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배운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어느덧 4월의 중순.
늦은 봄비가 훑고 지나간 길거리엔 폭삭한 벚꽃이 만개해 온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평년보다 보름 이상 개화 시기가 늦었던 만큼, 그 풍성함은 예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서울.
그만큼 부경통신의 겨울은 길었다.
얼어붙기 일보 직전까지 궁지로 몰려 있었기에, 부경통신에겐 길거리를 수놓고 있는 벚꽃처럼 폭삭한 봄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부경통신 장선길 회장의 집무실 안으로 수행 비서가 급하게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뭔데?”
“JK 드 누락. 동부산 부지 말입니다.”
“난 또 뭐라고. 기다려. 뭘 그렇게 서둘러? 간판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그 큰 부지 공사를 바로 시작하겠어? 빨라도 앞으로 한두 달은 더 지나야 기본 가닥 잡히고 쓸 만한 말들이 나올 거야.”
“시공사 공개 입찰을 하겠다는 공지가 올라왔답니다.”
“뭐? 뭐!”
“금방 건설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들도 지금 막 확인을 하고, 어떻게 된 내용인지 물어보겠다고 저한테 연락을 넣었던 거 같습니다.”
“무, 무, 무, 무슨 소리야? 시공사를 공개 입찰하겠다니! 이미 우리 쪽에서 시공권 가져가는 걸로 이야기 다 끝난 내용인데!”
장선길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15년 가까이 챙겨 오고 있던 비서실장.
그의 눈에 현재 장선길 회장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현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 주고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비서실장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건설사 사장이 보내 준, 동부산 부지 시공사 공개 입찰에 관한 공문 내용을 장선길 회장에게 보여 주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 가며 해당 내용을 다 확인한 장선길 회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수행 비서의 스마트폰을 있는 힘껏 사무실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팍!
“…….”
자신의 폰이 파편을 튀겨 가며 박살이 났음에도 비서실장은 움찔하는 모습조차 들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장선길.
폰을 던지는 동작이 얼마나 컸던지, 재킷 뒷단이 위로 말려 올라갈 지경이었다.
자신의 재킷 뒷단이 말려 올라가 보기가 흉하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장선길 회장은 선 상태로 몸을 움크리며 악을 질러 댔다.
“아아아악! 씨이이이X! 헉, 헉…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감히 날 상대로 장난을 쳐?”
부하 직원의 폰을 박살 낸 부분에 대한 양심의 가책 따윈 느껴 줄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자신의 폰을 꺼내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폰 화면을 터치하는 그의 손은 마치 여전히 이곳의 계절이 겨울인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미래금융 장태산 회장>
지긋지긋하다,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
도대체 죽을 날 다 받아 놓고 있는 영감쟁이가 왜 아직까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왜!
재경이 급속도로 무너졌던 IMF 시절.
만약, 장태산 당시 재경 그룹 본사 전무가 없었더라면 부경 그룹은 재경의 잔잔바리 계열사들이 아닌 재경항공을 통째로 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형님을 대신해, 부경 그룹의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해 왔던 당시 장선길 화학 부사장.
직접 장태산 재경 그룹 본사 전무를 찾아가 만약 부경이 재경항공을 품게 된다면 재경항공의 사장 자리와 더불어 섭섭지 않을 지분, 합법적이지 못한 옵션들까지 원하는 수준으로 다 챙겨 주겠노라 회유를 했었다.
당시의 부경 그룹은 재경항공만 품게 된다면 단숨에 국내 재계 서열 5위권 진입도 가능했었다.
만약 그것만 본인의 손으로 가능하게 만들어 낸다면, 그룹의 후계자 구도를 단숨에 바꿔 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런 야망을 간직한 채 찾아갔던 장선길에게 장태산이 이런 말을 했었다.
“애들과 나눌 이야기가 아니요.”
“뭐, 뭐요? 애들?”
“집에 가서 아버지 모시고 와요. 나도 장 회장한테 할 말이 따로 있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위기에 처해 있었던 당시의 재경.
하지만 그런 재경 속에서도 여전히 거인은 존재했고, 유일한 거인이었던 장태산의 모습은 거칠 것이 없었던 장선길로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상대가 한때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었던 재경의 이인자라고 해도, 어느 누가 부경의 차남인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무례하고 일방적인 무시를 보일 수 있었던가.
하지만 매사에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장선길도 당시의 장태산 전무가 품고 있는 박력 앞에선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장태산 전무를 설득하지 못했던 건, 당시 장선길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실망스런 결과물을 보여 준 첫 경험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 번의 신호음.
장선길 회장은 차분하게 이어지는 신호음으로 애써 분노를 조절해 가며 장태산 회장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
―전화 받았습니다. 장태산이요.
90이 넘은 노인이다.
고작 미래금융 따위와 힘겨루기를 해야 할 부경통신도 아니고.
하지만 장선길의 눈앞으로는 지금의 장태산 회장이 아닌, 손중길이라는 시대의 인물과 함께 재경을 키워 낸 당시 젊고 괄괄했던 장태산 전무의 모습만이 보이고 있었다.
“장선길입니다.”
―그러니까. 장 회장 이름이 뜨길래, 이게 뭔가 싶었어요. 어쩐 일이요?
“회장님은 사업을 이런 식으로 하십니까? 그간 미래금융을 이런 식으로 키워 오셨나 봅니다?”
―뭐에 이렇게 부아가 나셨을꼬? 나도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예전만 못해요. 이렇게 앞머리 다 자르고 들어오면, 이게 조기 새끼인지, 민어 새끼인지 분간을 못 해.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요.
“동부산 골프 리조트 부지. 그거 우리 부경건설 쪽으로 시공권 주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려고 했지.
“뭐요?”
―나는 주겠다 했다고. 근데 그걸 안 받은 건 장 회장 아니요. 줄 때 안 받아 놓고, 왜 이제 와서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릴 하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는 지금 그 약속만 철석같이 믿고 말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우리 쪽으로는 아무런 말도 안 해 주고 시공사 공개 입찰 공지를 띄워요? 혹시 그날 저 찾아오셔서 장난치고 돌아가셨던 겁니까?”
―장 회장, 거참. 보기하고 다르게 사람이 많이 이상하네. 장 회장은 불편한 사람한테 장난을 칠 수 있나 보오? 나는 안 그래. 내가 왜 장 회장한테 장난을 쳐?
“그럼 이제 와서 시공권을 공개 입찰로 돌린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저희보고 그 입찰에 참여를 하라, 그런 말이에요?”
―참여를 하고 안 하고는 부경건설 마음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묻고 그래? 참 이상한 사람이네. 왜 그러지?
“회장님, 지금 상당히 큰 실수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실수를 해도 내가 하고, 그 책임도 내가 지는 거니까 장 회장이 걱정을 해 줄 필요는 없을 거 같고, 그 전에 이건 정확하게 짚고 가야겠네? 내가 그날 분명히 말했지요? 이 무거운 몸 이끌고 직접 장 회장 찾아가서.
“뭘요?”
―천천히 생각을 해 보고 내 쪽으로 연락을 주든, 아님 손정태 사장하고 이야기를 해 보든 좋게 좋게 이야기로 풀어 나가 보자고.
장선길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 영감탱이가 지금 내 눈앞에 있기만 한다면 두 손으로 목을 졸라 죽여 버렸을 것이라고.
―근데 거진 2주 넘게 언론 잡고 이상한 짓을 하시더만. 그래서 나는 내가 준 제안이 마음에 안 들어 알아서 하려나 보다… 그러고 있었던 거고. 나는 서로 피 보지 말자고 찾아가 제안을 했던 거요. 근데 장 회장은 피를 보겠다 한 거고. 어느 정신 나간 놈이 내 목에 칼을 갖다 댄 놈한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자… 하면서 밥상을 차려 갖다 바치오? 장 회장은 그간 사업을 그런 식으로 하셨소? 그간 부경통신, 건설… 그런 식으로 키워 오셨나 보오?
“이거 하나 알아 두세요. 우리 부경건설. 그 공사 아니라도 문제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근데 제가 지금 뒤통수를 맞은 건 장 회장님 입장에서도 다행은 아닐 거예요.”
―뒤통수? 먼저 때린 건 기억을 못 하고, 뒤에 맞은 것만 기억을 하겠다 그거네? 알았소. 그거까지 내가 정확하게 알아 두리다.
“사람 이렇게까지 서운하게 만들어 놓고,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밤에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어서,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떠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게 지금의 나란 사람이오. 설마 내가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치지도 않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전전긍긍할 사람으로 보이요? 험한 소리 들은 김에 나도 한마디만 합시다.
“…….”
―성격 좀 죽여요. 장 회장은 그 성격 때문에 큰일 보겠다. 이젠 나이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여전히 피가 끓어? 어디 뭐 못 배운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격 떨어지게… 쯧. 끊읍시다.
손정태, 스너프 사장에게 통신의 주요 사업 부문 중 하나였던 웹콘텐츠사업부 노블레스를 빼앗긴 후로 장선길 회장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
동부산 부지에 골프 리조트 건설 계획이 확정이 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코 작은 공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공사의 시공권을 받아 낸 후 보복을 해도 늦지 않을 거란 계산이 장선길 회장에겐 있었다.
그게 누이인 장혜선과 동생 장선열이 재경을 상대로 전면전을 불사하겠단 의지를 보였음에도, 거기에 기름만 부어 놓고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장태산 회장과 통화를 하는 동안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장선길.
그의 눈에 조금 전 자신이 화풀이를 하겠다고 있는 힘껏 집어 던졌던 비서실장의 스마트폰이 액정이 깨어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워 줘?”
“아, 아닙니다.”
“얼른 치워.”
“네, 회장님.”
“차 지금 대기시키고.”
“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비서실장의 질문에 장선길 회장은 크게 숨을 들이켠 후 날카롭게 찢어진 눈으로 대답했다.
“왜? 누구 만나서 뭐 할 거냐는 것도 물어보지?”
“아닙니다. 바로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비서실장이 서둘러 회장실을 빠져나간 후, 장선길 회장은 진열장 앞으로 섰다.
진열장 유리를 통해 어설프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그의 누이 장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님. 왜 그때 누님이 저랑 선열이한테 말했던 거 있잖아요.”
―뭐?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내가 거기 관련해서 말한 게 한두 개야?
“거기에서 세탁시킨 미래금융 검은돈 말이에요. 그 집 둘째 아들, 장영우라고 했나? 암튼 그 친구가 페이퍼 컴퍼니 만들어서 미래금융 자금을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흘렸던 거라며. 그거 확실한 거지요?”
―확실히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큰 투자 들어간 루트가 두 개가 있어. 그 둘 다 대표가 장영우로 되어 있고.
“원래 미래금융이 넣었던 투자 지분은 몇 퍼센트였소?”
―내가 거기까지 자세하게 기억을 할 순 없지. 15퍼센트 내외였던 거 같긴 한데,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
“그 15퍼센트에 페이퍼 컴퍼니 두 개 지분이 더해져서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미래금융 37퍼센트 정도가 된다 그 말이지요?”
―너 그때 내가 보라고 준 자료 자세히 안 봤지?
“나 지금 밖에 나가야 해. 맞아요, 아니에요. 그것만 말해요.”
―확실해. 그쪽에서 세탁기 돌리고, 그냥 돈만 가져올 순 없으니까, 돈 돌린 세탁기를 아예 통째 한국으로 가져와서 내 호텔을 먹은 거라고.
“내일이나, 모레쯤 선열이하고 다 같이 밥이나 한 끼 합시다.”
* * *
부경통신의 장선길과 통화를 끝낸 장태산.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통화를 하는 동안 유지했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가슴 쪽에서 전해지는 아찔한 통증에 미간이 좁혀졌다 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주방 입구에서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던 며느리에게 장 회장은 물 한 잔을 갖다 달라 말을 해 놓고, 폰으로 둘째 장영우의 이름을 찾았다.
며느리가 가져다준 물 한 잔에 텁텁해진 입을 적신 장 회장.
“괜찮다. 녹두죽 다 끓였어?”
“지금 드려요?”
“차려 놔. 영우하고 통화 잠깐 하고 가서 먹을 테니까.”
“통화 다 하시고 말씀하세요. 식어요.”
“가 있어.”
며느리에게 빈 잔을 건네준 뒤 장 회장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아버지.
“현금을 좀 쟁겨 놔야겠다.”
―얼마나요?
“가능한 한 많이. 부경의 장선길이가 금방 전화를 걸어와서 길길이 역정을 낸다. 동부산 부지 때문에. 허허허.”
―역정을 내요? 아버지한테? 이 쌍놈 새끼가. 왜? 뭐라고 하던데요?
“그거까지는 알 거 없고, 금방 애비가 시킨 거 최대한 빨리 준비를 해. 속이 시꺼먼 놈들 아니냐. 어디에서 뭔 짓을 꾸밀지 아무도 모른다. 괜히 엄한 데서 꼬투리 잡히는 일 없게끔 사업장 단도리 잘하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