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조금씩만 양보를 하면
부경호텔 대표이사실 안으로 장혜선 전 대표가 표정을 굳힌 채 들어섰다.
호텔 본사 측 임원들 한 명, 한 명과 개인 면담 중이었던 손정엽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면담 상대에게 1시간만 쉬었다가 다시 대표이사실을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에 면담 중이었던 인물은 장혜선 전 대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지, 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예요?”
자신이 앉았던 상석 소파 자리를 돌아, 손정엽은 장혜선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곳까지 얼른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히 그녀를 소파 자리로 안내했다.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렵게 모신 제 입장이 뭐가 됩니까? 하하. 이쪽으로 앉으시죠.”
의외로 상석 자리를 안내받은 장혜선이었다.
손정엽은 자신이 어디에 앉든, 그런 것 따윈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조금 전 자신에게 면담을 받았던 인물의 자리로 앉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장부가 어디에 있겠어요.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건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조용히 묻고 가는 게 여러 사람한테 좋을 거예요.”
장혜선은 당당했다.
그리고 손정엽은 최대한 그녀의 당당함을 존중해 주려 하고 있었다.
“그 정도 먼지는 당연히 제가 알아서 닦아 써야죠. 새 차를 뽑은 것도 아니고, 남이 타던 차를 중고로 사서 타고 있는데 어디에 스크래치가 났네, 라이트가 잘 안 듣네… 사기 전에 확인을 하고 가격 흥정을 했다면 모를까, 이미 거래 다 끝내 놓고 그런 불평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외국 생활 오래 했다고 해서 꽉 막혀 있을 줄 알았더니, 그나마 말은 통하네.”
“제가 맞춰야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라. 여긴 한국 아닙니까. 하나하나, 처음부터 다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정실에서 따로 관리해 왔던 장부 때문에 보자고 한 게 아니라면,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거예요?”
아주 천진무구한 얼굴로 손정엽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가지고 계신 거하고, 아드님 되시는 박현민 전 사업총괄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좀 회수해야 할 거 같아서요.”
“뭐요!”
장혜선 전 대표의 두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하지만 손정엽은 아주 과장되게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인 후, 잠시 몸을 뒤로 뺐다가 상대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오, 대표님. 저는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안 했는데, 어느 대목에서 제가 말실수를 한 걸까요?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사람 약 올리는 거야?”
“그럴 리가요.”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뒤에 숨어서 호텔 지분 긁어모았다는 이야기 듣고 엉큼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경우까지 없네.”
“아닙니다, 대표님. 제가 그 경우를 지키겠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제 말을 조금만 더 들어 주세요.”
“듣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요? 지분 회수? 하! 어림도 없어요. 0.1퍼센트도 못 내어놓으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그에 손정엽은 아주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뭘 자꾸 아까부터 계속 대표님, 대표님 거려요? 나 이제 여기 대표 아니에요. 대표는 손정엽 당신이지."
“대표님이 들고 계신 호텔 지분이 18.7퍼센트입니다. 박현민 전 사업총괄이 들고 있는 호텔 지분이 7.4퍼센트죠. 그런데 드모어 인베스트먼트의 지분은 고작 11퍼센트입니다. 제가 대표님의 선택을 받아서 호텔 경영을 하고 있는 전문 경영인도 아니고, 최대 주주가 저항 지분으로 돌아선 상태에서 호텔 운영을 제 소신대로 해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도 하나 예상 못 하고 그 자리를 빼앗았던 거예요?”
여전히 과장되게 저자세를 유지하며 손정엽이 말했다.
“빼앗다니요, 엄밀히 말하면 다시 가져온 거죠.”
“뭐, 뭐요?”
“이건 저와 대표님 사이에 입장 차이가 클 수밖에 없는 거니까, 넘어가는 걸로 하고 대표님, 그리고 박현민 전 사업총괄의 지분은 각각 50퍼센트씩 호텔 본사가 회수를 좀 해야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사돈총각이니까 최대한 예의를 갖췄는데, 이렇게 양아치 짓을 하겠다고 본성을 드러내면 더는 예의를 못 지켜 주지 않겠어요?”
“양아치… 짓이요? 제가요?"
“아님, 깡패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어쩌지? 난 깡패가 전혀 안 무서운데? 뭐로 협박을 할 건데? 여기가 북한이야? 중국이야? 누가 감히 남이 가진 개인 자산을 팔라, 마라 강제를 할 수 있어?”
“강제를 못 하죠. 그래서 부탁을 드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과 박현민 전 사업총괄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 제 입장에선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제가 불필요한 부분에 더는 신경 안 쓰고 호텔 운영에만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뜻으로요.”
장혜선 전 대표는 생글거리며,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는 손정엽의 얼굴에 들고 온 이브닝 백을 집어 던져 버리고 싶었다.
“의외로 고단수네? 사람 열을 채울 줄 알아. 그런데 어쩌죠? 흥분을 해 주고 싶어도 지금 내가 크게 아쉬운 게 없네. 조정실에서 들고 있던 장부를 무기 삼자니, 이번 경영권 교체 때 그쪽 편에 서 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딸려 들어갈 거 같아 엄두도 안 날 거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장혜선이 말을 이었다.
“이럴 땐 부탁, 협박이 아니라 거래를 하는 거예요, 손 대표.”
“거래요?”
“미래금융 등에 업고 여기까지 용하게도 잘 왔어요. 그런데 너무 뭘 잘 모른다. 좋아요. 실은 나도 전체를 다 끌고 가는 게 버겁긴 했어. 우리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아주 반갑다는 표정으로 상체를 장혜선 쪽으로 당겨 앉으며 손정엽이 말했다.
“오, 저 그런 거 좋아합니다. 어떤 양보를 어떻게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호텔 이름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3개는 부경 이름을 그대로 남겨 놓는 걸로 해요. 강남점, 두촌점, 그리고 제주점. 이렇게 세 개.”
고개를 갸웃거리는 손정엽을 향해 장혜선이 말했다.
“그 세 지점 경영권, 그리고 지분을 내 앞으로 51퍼센트까지 맞춰 준다고 하면 조금 아깝긴 해도 내가 들고 있는 거, 그리고 현민이 앞으로 잡아 놓은 거 다 손 대표 앞으로 돌릴게. 뭐 하러 비싼 세금 버려 가며 지분을 사고팔아요? 그냥 우리끼리 안에서 지분 명의만 바꾸면 되는걸.”
생긋 웃으며 손정엽이 말했다.
“조정실에서 찾은 분식 회계 장부까지는 적자 운영을 수년간 해 오다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면서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이해를 해 보려고 했는데, 거기에 세탁까지 하겠다 하시면 제가 말릴 수밖에 없죠. 여전히 최대 주주로 계시지만 이젠 엄연히 제가 여기 대표 아닙니까.”
“…뭐요?”
“이렇게 무서운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인 걸 확실히 알았으니, 더더욱 들고 계신 지분을 회수 받아야겠습니다.”
잠시 멈칫했지만, 장혜선은 금새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비웃음을 흘렸다.
“무슨 수로?”
“방법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7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해 오고 있었던 걸 분식 회계로 장부상 퐁당퐁당 흑자와 적자를 오고 가게 만든 실력자들이 아직 회사에 있잖아요.”
곧 장혜선의 얼굴에 번져 있는 비웃음과 경쟁이라도 하듯 손정엽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런 실력자들은 그런 일 하는 사람들이고, 또 저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그런 실력자들한테 잘한다 칭찬도 했다가, 왜 그랬냐고 뜬금없이 비난도 해야 하는 사람인 거고. 개중에 한두 명 정도는 앞으로 평생 먹고살 만큼 목돈 좀 쥐여 주고 회계 장부 관련해서 총대를 메라고 하면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마치 해당 내용에 대해선 미리 총대를 멜 인물을 정해 놨단 표정이었다.
“똑똑한 사람들인데, 설마 그 총대를 혼자 메겠습니까? 혼자 메겠다고 해도 결국 대표님, 그리고 박현민 전 사업총괄은 노출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
하지만 장혜선은 이 정도 협박은 귀엽게만 느껴졌다.
“급하게 바뀐 경영권. 그런데 호텔 이름까지 바뀐다? 거기에 그런 지저분한 이슈까지 터져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 대표님을 모신 거죠. 이번에 스너프의 손정태 사장이 부경통신의 웹 콘텐츠 사업부를 건네받았다… 그런 이야기가 들리던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해당 내용에 장혜선은 말없이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기만 했다.
“저는 손정태 사장처럼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이고, 능력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사업을 우악스럽게 할 마음은 없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우아하게, 교양 있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모두가 해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해피 엔딩을 향해 달려야지, 아무리 재경과 부경 사이에 쌓인 감정이 켜켜이 있다고 해도 사업 장르를 경영물이 아닌 복수물로 가져가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손정엽을 노려보는 장혜선의 두 눈에 잔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추구하는 해피 엔딩을 중간에서 누가 방해를 한다면, 전체 장르는 그게 아니더라도 부분 장르에선 액션물로 변주를 줘 볼 수밖에요.”
그리고 곧 그녀 두 눈에 일던 잔경련이 입술로 옮겨 갔다.
“대표님 말씀대로 경영권이 급하게 교체가 되었죠. 그런데 여기에서 호텔 이름까지 바뀌면 안 그래도 바닥을 치고 있는 영업 매출이 땅을 뚫고 지하까지 떨어질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저분한 이슈 한두 개 더 터져 본들 어차피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더 떨어지겠습니까? 제 입장에선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원한 것도 아닌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경영을 하는 것보다 더 이상 바닥을 칠 것도 없을 때 털 수 있는 건 다 털어 내고 가는 게 맞는 거 아닐까요?”
“어디 한번 해 보고 싶으면 해 봐요. 그런다고 내가 들고 있는 지분이 공용 지분이 되나. 내가 가진 돈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건. 검찰 조사 한두 번 받으러 갔다 오면 벌금 몇 푼에 다 끝나는 내용이라고. 설마 내가 그딴 걸 무서워할 줄 알았어요.”
“아뇨, 저는 제가 마음 편하게 호텔 운영을 해 나가기 위해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단 말씀을 드린 거고, 분식 회계 장부로 대표님을 협박할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요.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런 걸로 눈이나 깜빡하시겠어요? 안 그래요? 대표님 말씀대로 대표님이 가진 돈이랑 아무 상관 없는, 그저 대표님의 사회적 이미지에만 타격이 가는 건데, 그런 걸 무서워하시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
“그걸 알기 때문에 이런 계산을 해 볼 수밖에 없었어요.”
“계산? 무슨 계산?”
“내가 어떤 수를 둬야, 장혜선 대표님께서 위협을 느끼실 수 있을까. 아, 그렇다고 진짜 위협을 하겠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만에 하나, 제가 최선을 다해서 협상을 시도하는데도 이야기가 잘 안 풀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럴 때 최후의 방법으로 쓸 카드 두세 개 정도는 따로 준비를 해 놔야 하는 거잖아요.”
“거참 말 더럽게 많네. 쓸 말만 해요, 쓸 말만.”
“유상 증자를 시도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나오실까? 그런 카드가 우선적으로 만들어지더군요.”
“뭐, 뭐요? 유, 유상 증자?”
“물론 유상 증자라는 게 주가 폭락을 동반하는 내용이라 소액 주주들은 물론이고, 많은 주주들의 반발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요. 18.7퍼센트를 가진 대주주가 7.4퍼센트 지분까지 포함해 총 26.1퍼센트를 움직일 수 있는데, 정작 경영권을 가진 사람은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지분이 11퍼센트가 전부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도 이것보다 무모하지는 않겠죠.”
“유상 증자가 정확하게 뭔지나 알고 하겠다는 거예요?”
애써 민망하다는 듯,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손정엽이 말했다.
“저 샹갈렌 상대 출신입니다.”
“뭘 명분으로 유상 증자를 하겠다고 주주들을 설득하려고?”
“미래금융 명의의 동부산 부지. 그거 공사 들어가야죠. 동시에 분식 회계 장부도 조사를 받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공가 매도를 못 하실 테니. 대표님께서 들고 계신 지분을 포기 못 하겠다고 하시면, 전 유상 증자를 통해서라도 대표님의 지분 비율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아 참, 그리고 부실 채권 전환권도 고려 중입니다.”
“……!”
“떨어진 지분 비율에 유상 증자, 채권 전환권으로 주가 폭락. 제가 알기로 대표님의 자산 80퍼센트 이상이 부경호텔 지분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그걸 제 손으로 직접 휴지 쪼가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장혜선이 기를 세웠다.
“협박도 개연성을 좀 갖춰 가면서 해야 듣는 사람이 겁을 내지. 어렵게 잡은 경영권으로 회사 주식을 직접 휴지 쪼가리로 만들겠다? 이게 설득력이 있는 소리 같아요?”
“제 목적은 제 할아버지가 만드신 이 호텔 사업에 부경의 이름을 내리고, 재경의 이름을 다시 올리는 것에 있었습니다.”
더 이상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원래 이런 섬뜩함이 이 사람의 진짜 얼굴인가 싶을 정도로, 손정엽의 얼굴엔 그 어떤 웃음기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과 달리 제 목적은 돈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장혜선은 숨이 막혀 왔다.
“돈을 벌 거였음 왜 제가 이 돈 안 되는 호텔 사업을 떠안았겠습니까? 그냥 계속 프랑스에서 투자처나 찾아다니는 게 훨씬 수월하고 효과적이지. 안 그렇겠습니까?”
“…….”
“저는 이 호텔이 제로 세팅 된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게 없습니다. 오히려 진짜 그렇게 해 볼까 하는 마음도 있고요.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앞으로 이 호텔을 발판 삼아 너의 왕국을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유치한 표현이긴 해도, 진심을 쏟는다면 못 할 것도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해 보기로 했어요. 제 왕국을 만들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중인데, 협조 좀 해 주세요, 대표님. 우리 과격한 액션 신은 빼고 가죠. 얼마든지 피 안 보고 좋게, 좋게 갈 수 있잖아요. 서로 조금씩만 양보를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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