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개인 돈입니다
미래금융에 관한 특별 세무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을 언론이 앞장서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부경 놈들이 우리 재경과 미래금융을 상대로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선전 포고를 한 거나 마찬가지지.
그것도 치사하게 언론의 등 뒤에 숨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 홍준이는 상황이 돌아가는 추이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고, 미래금융의 움직임 역시 침착하게 특정한 목표물을 향해 한 발씩만 나아가고 있었다.
많이 가지도 않았다.
빠르게 가지도 않았고.
그저 한 발씩, 한 발씩… 상대가 요령을 부려 뒤로 빠지지 못할 정도의 안심을 안겨 주며 천천히 나아갈 뿐이었다.
태산이는 그 특정한 목표물에 어떻게 다가갈지에 대해선 나에게조차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라고만 말했다.
해당 이슈는 상식선에서 수습을 할 성질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나는 안다.
지금 태산이 이 친구가 얼마나 부아가 나 있는지를.
이렇게까지 싸움을 즐기는 친구가 아니거든.
그런데 이런 인물이 제대로 눈이 돌아가 버리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함정인데, 아무리 봐도 그 함정에 부경 놈들이 빠진 거 같다.
안 싸워서 그렇지 한번 물겠다 마음을 먹은 상대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친구가 바로 태산이다.
그런 태산이를 상대로 이렇듯 조잡한 덫을 친 상대가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친 덫은 사냥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였고.
경솔한 놈들.
“흠….”
오늘 난 출근을 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이 수영을 하고, 똑같이 아침 시간을 보냈지만 출근은 하지 않았다.
강인성 차장에게도 대기를 하라는 말과 함께, 따로 연락이 있기 전까지는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으라고만 일러두었다.
11시에 태산이가 기자 회견을 통해 해당 이슈에 관한 미래금융의 입장과 ‘제콤 컴퍼니’, ‘레이밤 JC’를 통해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흘러들어 간 투자금에 대한 공개 해명을 할 예정이다.
해당 이슈를 키워 낸 언론 쪽에서 내용 갈라 치기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라는 명목.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당 사안을 수면 위로 정확하게 띄워 놓아야만, 나중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발뺌을 하겠다는 인간들까지 다 엮을 수 있을 거라는 게 태산이의 생각일 것이다.
그 정도는 이미 진작에 눈치를 채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뭘 얼마나 크게 터뜨리겠다고 그러는 건지, 원….”
10시 반.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그리고 미래금융의 기자 회견을 생중계하기로 되어 있는 뉴스 채널 중 한 곳을 선택해 들끓기 시작한 마음을 다잡으며 때를 기다렸다.
현재 태산이가 부경 놈들을 잡겠다고 부경 놈들과 똑같이 덫을 치고 있는 이런 모습은 분명 내가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과 많이 다르다.
태산이는 100퍼센트가 되기 전까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친구지.
그런 친구가 이렇게 칼을 갈았다는 걸 공개적으로 보여 주고 있을 때엔 내가 손중길이었을 때에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어 줘야 했는데, 그걸 요즘 친구들이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아주 근사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 *
미래금융 측이 마련한 기자 회견 장소.
그 기자 회견 장소 안으로 미래금융 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 장태산을 시작으로 부회장 장영석, 그리고 3세 경영을 준비 중인 장하늘 상무와 해당 이슈의 쟁점인 ‘제콤 컴퍼니’, ‘레이밤 JC’의 대표 장영우까지 모두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종각역 근처의 오래된 관광호텔이었다.
호텔의 대연회장 안은 이미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의 중심에 선 미래금융 측의 해명을 담기 위해 전 언론의 기자들이 먼저 자리해 있었다.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선 많은 2인용 세미나 테이블 위로는 각종 촬영 장비, 마이크, 녹음기 등이 어지럽게 올려져 있었고, 미래금융가 사람들이 연회장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직후부터 그들의 카메라 플래시, 촬영 장비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연회장 바깥쪽 벽을 따라 미래금융가 3대가 해당 이슈에 관해 책임을 통감한다는 듯 무거운 표정을 유지하며 차례대로 무대 단상까지 걸어갔다.
가장 선두엔 장영석 부회장이, 그 뒤로는 장영우 대표, 그리고 그 뒤로는 장하늘 상무가 회장 장태산을 부축해 가며 조심스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먼저 무대 단상으로 올라간 장영석 부회장과 장영우 대표는 자신의 아버지가 올라오시기 전까지 기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아 놓고 기다렸다.
장태산 회장이 장하늘 상무의 부축을 받고 무대 단상 위로 올라선 후, 장영석 부회장과 장영우 대표는 중간 자리를 마련해 자신들의 아버지가 함께 설 수 있도록 만들었고, 장태산 회장의 옆자리를 여전히 장하늘 상무가 지키고 서 있게 만들었다.
“고개 깊게 숙여서 사과부터 드리자.”
장 회장의 목소리는 더없이 건조해져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서 손녀딸에게 의지해 힘겹게 고개를 숙이는 장태산 회장.
그의 양옆으로 함께 선 장영석 부회장과 장영우 대표도 무거운 얼굴 표정으로 머리 정수리가 카메라에 정확하게 잡힐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미래금융과 관계된 내용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진 점, 그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고 계실 많은 국민 여러분들, 그리고 미래금융 투자자 분들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달드립니다.”
구십이 넘은 노경영인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자신과 자신이 일궜던 기업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상황에서도 장태산 회장은 침착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장영석 부회장이 뒤로 빼어 준 의자.
기자 회견을 위해 마련된 간이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테이블 뒤로는 장태산 회장만이 자리에 앉았을 뿐, 장영석 부회장이나 장영우 대표, 장하늘 상무는 장태산 회장의 뒤로 서서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대했던 구도가 아니라, 카메라 앵글을 다시 잡는 기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더러는 일부러 뒤로 자리를 옮겨 전체 모습이 카메라에 모두 잡힐 수 있도록 설정을 다시 하기도 하였다.
“기업 활동을 하는 한 명의 경제인으로서, 현재 저희 미래금융 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강도 높은 의혹에 무척 당혹스럽고, 당혹스러움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여태껏 재경의 그룹 본사 전무 생활을 거쳐 미래금융을 만들어 키워 내기까지, 오늘과 같이 고개를 들 면목이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해당 의혹과는 별개로 이번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저는 미래금융의 회장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고 당연히 해당 의혹에 불편함을 느끼고 계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여러 투자 관계자분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도록 의혹 해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의혹이 진실로 밝혀지는 부분에 있어선 모든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일까.
지금껏 각종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불거진 경제 이슈에서 이번처럼 해당 기업의 총수뿐 아니라, 그 일가가 모두 카메라 앞에 서서 죄인인 듯 고개를 조아렸던 적이 있었던가.
경제부에서 잔뼈가 굵은 기자들 대부분도 이미 이때부터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사건 조사가 구체화되기도 전에 기자님들께 먼저 요청을 드려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의혹을 만들어 낸 빌미가 확실하게 있음에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의혹을 앞장서서 크게 키운 검찰 쪽에서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고, 정확한 조사가 이뤄져 명백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저희 미래금융을 비롯해, 미래금융의 투자가 들어간 기업들 쪽으로 경제적 손실이 크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저희 미래금융이 검찰 쪽으로 정확한 해명을 통해 혐의가 없다는 걸 밝혀내더라도, 이런 자리를 통해 정확한 저희 측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면 한 번 추락한 기업의 이미지는 복구가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어느 한 기자가 용기있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 이 두 페이퍼 컴퍼니가 프랑스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미래금융의 불법 비자금을 투자한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에 장태산 회장은 다소 느릿한 속도로, 하지만 정확한 맥을 짚어 가며 대답을 했다.
“방금 주신 질문을 제가 임의대로 분리를 시켜 보겠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분리를 시킬 수 있을 거 같은데, 첫째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가 페이퍼 컴퍼니냐 아니냐 하는 부분부터 짚고 가겠습니다.”
언제 플래시 세례를 퍼부었냐는 듯, 느릿한 장 회장의 말투에 기자 회견장 안으로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각종 언론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저희 미래금융이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해외 투자 기업 쪽으로 미래금융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했다… 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이 그러한 방법을 통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하고, 출처가 불명확한, 소위 말하는 검은돈을 다시 깨끗하게 세탁하여 국내로 반입을 시도한 사례가 많기도 하지요. 하지만 페이퍼 컴퍼니라고 하는, 흔히 말하는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회사는 엄밀히 말해서 그 자체가 불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장 회장은 조금 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 기자를 향해 떳떳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어감 자체가 다소 불손하긴 하나, 페이퍼 컴퍼니라는 건 다양한 기업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탈세와 절세는 엄연히 다른 내용이죠. 탈세가 아닌 절세를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하는 기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국내 대기업, 중견 기업 중 그러한 구조를 통해 절세를 시도하지 않는 기업이 과연 얼마나 될 거 같으세요?”
“하지만….”
“네, 하지만.”
장태산 회장은 언제 자신이 세상의 역적임을 인정했냐는 듯, 단단한 눈빛으로 기자의 말을 잘랐다.
“저는 페이퍼 컴퍼니에 대한 좋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아주 옛날 사람입니다.”
“…….”
“페이퍼 컴퍼니라는 게 불법이 아닌 합법적인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업 형태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저는 그런 변칙까지 줘 가며 미래금융을 키워 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가 페이퍼 컴퍼니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지요. 어떻게 엄연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가 페이퍼 컴퍼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기준으로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는 외국계 기업일 수는 있지만, 페이퍼 컴퍼니가 절대 아닙니다.”
“그 두 기업이 페이퍼 컴퍼니가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당연히 아니지요. 제콤 컴퍼니는 현재 프랑스에 기반을 두고, 아직 한국에는 수출을 하고 있지 않지만 유럽 전역, 그리고 일본 쪽으로 구스다운 이불 수출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유통 기업입니다.”
“…….”
“그리고 레이밤 JC 역시, 아직 한국에는 수출을 하고 있지 않지만 여러 독일산 주방 브랜드들의 기구들을 유통, 에이전시 개념으로 중계 수출을 하고 있는 기업이고요.”
판이 새롭게 짜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론을 선동했던 몇몇 언론사 소속의 기자들은 장태산 회장의 입에서 나온 내용이 팩트인지, 만약 팩트라면 어떤 방향으로 새로운 물타기를 시도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팩트가 아니라면 어떻게 미래금융의 바닥을 긁어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얕은수가 깊어지기 전, 장태산 회장의 눈빛을 받은 장영우 대표가 제콤 컴퍼니, 그리고 레이밤 JC의 프랑스 사업자 등록증, 사업 현황 매출표를 공개하면서 사전 차단을 시켜 버렸다.
장태산 회장이 말을 이었다.
이어지는 말 역시 처음 손을 들고 일어났던 기자가 던진 의혹에 대한 해명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제콤 컴퍼니, 그리고 레이밤 JC가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미래금융의 불법 비자금을 넣는 채널이 아니었냐는 질문, 그리고 그 내용을 부정하냐고 물으셨는데… 네, 둘 다 사실 내용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는 미래금융과는 아예 별개의 해외 유통 회사입니다. 그 두 업체 쪽으로 미래금융의 투자는 단 한 푼도 들어간 게 없고, 저희 미래금융에는 불법 비자금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내용 모두 사실이 아닌 거죠.”
처음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가 미래금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예 별개의 해외 유통 회사라고 방금 말씀을 하셨는데요, 미래유통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업이 어떻게 430억이라는, 현재의 통화 가치도 아닌 20년 전의 43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겁니까?”
장 회장이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당 기자는 자기가 질문을 던지는 쪽임에도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미래금융의 초기 자본이 100억 미만이었던 걸로 이번에 검찰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정확하게 87억 정도가 초기 자본으로 들어갔었지요.”
“미래금융의 초기 자본이 100억 미만이었는데, 어떻게 43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미래금융을 통하지도 않고 융통을 시킬 수 있으셨던 겁니까?”
“기자님.”
순간 기자님이라는 공식적인 표현 대신 ‘기자 양반’이라는 표현으로 상대를 깔아뭉갤 뻔했던 장태산 회장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추태를 공식 석상에서 들키지 않은 자신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장 회장이 질문으로 질문을 받아쳤다.
“그 시절 재경 그룹의 시장 가치가 얼마나 되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
“어느 정도였다… 하는 짐작은 하시겠지만, 정확한 수치는 모르실 겁니다. 아무리 많은 계열사가 IMF 시절을 겪어 내면서 여기저기로 찢어지며 분할 매각이 이뤄졌지만, 그때에도 재경 그룹은 대한민국 국적 항공사를 들고 있는 큰 회사였습니다. 그 회사를 만든 분이 바로 손중길 회장님이셨고, 그분께 전 재산을 투자해서 함께 기업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지요.”
“……!”
“재경포목점, 재경상회… 지금의 재경을 있게 한 모태 사업들이지요. 그 사업의 근간은 제 집안 돈이었습니다. 그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저는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재경의 살림을 도맡아 했습니다. 설마 그렇게 재경의 시작을 손중길 회장님과 함께했던 제가 40년 넘는 재경의 생활을 끝내고 제 발로 재경을 나오는데, 미래금융의 초기 자본금 정도 되는 수익만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미래금융의 초기 투자 비용은 재경에서 제게 성의를 보여 준 퇴직금 수준 정도였다고 보셔도 무관합니다.”
“…….”
“물론 100억, 87억… 큰돈입니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죠. 하지만 제 청춘, 제 집안의 전 재산을 부어서 손중길 회장님과 함께 키워 낸 재경 안에서 저의 지분은 어쩔 수 없이 그보다는 더 많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성실히 세금 신고를 했고요, 그러고 남은 돈으로 분리 투자를 했던 것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증빙 서류를 첨가하겠지만, 제콤 컴퍼니와 레이밤 JC를 통해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쪽으로 넣은 투자는 미래금융으로 모인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아니라, 제 개인 돈입니다.”
재경 그룹이 사돈가인 부경 그룹으로 인해 여러 갈래로 찢어질 당시, 그걸 지켜 내지 못했던 장태산 회장, 그의 가슴도 함께 찢어졌었다.
그가 느꼈던 상실감, 허무함, 그리고 부경 그룹에 대한 분노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재경이라는 세상 자체를 아끼고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장태산 회장의 진심은 비교 대상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장태산에게 재경은 자신이 살아왔던 우주, 그 자체였다.
비록 그 우주의 주인은 손중길이었지만, 그 우주를 사랑했던 마음만큼은 그 주인에게 뒤지지 않았던 장태산이었다.
그랬던 장태산에게 26년 세월 만에 자신의 우주를 찢어발겨 짓밟아 놓은 부경 그룹을 상대로 제대로 된 복수를 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구십 넘게 살아 본 인생.
이 나이에 느껴 보기엔 지나치도록 감사한 짜릿한 쾌감을 부경 그룹 쪽에서 선물을 해 주고 있었다.
그 선물을 후회 없이, 여한 없이 모두 다 느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새로이 짜인 판.
노장, 재경의 산증인, 그리고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장태산 회장의 공격이 부경을 향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