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마음에 드네
부경호텔 전 지점이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한 건 2주 전부터였다.
손정엽 대표가 취임을 하고 일주일 동안은 비록 어수선했을지언정, 직원들의 동요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 정도로 조용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대표 취임 후 일주일 간 제주점을 포함해 전 업장을 직접 방문한 손정엽 대표가 본격적으로 각 지점의 GM(General Manager)들을 한 명 한 명 본사로 불러들였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곡소리는 곧 부경호텔 전 지점을 공포로 몰아갔다.
“제임스.”
“네, 미스터 손.”
호주 출신의 GM이 손정엽 대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의 옆으로는 그동안 박현민 전 사업총괄의 통역 겸 수행 비서 역할을 해 왔던 나주석이라는 인물이 둘의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함께 자리했다.
그는 영어는 기본이고, 불어와 스페인어까지 유창해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GM들을 직접 상대해 왔던 전 사업총괄에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고, 실제 업무 능력도 몹시 뛰어나서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벌써 임원 3년 차에 접어들었을 정도로 빠른 승진을 해 주위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사무이 포시즌에서 GM 생활을 했었네요?”
“네.”
“그 전엔 하이난 신주반도의 리츠칼튼에서 GM 생활을 하셨고.”
“네.”
수행 비서 역할로 자리에 참석을 한 나주석은 손정엽 대표가 구사 중인 영어 실력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니까, 당연히 불어는 네이티브일 것이다.
샹갈렌 상대 출신.
영어 역시 수준급일 거란 예상을 하긴 했지만, 손 대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국식 영어엔 정확한 포쉬(고급 영어)가 탑재되어 있었다.
“그 전까지 OM(Operation Manager) 생활을 하실 땐 특정 호텔 근속 연수가 3년, 5년, 6년… 그렇게 되시는데, 근속 연수가 계속 짧아지고 있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무이 포시즌, 신주반도 리츠칼튼 각각 2년씩 초기 계약 이후론 재계약 없이 바로 이직을 하셨네요?”
“음….”
곧바로 대답을 못 내놓고 있는 외국인 GM의 모습에 손정엽 대표는 싱긋이 웃는 얼굴로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준 다음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두촌점 같은 경우, 작년 대비해서도 매출이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떨어지고 있네요. 원인 분석은 되셨습니까?”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부대시설 리노베이션이 시급합니다.”
“그렇죠. 저도 두촌점을 방문해 보고, 특히 수영장, 피트니스 클럽 같은 경우는 시설 보강에 투자가 이뤄져야겠다고 느꼈어요. 다른 부분은요?”
“객실 컨디션도 보강이 필요합니다.”
격하게 공감을 한다는 듯,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손정엽 대표였다.
“다른 시스템적인 문제점은 없습니까?”
“시스템적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운영진에서 직원들 동기 부여도 잘하고 있고, 실제 직원들의 상태도 포시즌, 리츠칼튼 때랑 비교해 무척 좋습니다.”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네요. 제임스 눈높이에서도 두촌 지점 직원들의 퀄리티가 괜찮다는 말인 거죠?”
“네. 현재 반등을 시키지 못하고 있는 매출 저하 부분은 자체 운영 시스템이나, 직원들의 교육 부분과는 별개로 리노베이션이 절실한 퍼실리티의 문제라고 보셔야 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본사에서 해당 내용을 참고해서, 피드백을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봐도 되겠습니까?”
“네, 업무 중에 귀한 시간 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GM이 생각보다 짧게 끝난 면담에 안심을 하며 대표실을 빠져나갔을 때였다.
“제임스는 해고를 하는 걸로 정리합시다.”
“네?”
나주석 본부장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손 대표를 쳐다봤다.
“제임스는 해고를 하는 걸로 정리를 하자고요.”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그런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계약 기간이 1년 이상 더 남아 있는 외국인 GM을 해고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가, 갑자기 뭐 때문에 해고를 하라고 하시는 건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돈은 받아 가면서, 돈값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잖아요.”
“…네?”
“2년 동안 놀면서 시간이나 때우다가, 코리아 스펙 하나 더 추가해서 다른 곳으로 점프 뛰겠다… 방금 그 말을 돌려서 하고 간 거 아니었나? 제 귀에는 그렇게 들리던데요?”
“……?”
“부대시설 리노베이션. 그게 진짜 시급하다고 느꼈으면 GM 생활 시작하자마자 자기 손으로 직접 계획을 세워서 요청을 했겠죠.”
“하지만 리노베이션 건은 어디까지나 본사에서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부분이라….”
“진짜 그 부분이 시급하다고 여겼다면 말이에요. 예산 집행, 계획 수립은 본사가 하더라도, 해당 지점 최고 실무자가 본사를 귀찮게 만드는 거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내용 아닙니까.”
나주석 본부장은 할 말이 없었다.
“리노베이션이라는 게 말만 나온다고 바로 뚝딱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산 집행, 계획 잡는 데에만 최소 1, 2년은 걸리는 건데, 자기가 두촌점 GM으로 있는 동안은 계속 그걸 매출의 핑계로 잡겠다 그 말 아니었냐고요.”
“하지만 대표님, 외국인 GM, OM의 경우는 계약 기간이라는 게 있고 그 안에는 형법에 위배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다음에는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네?”
“다른 나라도 대체로 다 비슷비슷하지 않습니까?”
“제임스는 아직 계약 기간이 1년 2개월이 더 남 아있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해고를 시키라는 거죠. 일 안 하는 사람한테 돈을 왜 줍니까? 그것도 그 지점 최고 월급을.”
“계약 기간이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해고를 시키라고 하시는 건지….”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이젠 저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나주석 본부장이었다.
“본부장님도 제임스랑 똑같은 거예요?”
“네?”
“돈은 받아 가면서, 돈값은 하기 싫은… 뭐 그런 거냐고요.”
“…….”
“그런 복잡한 문제를 잘 해결해 달라고, 회사가 임원을 달아 주는 거 아닌가요? 한국은 좀 다른가요? 특별해요?”
“아닙니다. 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뭘 또 지금 바로 처리를 합니까, 아직 면담 대기 중인 사람들 더 있잖아요. 이번엔 강남점 GM 차례죠?”
“네, 콘타라고 프랑스인입니다.”
“콘테. 콘타 아니고 콘테. 불어 좀 하신다더니… 다음 차례 들어오라고 하기 전에 간단하게 같이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올까요?”
“…….”
“혹시 담배 안 피우세요?”
“아뇨, 피웁니다.”
“갑시다, 갑시다. 제가 프랑스 국민 담배, 한국으로 치면 디뿔 같은 걸 가지고 있어요. 한 대 줘 볼 테니까 맛 한번 보세요.”
그날 하루 손정엽은 두촌점과 강남점을 포함해 총 네 개 지점의 외국인 GM들과 면담을 가졌고, 두 명을 해고 조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나주석 본부장은 앞으로 자신의 호텔리어 생활이 고난의 연속이 될 거 같단 확신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대표님.”
“네.”
“2년 계약직이긴 하나, GM이라고 하면 각 지점의 최고 경영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텔 업계에선 GM을 최고 경영자라고 하기보다는 최고 운영자, 혹은 최고 실무자라고 표현을 하는 게 맞는 거겠죠.”
“네, 맞습니다. 최고 운영자. 그런 사람들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해고를 시키면, 결국 두 개 지점이 동시에 최고 운영자 없이 운영을 해 나가야 되는 겁니다.”
“그렇죠.”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
그 대답 앞에 나주석 본부장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현재 전 업장별로 JK 드 누락으로 호텔 이름을 바꾸는 부분 때문에 백 오피스뿐 아니라 서비스 직원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
“잘 아시겠지만, 그냥 간판만 교체한다고 끝나는 내용이 아닙니다. 냅킨부터 객실에 들어가 있는 비품들까지, 부경의 로고가 들어가 있는 비품들은 모조리 교체를 해야 하는 작업이죠.”
“네.”
“그리고 호텔 앱 서비스를 해 주는 쪽으로 호텔 정보도 다 새로 교체를 해야 합니다.”
“네.”
“그런 상황에서 오늘만 두 개 지점 GM을 해고를 하라고 하시니, 앞으로 남은 GM 면담이 저는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혹시 두촌점, 강남점의 새 GM으로 따로 생각해 두신 인물이 있으시거나, 아님 다른 방안이 있으신 겁니까?”
그 질문에 나온 손정엽 대표의 짧은 대답으로, 나주석 본부장은 손정엽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라는 걸 정확하게 인식을 할 수 있었다.
“저는 그런 방안을 찾거나,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
“저는 본부장님을 비롯해서, 몸값이 높게 측정된 분들이 몸값에 맞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사람 아닙니까?”
“…….”
“그게 대표인 제 역할이죠. 저는 본부장님을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이지, 함께 고민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방안을 왜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그런 걸 한 시간도 고민을 안 해 보고 바로 저한테 방안이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전 살짝 경악스러운데요? 그동안 다들 너무 고민 없이 회사를 운영해 오신 거 같아요.”
변명도, 핑계도 댈 수 없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내일은 제주점 GM 면담 시작하기 전에 나 본부장님과 면담을 다시 좀 해 봐야겠네요.”
긴장한 나주석 본부장을 향해 싱긋이 웃으며 손 대표가 말했다.
“이미 한번 했는데, 다시 또 안 해도 되겠죠?”
“…네.”
“본부장님, 호텔리어로 생활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14년 차입니다.”
“진짜 초고속 승진이긴 하네. 14년… 스위스 호텔학교 출신이라고 하셨죠?”
“네.”
“그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인턴, 일반 사원 다 건너뛰고 바로 주임으로 시작하셨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주임으로 시작해 14년… 저는 처음부터 사장으로 시작했고,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
“그만큼 지금 본부장님 위치에 계신 분들을 그간 많이 겪어 봤고, 제 기준의 베스트도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본부장님이 제 기준의 베스트를 새로 만들어 주셨음 좋겠어요. 그런 기대로 오늘 하루 제 옆에 계속 있게 만든 겁니다.”
바로 그날 이후부터였다.
새로 부임한 대표와의 면담을 하러 왔던 GM 두 명이 그날 바로 일방적 해고 조치가 되었고, 해고된 GM 두 명의 항의를 호텔 본사에선 아주 강경하게 대응했다.
자연스레 해당 내용은 면담을 대기 중이던 타 지점 GM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호텔 본사에서 일방적 해고 조치를 한 두 명의 GM에 한 해, 그들의 GM 업무, 실적 평판을 최악으로 평가해서 기록으로 남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연대를 형성해 보고자 했던 다른 GM들은 즉각 백기를 들고 말았다.
특정 브랜드의 소속이 아닌 프리랜서 개념의 GM들에게 이전 호텔의 업무, 실적 평판은 곧 호텔리어 생명과도 같은 것이고, 또 그들의 연봉을 결정짓는 증명서 같은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안으로 전 지점에서 부경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 내고 JK 드 누락의 간판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 내라는 호텔 본사의 지시에도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던 전 지점 GM들은 각자의 쉬는 날까지 반납해 가며 현장으로 나왔다.
그간 형식상 본사로 올려오던 위클리 리포트.
그 위클리 리포트의 무성의로 다시 한 명의 GM이 해고 조치를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더 이상 복사 붙여 넣기 식의 리포트 작성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매주 매출 증대를 위한 구체적인 플랜을 만들어 내야 했고, 매주 그 전주에 올렸던 플랜의 성과를 보고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3월의 부경호텔.
결국은 모두가 새로운 대표의 자신감에 비웃기만 했던, 3월 안의 JK 드 누락 오픈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부경의 간판을 내리고, JK 드 누락으로 다시 태어날 그랜드 오프닝 전날.
손정엽은 자신의 사촌 동생들, 손정태와 손정훈을 JK 드 누락의 본점인 소공동점으로 불렀다.
새로운 브랜드의 그랜드 오프닝을 준비 중이었던 소공동점은 장기 투숙객을 제외한, 당일 워크인 게스트나 일반 레스토랑 이용객을 받지 않았다.
바.
업장 매니저가 직접 손씨 사촌 형제들을 서비스하기 위해 바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손씨 형제들은 일반 소파 자리가 아닌, 굳이 바 테이블에 셋이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일 오픈식에 참석한다니까, 왜 사람 피곤하게 따로 보자고 해?”
이 자리에 나란히 같이 앉아 있는 거 자체가 불만이라는 듯, 정태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태와 정훈이 사이에 끼어 앉은 정엽이는 마냥 웃기만 했다.
웃는 얼굴로 두 사촌 동생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주 역사적인 순간이잖아. 부경호텔의 마지막 손님. 그게 우리야.”
어금니를 꽉 깨물며 정태가 말했다.
“이 팔 좀 치우지?”
재빨리 정태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내린 정엽이는 얼른 정훈이를 쳐다보며 웃었다.
“우리 정훈이는 형이 어깨동무 좀 해도 괜찮잖아. 그지?”
“무겁다.”
결국 건조한 두 동생으로부터 외면을 받은 정엽이는 바 테이블 위로 양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온더록스 잔을 들었다.
“건조한 놈들. 이럴 거면 왜 왔냐?”
“누가 형 보러 온 줄 알아?”
“그럼?”
“또 내 허락 없이 정훈이랑 둘이서만 할아버지 술 딸까 봐 어쩔 수 없이 온 거지. 여기에 있다고 할아버지 술이 형 술이 되는 게 아니야.”
“정훈이 넌?”
“나까지 안 오면 혼자서라도 따겠다고 할까 봐. 방금 그건 정태 형 말이 맞는다. 여기에 할아버지 술이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나 때문에 다들 알게 된 거야.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뜯고 그러지 마.”
정엽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흘려 놓고 말했다.
“내가 장손이야.”
그러자 정태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재경 그룹의 장남은 나야.”
정훈이까지 거들었다.
“이 술들의 우선권은 나한테 있다고 봐야 해.”
결국 정엽이가 합의점을 뽑아냈다.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처음 뜯었던 건 너희 둘이 와서 다 비웠고, 지금 뜯은 거 이것도 오늘 다 비우는 게 좋지 않겠어?”
그 말에 정훈이는 제정신이냐며, 이 귀한 술을 소주 마시듯 마시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정태가 정엽이의 생각에 동의를 했다.
“맛 좋네. 이건 뭐… 이왕 뜯은 거니까 찔끔찔끔하지 말고 뜯은 김에 다 비우자.”
“잠깐만. 둘 다 혹시 위스키 어떻게 마시는지 몰라? 이 귀한 걸 어떻게 앉은 자리에서 다 비우자는 말을 해? 이건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은 구할 수가 없는 술이야. 천천히 음미를 해 가면서 마셔야지,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덤빌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곧 정엽이의 입에서 나온 타협안에 정훈이도 더 이상은 길길이 날뛰지 못했다.
“이 병 빼고 새 술만 64병 남았어.”
그 말에 정태는 혀를 내둘렀다.
“술 좋아하셨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집에 있는 술 빼고 이렇게 호텔에 따로 보관해 놓으신 술만 66병이었어? 이거 알고 보면 딴 데도 더 있는 거 아냐?”
“일단 우리 호텔엔 여기 말고는 없어.”
“그래서? 그래서 64병 남았는데 어쩌자고?”
“우리가 이걸 가지고 나눌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내 거, 네 거 구분을 짓는 것도 우습잖아. 여기 있는 할아버지 술들은 우리 셋이 같이 있을 때만 뜯는 걸로 하자.”
그 말에 정태는 정엽이와 이런 자리를 앞으로 얼마나 더 가져야 하는 거냐는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술 뜯으러 올 때마다 두당 한 병씩은 뜯어야겠네. 그래야 빨리 끝나지.”
그리고 정훈이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건… 아이씨, 아까운데… 좋아. 콜! 그렇게 하자. 이렇게 딱 우리 셋이 같이 모였을 때만 뜯는 거야.”
여전히 바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붙이고 있던 정엽이가 온더록스 잔을 입술에 붙인 채 물었다.
“혹시 너네 큰이모 되시는 분한테 따로 이야기 들은 거 있어?”
정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려 정엽이의 옆모습을 쳐다봤고, 정훈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온더록스 잔을 빙빙 돌려 대며 달콤한 위스키 향을 코에 담고 있었다.
“너네 큰이모 쪽에서 들고 있는 지분 26.1퍼센트에서 딱 잘라 절반, 13퍼센트를 던지겠다고 하네.”
정엽이는 양쪽으로 고개를 돌려 가며 정태와 정훈이를 차례대로 쳐다본 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당연히 내일 작은아버지한테도 말씀을 드리긴 할 건데, 그 전에 너희한테 먼저 내 생각을 말해 주고 싶었어.”
정태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온더록스 잔을 입술에 붙였다.
“처음 숙모님 지분 지원받으면서 했던 약속대로,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는 6퍼센트만 가져갈 테니까, 7퍼센트는 재경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해. 딱 떨어지는 비율은 아니지만, 재경이 비율보단 더 먹는 거잖아."
“큰이모가 한 번에 13퍼센트를 던지셨다고?”
정태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엽이를 쳐다봤다.
“그간 호텔 운영을 많이 복잡하게 하셨더라. 솔직히 나도 너네 큰이모 되시는 분 약점까지 잡아 가며 지분을 가져올 마음은 없었는데, 안 잡을 수 없는 약점이었어. 이해를 해라.”
잔 속에 남아 있던 술을 말끔히 비워 놓고 정태가 말했다.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처음으로 마음에 드네. 잘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