 뻥을 치냐?”

“내가 오빠 집엘 안 가 봤어? 그때 태양이랑 같이 오빠 집에 갔을 때.”

“갔을 때 뭐?”

“냉장고엔 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배달 음식을 얼마나 많이 시켜 먹었으면 분리수거 통에 죄다 배달 음식통뿐이고. 그러다 진짜 한 방에 훅 간다. 내가 말했지? 나 작년에 종합 검진 받고, 장 내시경 받으면서 용종 떼 냈다고. 내가 모르긴 몰라도, 오빠도 검사받으면 뭐가 장난 아니게 나올 거야.”

잠시 후 가게 종업원이 우리가 앉은 식탁 쪽으로 큰 접시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젓가락으로 푹! 하고 감자를 찔러 본 뒤, 이만하면 충분한지 들고 온 접시 위로 통오리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그 위로 익은 감자들을 곱게 올려놓은 뒤, 죽을 시킬 거냐고 물었다.

하늘이가 준비해 달라고 하자, 국물 육수가 담긴 냄비를 버너째 챙기더니, 이대로 먹으면 된다는 말과 함께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오리 다리 하나를 쭈욱! 찢어서 내 앞접시 위로 올려주며 하늘이가 말했다.

“배달 음식 좀 적당히 먹고, 하루 한 끼는 정도는 제대로 된 걸 먹어. 혼자 먹기 애매할 땐… 나한테 전화해. 앵간하면 같이 먹어 줄 테니까. 괜히 일 마치고 퇴근하고 싶어 하는 강 차장님 붙잡고 매너 없이 같이 먹으러 가잔 소리 하지 말고.”

이 집.

제대로다.

후아, 진짜 맛집이네.

한방 오리백숙에 감자를 왜 넣는가 했더니, 한방 냄새를 아주 효과적으로 중화를 시켜 주고 있다.

아주 의외의 궁합이네?

“어때? 먹을 만해? 괜찮지?”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맛이 아주 좋은데?

“내가 이 집 소개시켜 주고 별로란 소린 아직 한 번도 못 들어 봤어. 잘해, 이 집.”

“이런 메뉴는 억지로 안 먹이는 이상 생전 안 먹을 거처럼 생긴 애가….”

“오리백숙이 뭐가 어때서? 육개장에 소주보단 이거에 인삼주가 훨씬 더 낫지. 내가 오빠 기준에서 힙한 곳은 몰라도, 이런 찐 맛집은 내 머릿속 내비에 다 들어가 있어.”

그거 쬐금 칭찬해 줬다고 어깨에 힘 들어가는 거 봐라.

확실히 애는 애다.

“기획 투자 관련 일 하다 보면, 제작사, 보급사, 방송사… 외부 사람 만날 일이 많아. 나랑 같이 미팅을 했던 사람들은 최소 마흔 이상씩은 되는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랑 내가 스테이크를 먹겠어, 피자, 파스타를 먹겠어? 매번 술자리로 찾는 곳이 이런 스타일의 식당들인데, 머리에 내비가 안 박히는 게 더 이상하지.”

“야, 이놈아.”

“또, 또. 그놈의 이놈아 정말… 그래 이놈 여기 있습니다. 왜요, 나으리.”

“이런 집이 진짜 힙합이야.”

“갖다 붙이기는. 네, 네 알겠습니다. 이런 집이 힙합이군요. 앞으로는 알아서 뫼시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잔말 말고 드시기나 하세요.”

“그나저나 너 뭐 나한테 줄 거 있다며?”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먹어 보겠다는 듯, 한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있는 하늘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하늘이는 남은 오리 다리 하나를 부욱! 하고 찢어 자기 앞접시 위로 올려놓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 안에 있어. 안 그래도 같이 내 차 타고 나갈 거잖아. 다 먹고 집에 갈 때 줄게.”

“뭔데?”

시원하게 찢을 때와는 달리, 화장이 번지는 게 신경이 쓰였던지, 최대한 조심히 한 입 베어 먹은 후 하늘이가 말했다.

“올리브오일.”

“올리브오일?”

“아침에 하나씩 꺼내 먹을 수 있게 소분한 아몬드, 블루베리도 같이.”

“소분? 왜?”

“그렇게라도 챙겨 줘야 귀찮아도 아침은 안 거르고 다닐 거 같아서. 감동할 건 없어. 내가 한 거 아냐. 집에 일 봐주시는 아주머니한테 부탁한 거야.”

자기 잔에 인삼주를 따라 놓고 그걸 든 채 하늘이가 말했다.

“차마 내가 계란까지 삶아서 넣어 달라고 하긴 좀 그렇더라. 귀찮아도 그거 먹을 때 계란 하나 삶아서 같이 먹어. 올리브오일은 계량컵 붙어 있으니까, 일어나서 공복에 마시고. 그렇게만 챙겨 먹고 다녀도 하루가 든든할 거야.”

그렇게 말한 뒤 술잔을 비우는 하늘이었다.

나도 함께 술잔을 비워 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지?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한번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야. 여기에서 더 나가면 오버한단 소리 들을 거 같고, 결혼 전까지는 아쉬운 대로 이런 식으로 챙겨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올리브오일, 아몬드, 블루베리….”

“삶은 계란 하나도 같이.”

“그렇게 매일 먹고 있어.”

“웃기시네. 그때 집에 갔을 때 보니까 아무것도 없던데, 뭘 매일 그렇게 먹고 있어?”

“내가 사는 타운 하우스. 거기 조식 룸서비스 돼.”

“…….”

진짜다.

설마하니 이 손중길이가 아침밥을 거르고 다닐까.

“다 먹고 현관 문 앞에 내놓기만 하면 다 수거해 가고.”

“…….”

“내가 사는 타운 하우스, 시그니얼, 보르돈타워… 기본적으로 그 정도 서비스는 다 되잖아.”

“거짓말….”

“조선 시대 사람 맞네. 야, 내가 새벽에 몇 시에 일어나는데, 아침밥도 안 챙겨 먹고 출근을 하겠어?”

“몇 시에 일어나는데?”

“5시.”

“왜?”

“아침 시간 말곤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까. 5시에 눈떠서 인터넷으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확인 대충 한 다음 수영 40분 하고, 조식 룸서비스 시킨 뒤에 샤워. 그리고 집에 가서 신문 온 거 보면서 아침 식사. 그러면 강 차장이 데리러 오지.”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 왔다고?”

“어.”

“어, 언제부터?”

“기억을 잃은 이후부터.”

“왜?”

“잃어버린 시간만큼 더 많은 기억을 만들어 내려고. 아깝잖아, 시간. 모두에게 평등한 시간마저 내 편이 되게 만드려면 남들보다 하루를 더 길게 쓰는 수밖에 더 있어?”

들고 있던 백숙 다리를 앞접시 위로 내려놓고 이를 꽉 깨물며 하늘이가 말했다.

“그렇게 잘 챙겨 먹고, 운동까지 꼬박꼬박 하면서 관리를 하는 인간이 왜 자꾸 내 눈에 비실비실한 모습만 보이는 거냐고.”

“크흠, 먹자. 먹어, 먹어. 이런 건 식으면 맛없다. 뜨거울 때 먹어야 돼.”

아침밥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 게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일 줄이야.

“아 참, 맞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이 와중에 이게 기억이 나네.

“너 그때 나한테 네 지인들이 나 보고 싶어 한다고, 자리 한번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언제 적인데.”

“그러니까. 손정엽 프랑스 돌아가는 대로 만들겠다고 해 놓고, 그게 벌써 2달 전이야.”

“됐어, 없었던 일로 해.”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하늘이었다.

“왜? 안 해도 되는 거야?”

“잠잘 시간도 부족한 사람, 내 형식치레 하는 자리에 데리고 가겠다고 피곤하게 만드는 건 아닌 거 같아.”

뭐야?

이거 지금 비꼬는 거야, 아님 진심인 거야?

“많이 어려운 자리인가? 그냥 식사 한번 같이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래? 작은 연회 정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야지. 틀림없이 사업 이야기 위주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최대한 가린다고 가려도 불편한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몇 명이나 초대하는 자리인데?”

“몇 명이나 오는지는 나도 가늠이 어렵지. 내가 그때 말했잖아. 부모님들 통해 형성된 그런 모임이 있다고. 그 모임 단톡방이 있어. 다들 콧대가 있다 보니, 그 방에서 대화는 거의 안 이뤄지지만. 그래도 누가 결혼을 한다거나, 그런 공지가 올라오면 귀신같이 다들 참석은 해. 단톡방에 없는 사람들도 소개받아서 그런 기회에 얼굴 비추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고.”

“혹시 말이다. 그 모임에 태영백화점 구정진 부사장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있나?”

“구정진 부사장? 그 사람은 나도 어느 정도는 알아.”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따라서 어른들 모임 같은 데 불려 다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지. 그 사람 결혼식에도 아버지랑은 별개로 내가 부주까지 했고.”

“그 사람도 초대를 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초대를 해도 이상할 게 없고, 그 사람이 사정상 불참을 해도 전혀 어색하거나 섭섭할 게 없는, 딱 그 정도 관계?”

잘됐네.

부경유통을 반으로 쪼갤 당시 우리 재경항공이 태영면세점과 좋은 관계를 형성해 놓은 상태이고, 스너프가 백화점, 아웃렛 사업을 끌어안은 이후로도 계속 상생의 길을 가고 있기에 하늘이가 직접 초대를 한다면 반드시 자리에 나오겠지.

“그럼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자.”

하늘이는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들이마신 숨을 코로 내쉬며,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그래. 뭐 때문에 구정진 부사장과의 자리가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손정훈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내가 한번 봐야겠어.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어? 있으면 말해.”

“더 필요한 거….”

“구정진 부사장과 개인적 안면을 트는 게 목적이라면, 그냥 내가 따로 자리를 만들 수도 있어. 그럼 괜히 불필요하게 여러 사람 상대 안 해도 되는 거잖아.”

“네가 생각을 했을 때 그 단톡방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비즈니스적으로 미래금융에 괜찮은 인맥들이야?”

“지금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렇게 되겠지. 나도 이제 본사 생활 시작했고.”

“그 인맥, 앞으로는 나도 같이 쓸 수 있는 건가?”

“기억도 없는 사람이, 그 인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그 인맥값, 비싸게 쳐줄게.”

딴에는 도발을 해 보겠다고 그랬던 거겠지?

하늘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를 부를 줄 알고?”

“얼마를 부르든, 부르는 값에 1원 더 얹어 준다.”

“피이… 돈은 됐고. 와인 한잔 사 주라.”

“와인?”

“응. 이거 다 먹고 나가서 와인 한잔 더하자. 모처럼 강 차장님도 안 계시고, 마음 편하게 좀 마셔 보고 싶어.”

“야, 이 독한 인삼주를 먹고 와인을 섞겠다는 거야? 제정신 아니네."

“와인이 아니라 데이트를 하자는 거야, 데. 이. 트. 이 모지라.”

“…….”

“그런 표정 짓기 있냐? 나도 알아, 우리 결혼은 비즈니스라는 거.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평생 죽을 때까지 비즈니스만 하냐?“

나는 ‘데이트’가 아니라 ‘모지리’에서 주춤했던 거다.

살다 살다 내가 모지리라는 소릴 듣는 날이 다 오네….

“오빤 오빠의 비즈니스를 해. 나한텐 지금 이게 비즈니스니까. 나 같은 비즈니스 파트너 만난 걸 영광으로 알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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