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입니다
스너프 본사 사장실.
JK 드 누락의 손정엽 대표가 마치 감각적인 갤러리를 방문하듯 사장실 안의 인테리어에 감탄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 밖에서 봤을 때랑은 완전 딴 세상이네. 이거 재경이 인수하기 전부터 사장실 인테리어가 이렇게 고급졌던 거야, 아님 인수 후에 네가 이렇게 바꾼 거야? 어떻게 된 게 우리 호텔 스위트룸보다 회사 사장실 컨디션이 더 좋아?”
소파 상석에 앉아 있던 정태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되어 보이는 덜떨어진 사촌 형의 행실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코몬드! 야, 이거 진품이야?”
“꼴에 보는 눈은 있나 보네. 단번에 코몬드도 다 알아보고. 손대지 마라. 거기 그 부분은 청소하는 사람들한테도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진짜라고? 이거 진짜 코몬드 작품이라고? 근데 이걸 이렇게 진열해 놓는다고? 미쳤구나, 네가.”
그 후로도 정엽이는 한참 동안 정태의 사무실 안을 구경하듯 돌아다녔다.
그러다 정태의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 눈치껏 자리에 앉았다.
“꼭 직접 만나서 해야 하는 이야기라는 게 도대체 뭔데?”
“확실히 달라, 한국은. 인터넷만 빠른 게 아냐.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사람들 성격까지 급한지….”
“노닥거릴 시간 없다. 정신은 더 없고. 할 말만 해, 할 말만. 이렇게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뭐든 다 빠른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왜 이렇게 진실만은 빨리 안 밝혀지는 거야? 아닌가? 이 나라에선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을 믿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봐야 하나?”
정태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정엽이는 재빨리 표정을 가볍게 풀어 놓고 너스레를 떨었다.
“4월 장사까지 이렇게 망쳐 버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나 이제 진짜 큰일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5년 뒤에 너한테 호텔 경영권 넘기기도 전에 호텔 부도부터 내겠다.”
“어떤 방향이든 난 크게 상관없어. 부도 낼 거 같으면 미리 말해. 그래야 내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주워 담기가 수월하지.”
“뭐라도 마시면서 하자. 짧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야.”
정태는 커피 두 잔을 넣어 달라고 내선 전화를 넣었고, 커피가 들어오기 전까지 정엽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정태의 사무실 인테리어를 감상했다.
커피가 들어왔고, 정엽이가 모든 결심을 끝낸 듯 웃음기를 지워 버린 뒤 입을 열었다.
“호텔 경영권 다시 가져오기 전에 부산에서 정훈이를 만났던 적이 있어.”
“다 아는 이야기야. 본론만 말해.”
“그때 정훈이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정신 차리라고. 여기 한국이라고.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날고 긴다는 스펙을 장착한 사람들이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부경 그룹이고, 그 안에서도 뛰어난 사람들끼리 자기 자리 지켜 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매일같이 박이 터지게 싸우고 있는 곳이 부경이라고.”
그 말에 정태는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우리 재경이 부경한테 밀릴 거 같아?”
“최소한 절실함만큼은 밀리고 있는 중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너 사이드, 경영, 운영진의 절실함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회사가 사라지면 자신의 삶까지 위협받게 될 직원들의 절실함은 아직 부경 쪽으로 크게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말을 똑바로 해.”
“원래 전쟁도 말이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략을 하는 쪽이 수성을 하는 쪽 인원의 최소 4배, 5배는 되는 병력이 필요한 거야. 그게 전쟁이고, 정복인 거 아냐? 모든 게 다 오픈된 맨땅에서 붙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부경이라는 큰 성을 무너뜨리겠다고 하는 중이잖아. 그럼 더 많은 인원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인원이 아니라면 상대보다 월등히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군대는 갔다 와서 전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넌 갔다 왔냐?”
“나 원 참… 됐다. 내가 형이랑 무슨 말을 하겠냐. 설레발치지 마. 때를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야.”
“언제까지 기다리게? 부경이 다른 이슈로 미래금융 게이트를 다 덮어 버릴 때까지?”
정엽이의 얼굴엔 장난기, 그리고 그 장난기에 감춰진 진지함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진짜 재밌는 나라야. 이건 신기한 걸 가볍게 넘어 버렸어.”
“뭐가 그렇게 재밌고, 신기한데?”
“어떻게 연예인 한 명이 마약을 한 게 미래금융 게이트 이슈를 이렇게까지 빨리 밀어낼 수가 있어? 진짜 재밌지 않아? 타이밍도 정말 예술이야. 정확하게 태산이 할아버지가 기자 회견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미리 다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마약 혐의에 관한 뉴스가 떴어.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 그런데 뉴스 분량이 지나쳐. 똑같은 사회 이슈라도, 객관적으로 연예인 마약 혐의가 미래금융 게이트를 덮을 수준은 아니잖아.”
“순진한 거야, 아님 순진한 척을 하는 거야?”
“둘 다 아니니까 널 찾아온 거 아니겠어? 네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재경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뭐?”
“언제는 오기만 해 보라며? 다 죽여 버릴 거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뻥카였어?"
"뭐, 뭐? 뻥카?"
"왜 이렇게 점잔을 떨고 있냐고. 내가 봤을 땐 미래금융 말고는 지금 현재 끝까지 부경을 물어뜯고 있는 건 정훈이 하나뿐인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
“부경마트에 들어간 재경식품 물건들 완전히 다 빠진 거 뉴스 봐서 알고 있지? 정훈이는 지금 그런 방법으로라도 계속 부경과 관련된 이슈를 끌고 가고 있잖아.”
그 부분에 있어선 정태 역시 시원한 방법을 못 찾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정엽이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기껏 물에 빠진 사람 살려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소릴 넘어 아예 훈계질까지 하시겠다?”
“설마 내가 하는 게 훈계겠냐? 나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 등신처럼 느껴지는데.”
“스너프에서도 오늘, 내일 중으로 부경화학 쪽 생활 건강 제품들 다 내릴 거야.”
“진작에 좀 하지.”
“그러고 싶어도 우린 부경화학이랑 다이렉트로 거래를 트는 게 아니라, 따져 볼 게 많았어. 우리 스너프에 깔리는 상품들이 어디 형네 백화점처럼 기업 다이렉트인 줄 알아? 거의 대부분이 기업 쪽 제품들 중간 유통상들이야. 자영업자들이라고. 그거 다 추리고, 사정 따져 봐 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정도만 가지고 미래금융 게이트 이슈를 계속 더 끌고 가는 건 어렵지 않겠어?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져 버리면, 부경이 미래금융, 그리고 재경을 상대로 한 공격은 비즈니스라는 정당성을 얻게 돼. 그게 가능한 나라가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이잖아.”
정태는 다시 한번 정엽이를 비웃었다.
“꼭 일 못하는 직원들이 회사의 문제점은 귀신같이 짚어 내지. 회사의 문제점을 자신이 일을 못하는 무능의 핑계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데 일 잘하는 직원들은 형처럼 안 그래. 문제점을 찾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아내지. 그래서 결국은 그 문제점을 회사 발전의 계기로 만들어 주거든. 형이 지금 가지고 있는 답답함? 나도 가지고 있어. 내가 더 많이 답답하지 않을까? 스너프하고 형이 운영하는 호텔 몇 개. 사업 사이즈로 비교가 돼? 마음대로 안 된다고 나 찾아와서 징징거릴 시간에, 방법을 찾아.”
하지만 정엽이 역시 정태를 보며 웃었다.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단 말이네.”
정엽이가 툭 하고 던진 뜬금없는 한마디에 정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원래 내가 따로 한국에 가지고 들어올 아이템이었으니까, 완벽한 판을 깔아 놓고 진행을 할 생각에 안 꺼낸 거라지만, 너라면 내가 주기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꺼내 놓으라고 해야 맞는 거 아냐?”
“…뭐가?”
“세이트론.”
세이트론.
이번에 미래금융 게이트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제콤 컴퍼니, 그 제콤 컴퍼니에서 유럽 전역과 일본 쪽으로 활발하게 수출을 하고 있는 구스다운 이불의 브랜드가 바로 세이트론이다.
“태산이 할아버지가 기자 회견을 하자마자 실검 순위에까지 올라갈 정도로 세이트론의 이름이 화제가 됐었잖아.”
“그게… 왜?”
“제콤 쪽으로는 내가 말을 해 놓을 테니까, 그거 스너프에서 최대한 빨리 받아라.”
“뭘 받으란 말이야?”
“당장은 병행 수입 형태로라도 받아서 스너프에 깔아 버리라고. 이슈는 내가 만들 테니까.”
“어떻게?”
“어차피 JK 드 누락의 전 객실 침구를 다 세이트론으로 교체할 계획이었어. 그리고 객실 판매량을 올릴 방안으로, JK 드 누락의 객실 이용자에 한해 세이트론 침구 세트를 50퍼센트 가격 수준으로 할인 판매를 해 주는 프로모션을 준비 중이었고. 왜 예전에 조선호텔에서도 똑같은 프로모션으로 객실 판매율을 크게 올린 적이 있었잖아. 그거 원래 한국에서만 특수한 프로모션이지 유럽 쪽에선 계절 바뀔 때마다 종종 하는 프로모션이야.”
“당장은 한국에 수입 업체가 없으니, 그걸 나더러 병행으로 받아 달라?”
“마진은 제콤 쪽에서 수출 단가를 낮춰서라도 최대한 맞춰 줄 거야. 정태야.”
아주 진지해진 눈빛으로 정엽이가 정태를 불렀다.
“지금 우리가 무조건 해내야 되는 건 미래금융 게이트가 다른 이슈에 묻히지 않도록 재경, 부경, 미래금융, 또 스너프, JK 드 누락… 관련된 키워드를 계속 노출시키는 거야.”
이번엔 비웃음이 아닌, 조금은 마음이 열린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정태가 말했다.
“다 좋은데, 그래도 가르치는 말투는 여전히 좀 거슬리네.”
그 말에 정엽이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호텔은 내가 아닌 태산이 할아버지의 생각이셨어. 내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고. 난 오히려 부경으로 넘어간 재경의 계열사 중 호텔이 아닌 물산 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산?”
“그게 내가 프랑스에 있으면서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통해서는 쁘띠 기뿔리, 그리고 스파 제품 쪽을 키웠고, 제콤을 통해서는 세이트론, 레이밤을 통해서는 독일산 주방용품을 키웠던 이유였어.”
“…….”
“호텔은 처음부터 태산이 할아버지로 인해 내가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하는 사업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을 할 수가 없었어. 만족이 안 되지. 내가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불씨가 꺼지기 전에 어떻게든 장작을 넣어야지. 세이트론. 좋은 브랜드다. 이미 한국의 많은 상사 기업들이 라이선스 계약을 하자고 접촉을 시도해 왔었어. 그런데 한국엔 내가 직접 가지고 들어올 생각으로 보류를 해 왔던 거고. 그거… 스너프에서 가지고 가라.”
그때 정태는 반짝거리는 정엽이의 눈을 통해, 아주 오래전 자신이 그렇게나 좋아했고, 또 잘 따랐던 유일한 형 손정엽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차피 스너프는 오프라인 유통판도 확보를 하고 있잖아. 이미 한국도 쇼핑의 대세가 명품 의류에서 명품 가구, 침구류로 다 옮겨간 거 같던데? 조금만 신경 써서 브랜드 이미지 메이킹을 해 놓으면, 계절 바뀔 때마다 효자 역할을 해 줄 거야.”
“정말 속을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믿음이 안 가.”
“누구? 나?”
“어. 형.”
“왜?”
“처음엔 드모어 인베스트먼트. 그리고 나중엔 부경호텔의 지분 11퍼센트. 그리고 지금은 제콤 컴퍼니, 레이밤 JC. 또 뭐가 더 남은 거야? 양파도 아니고, 까도 까도 뭐가 계속 나오네. 그렇게 자신을 숨겨 가면서 하는 사업이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숨긴 적이 없는데?”
“숨긴 적이 없어? 허, 하하하.”
“내가 언제 숨겼어? 내가 숨긴 게 아니라, 네가 물어본 적이 없었겠지.”
순간 정태는 말문이 막혔다.
“너도 그렇고, 정훈이도 그렇고… 그냥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을 왜 너네가 그걸 안 해 놓고, 내가 뭘 자꾸 숨기는 거처럼 사람을 몰아가?”
“…….”
“우리가 그래도 명색이 형들인데, 정훈이 혼자 저렇게 부경마트 상대로 피 터지게 싸우도록 내버려 둘 거야? 안 그래도 잘난 척 오지는 자식인데, 나 이제 그 자식한테 잔소리 듣는 거 진짜 지겹다.”
* * *
정부 지원의 국가 보조금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해 왔던 통신 업체가 바로 부경통신었다.
부경이라는 큰 틀 안에서 통신이라는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해 왔던 장선길 회장.
그가 가지고 있는 정부 인맥들 역시 법조계, 언론계 못지않게 탄탄했다.
미래금융의 기습적인 기자 회견으로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부경통신의 장선길이 챙겨 준 돈으로 집을 사고 품위를 유지해 왔던 많은 정계, 법조계 인물들은 그가 허무하게 무너지게 구경만 할 수가 없었다.
절대 혼자 죽지 않을 인물이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몰락에 자신들의 운명도 함께 걸려 있다는 걸 다들 인지하고 있었기에….
유명 연예인의 마약 관련 스캔들에 이어 이번엔 연예 기획사 측의 성 상납 게이트를 크게 터뜨린 언론.
장태산 회장이 직접 그 늙은 몸을 이끌고 카메라들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인 수고가 무색해질만큼, 미래금융 게이트에 관한 세상의 관심은 자극적으로 터져 나오는 연예계 이슈에 서서히 덮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래금융 본사 상무 장하늘의 인스타로 한 통의 DM이 들어왔다.
수만의 사람들이 팔로우를 하고 있는 계정이었기에 하늘이는 사실 쓸데없는 DM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좀처럼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저 DM이 쌓여 있는 꼴을 못 보기 때문에 삭제를 위해 한 번씩 들어가 전체 삭제를 하는 수준.
그런데 첫 문장부터 하늘이의 이목을 잡아끄는 DM이 있었다.
―저는 부경통신 장선길 회장의 차량 운전을 하고 있는 운전기사입니다.―
DM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자신을 장선길의 운전기사라고 밝힌 인물은 세상 사람들이 경악을 할 만한 그의 치부를 상당수 증거물로 확보하고 있다며, 혹시라도 그 치부에 관심이 있다면 DM 답장으로 전화번호를 남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늘이가 빠르게 해당 계정을 확인했지만, 누가 봐도 자신에게 DM을 남기기 위해 새로 만든 계정이었고 거기엔 그 존재를 증명할 만한 제대로 된 이름도, 닉네임도 없었다.
당연히 사진 게시물 같은 것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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