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잃었다는 건 다 잃었다는 소립니다
영석이가 같이 저녁을 먹자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늘이도 같이 자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늘이한테는 말하지 말고 그냥 나오라네?
그런 말이 없었어도, 하늘이가 없는 자리를 만드는 건데 괜히 전화해서 뭐 때문에 그러는 거 같냐고 물어볼 눈치 없는 내가 아니지.
내심 반갑기도 한 연락이었다.
부경마트 잡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집에서 혼자 저녁에 맥주 캔 따는 거 말고는 술을 입에 댈 기회조차 없는 나날이었다.
술을 고르는 안목은 많이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분위기 정도는 낼 수 있었던 자리.
그 자리에서 밍밍해 빠진 사케 한 잔을 내게 건네며 영석이가 물었다.
“혹시 하늘이한테 따로 들은 이야기 있어?”
“무슨 이야기요?”
“장선길이 운전기사라는 친구가 하늘이한테 연락을 했어.”
장선길이 운전기사가?
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뇨, 모르는 내용인데요?”
뒤 내용이 궁금해서 집중을 시도하고 있는데, 영석이 이놈이 김빠지게 대화 흐름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너네는 매일 연락 정도는 하고 지내냐?”
매일?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그럴 때도 있고, 요즘은 아닐 때가 더 많은 거 같네?
하늘이도 바쁘겠지.
미래금융 게이트 직격탄을 맞았는데, 정신이 있겠나 어디.
“만나기는 자주 만나?”
“최근엔 좀 바빴잖아요.”
“꼭 최근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 공식적으로 결혼 발표를 한 게 언젠데, 아직도 그렇게 거리가 안 좁혀져서 어쩌자는 거야?”
꼭 좁혀야만 하는 거리는 아니다.
오히려 난 지금 거리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거리를 무너뜨리면, 손해는 내가 아니라 태산이의 인생이 들어간 미래금융이 보게 될 테니….
“저희 친합니다.”
“너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 아니고?”
“하늘이도… 그렇게 생각을 할 거예요.”
“물어봤냐?”
“뭘요?”
“하늘이도 너처럼 두 사람이 친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런 걸 꼭 물어봐야 압니까? 하는 행동에서 다 나오는 거지. 제가 안 편하고 친하단 생각을 안 하면 그렇게 못 해요.”
“하늘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하는데?”
“남사스럽게 뭘 또 그런 걸 물어봅니까?”
“너는 꼭 나중에 딸을 낳아라.”
마치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다는 표정으로 영석이가 말했다.
“그래서 꼭 너랑 똑같은 놈을 사위로 봐라.”
글쎄.
과연 그때까지 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안 찾아올까?
“속에서 천불이 올라올 거다. 올라오는 천불이 그냥 천불일 거 같아? 누르고, 누르고 몇백 번, 몇천 번을 꾹꾹 눌러도 기어 올라오는 천불이야. 진짜 다 큰 놈을 혼을 낼 수도 없고, 이놈 이걸 진짜 어떻게 하지?”
“저 오늘 혼나러 나온 겁니까?”
“상황이 상황인데, 팔자 좋게 이만한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 불러내서 혼을 어떻게 내? 그러니 내가 너만 보면 천불이 난다는 거야. 일이나 못하면 그걸 트집 잡아 싫은 소리라도 하지.”
“혼내겠다고 부르신 것도 아니면,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이러니 내가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 거야. 내가 너 불러서 같이 술 한잔하자는데, 꼭 이유가 필요하냐?”
꼭 예전에 내가 항상 이유, 명분을 찾고 있는 하늘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기분이네.
“네가 먼저 같이 식사하자, 술 한잔하자 연락을 줘도 뭐할 판에 먼저 자리를 만드는 사람한테 왜 보자고 했냐고? 하! 참, 진짜 아버지만 아니면….”
그렇네.
내가 그동안 영석이 입장은 생각을 못 해 주고 있었네.
영석이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니까, 딱히 예뻐해 줄 만한 짓을 지금껏 내가 해 준 게 없긴 하다.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요. 그 운전기사라는 사람이 하늘이한테 무슨 이유로 연락을 한 거랍니까?”
“그걸로 내가 오늘 그 사람을 직접 만났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뭔가는 분명히 장선길이에겐 불리한 내용, 미래금융 쪽으로는 유리한 내용일 것이고.
입장을 침착하게 유지해 나가며 영석이가 다른 말을 이어서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세상에 공개가 되면 문제가 될 만한 걸 꽤 많이 모아 놓고 있었더라.”
“운전기사가요?”
“그래.”
“왜요?”
정말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선길이가 자기 운전기사에게 매질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꽤 상습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미래금융 게이트를 장선길이가 터뜨렸다는 증거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검찰 출두하셨을 때 형식상 담당을 했던 검사 이름에, 이번 게이트를 터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정치인들 이름까지 다 녹음이 되어 있었어.”
“녹음… 녹음을 했다고요? 혹시 지금 가지고 계세요?”
“아니, 듣기만 들었어.”
“그런 게 있으면 좀 받아 놓으시지 그러셨어요?”
그 순간 날 보는 영석이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태산이 아들이다 이건가?
하긴, 그런 걸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는 건 태산이가 질색을 하는 거지.
이해가 된다.
그건 그렇고, 세상 참 클래식하지.
요즘 세상에도 이런 녹음 같은 고전이 통한다고?
“그래서요? 그걸로 같이 부경통신 쪽으로 맞불을 놓아 보시게요?”
“맞불은 진작에 놓고 있었지. 너도 그러고 있는 중 아니냐. 이게 우리 쪽으로 유리한 기름 역할, 바람 역할을 해 줄 건 분명한데… 그 전에 네 생각은 어떨지 내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잠깐 보자고 했다.”
웃기네.
나 지금 영석이 놈한테 테스트를 받고 있는 중인가?
야, 이놈아. 영석아.
내가 널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그런 테스트나 받아야 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란다.
“웃어? 너 지금 웃었어?”
“아뇨, 아뇨, 웃기는요.”
“아냐, 너 방금 웃었어.”
“진짜 안 웃었어요.”
“이젠 거짓말도 해?”
이놈이 갓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해, 본격적으로 기어 다닐 때, 학교에 들어가고 공부보다는 여자들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을 모두 다 기억하는 나로서는, 날 상대로 어른인 척 엄한 표정을 짓는 모습까지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른 게 웃긴 게 아니라….”
차마 최선을 다하고 있을 영석이에게 고작 수준 낮은 장선길이 하나 잡는 데 뭘 그렇게 세상 시끄럽게 사업은 혼자 다 하는 사람처럼 힘들게 하느냐는 말을 못 하겠다.
“너 지금 대답 잘해야 한다.”
나도 그런 거 같아서 말을 돌리고 있는 중이다, 이 사람아.
힘들게 웃음을 참아 놓고 정색을 하며 영석이에게 말했다.
“최전방 공격수한테 하프 라인 아래 수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냐고 물으시니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요.”
“뭐? 최전방 뭐?”
“골이 터지지 않는 경기는 잘해 봤자 무승부예요. 지금 비기자고 이 피곤한 수고를 감수하고 있는 거 아니잖아요. 저 몸 하납니다. 두 개 아니에요. 저는 지금 부경마트 잡는 것 말고는 다른 건 아예 관심이 없어요.”
이건 사실이다.
지금의 부경 그룹은 다리 세 개짜리 의자.
세 개의 다리 중 하나만 무너져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나마 가장 약하고 가장 내가 공격을 하기에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게 장선열이의 부경마트.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디에 있나.
하물며 나 손중길이가 찍고 있는 중인데.
부경마트만 쓰러뜨리면 차례대로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닌데, 내가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쓸 이유는 없지.
“누가 그걸 하지 말라고 하냐? 그냥 물어보는 거 아냐, 네 생각은 어떤지.”
그 질문에 난 이렇게 대답을 했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는 내용일 거 아니에요?”
“알고 계시지.”
“그럼 할아버지 생각이 맞을 겁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영석이가 물었다.
“회장님 생각이 맞을 거다? 회장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
“혼자 깨끗하신 분 아닙니까. 쉬운 길, 빠른 길, 안전한 길보다는 맞는 길을 고집하시는 분이잖아요.”
“…….”
“길이 아닌 곳으로는 아예 눈길조차 돌리지 않으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게 성장을 한 게 미래금융이니까 지금과 같은 비겁한 공격 앞에서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거고요.”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자네보다 자네 아버지와 함께한 세월은 짧을지 몰라도 함께한 시간은 훨씬 더 길다네, 이 친구야.
“제가 지금 다른 거 일절 신경 안 쓰고 부경마트 상대로 공격에만 집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미래금융이 할 모든 선택을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공격이 불발로 돌아가도, 다시 공격할 기회를 잡을 때까지 든든하게 버텨 줄 거라는 믿음. 저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부경마트 상대로 공격에만 집중을 하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이게 전부인 거 같은데요?”
“만약에.”
거참 만약에, 만약에… 무슨 만약을 그렇게 좋아하나? 일어나지도 않을 일.
“우리 미래금융이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고꾸라지면?”
“죄송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번 미래금융 게이트에서 가장 피해가 덜 한곳이 바로 저희 재경식품입니다. 스너프, JK 드 누락… 미래금융 못지않게 타격이 컸죠. 물론 미래금융이 견디고 있는 피해가 가장 크겠지만.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같은 편이 하는 사업이라고 제가 거기까지 신경을 다 써 버린다면, 정작 제가 책임을 져야 할 재경식품에 그만큼 집중을 못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제 밥그릇 간수부터 똑바로 할게요. 자기 밥그릇 간수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무슨 수로 더 큰 밥그릇을 책임질 수 있겠어요?”
“어쩔 수 없다? 야… 너 진짜 내가 이런 표현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인간적으로 좀 재수 없다?”
그래, 이렇게 실없는 소리 잘하는 게 바로 영석이지.
어이가 없다며, 입을 허벌쩍 벌리고 있는 영석이에게 내가 말했다.
“섭섭해도 어쩔 수 있겠습니까? 부경통신 기준에선 저희 재경항공이나, 재경식품이 아니라 미래금융, 스너프, 그리고 JK 드 누락이 그나마 공격을 넣었을 때 잘 먹힐 상대일 거 같았으니, 그쪽으로 공격을 넣은 걸 텐데요. 그나마 해볼 만하다 싶은 상대가 미래금융이었을 것이고, 잘못 건드렸다간 본전도 못 찾겠다 싶었던 상대가 재경항공이었겠죠. 그랬으니… 갖다 붙인 게이트 이름도 미래금융 게이트 아니겠어요?”
억울해도 어쩌겠나.
그게 사실인 것을….
물론 태산이가 아직은 버티고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 하고 있지만, 혹시 몰라 내가 가진 염려를 말해 주었다.
“수비를 잘하셔야 할 겁니다. 반칙에 능한 상대 아닙니까. 그 반칙으로 상대의 기를 꺾어 경기에 이기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사람이죠. 만약 제가 공격이 아닌 수비 포지션에 있었다면, 백 태클을 걸어서라도 상대방 공격수들 다리를 모조리 부러뜨렸을 겁니다. 두 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는 그런 지저분한 실력으로 경기장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이죠.”
내 말에 영석이는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치 날 자신의 사윗감으로 인정을 해도 될지 염려 섞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 페어플레이가 당연한 선수들을 상대로 선수 보호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선수 위해 네가 퇴장을 당하겠다?”
“퇴장 한 번 당한다고 선수 생활이 끝이 나는 건 아니죠.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선수는 선수 생명이 끝나는 겁니다. 저는 한두 경기 쉬고 다시 뛰면 됩니다. 그런데 퇴장을 당할까요, 제가? 그런 일은 없을 거 같은데요?”
“남의 다리를 부러뜨린 선수를 퇴장 안 시킬 심판이 어디에 있어?”
“운동 경기에서 심판은 심판 보는 게 직업인 주심이 보는 거지만, 사업에서 심판은 자기 돈을 기업에 가져다주는 소비자들이 보는 거죠. 사업이라는 경기에선 소비자들의 심판이 정확한 겁니다. 우린 지금 그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야 하고요. 대부분의 소비자가 뭘 원하는데요? 싸고 품질 좋은 제품?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소비자들은 정직한 제품을 원합니다. 안심을 하고 구입에 돈을 써도 될 만한 제품, 즉 자신의 구매가 호구 짓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제품이요.”
“정직한 제품?”
“반칙하지 않는 제품, 그래서 소비자인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제품, 소비자들을 개돼지로 보지 않는 기업이 만들어 내는 제품, 그래서 결국은 겸손한 제품, 그리고… 나쁜 놈과 싸워서 실력으로 이겨 내는 기업이 만들어 내는 제품.”
“…….”
“그런 제품에는 편이 생기고 응원이라는 게 붙을 겁니다. 그리고 기업은 어렵게 만들어 낸 그 편과 응원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책임이라는 게 생기는 거고, 그 책임은 결국 기업을 일류로 가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거겠죠.”
영석이에게 은근히 물어봤다.
“다리 정도는 제가 놔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다리?”
“직접 미래금융이 할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뭐?”
“그 운전기사가 가지고 있다는 녹음 내용이요. 미래금융이 직접 터뜨릴 거 아니잖아요.”
영석아.
작금의 대한민국은 아마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나와 네 아버지가 재경을 일으킬 때와 비교를 하면 깨끗하고 투명해진 사회란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긴 했지만, 그때와 비교를 하면 기업 하기에 아주 좋은 시절이야.
최소한 그때만큼 정부, 군부의 눈치는 안 봐도 되는 시절이니.
그런 시절에 재경을 키워 낸 내 눈에 장선길이가 하고 있는 공격이 공격처럼 보이겠느냐?
한심하고, 자기 죽을 자리를 찾아서 누워 주겠다는 부분에서는 고맙기까지 하단다.
그리고 네 아버지라고 내가 재경을 이끌던 당시 어찌 항상 정도만 걸을 수 있었겠느냐?
내 옆에서?
어림도 없는 소리.
나는 네 아버지와는 달리 재경을 위해서라면 정도가 아닌 길도 서슴지 않고 걸었던 사람이란다.
네 아버지의 생각이 무엇일지, 그래서 네가 지금 뭘 최대한 조심하려고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설마하니 태산이 할아버지가 부경통신 장선길 회장과 똑같은 사람 취급을 받고 싶어 하시겠느냐고요. 살아온 흔적의 품격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자니, 결국은 이것도 사업이니 더 이상의 피해는 줄이고 싶으실 것이고. 제가 태영 그룹 쪽으로 검찰 라인을 좀 대 달라고 해 볼게요. 그 운전기사라는 사람, 그쪽으로 바로 연결을 시켜 줘 버리시죠.”
“너 혹시 나 만나기 전에 우리 아버지하고 통화했냐?”
“아뇨.”
“진짜 안 했어?”
“네, 안 했는데요?”
“아닌데? 이미 통화하면서 다 들은 거 같은데?”
“진짜 아니라니까요.”
“진짜 아니면, 진짜 무서운 놈인데, 이거….”
“어차피 부경은… 끝났어요. 운전기사가 가지고 있다는 뭐 녹음 파일? 그런 거 없었어도. 그거 덕에 쬐금 더 빨리, 확실하게 무너뜨릴 순 있겠네.”
한순간 눈빛을 진중하게 바꾸며 영석이가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반칙을 서슴지 않고 한다는 건 그만큼 사업으로 정면 승부를 하는 거엔 자신이 없다는 소리죠.”
“부경 스타일이 원래 그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 사돈 양반이 부경을 이끌 땐 이 정도로 형편이 없는 기업이 아니었다.
사돈 양반은 욕심 못지않게 실력도 있는 기업인이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내가 그쪽을 홍준이 처가로 생각 자체를 안 했었겠지.
“자신이 없다는 건 용기를 잃었다는 뜻이고. 용기를 잃었다는 건 다 잃었다는 소립니다. 우린 지금 부경 그룹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지난 세월 부경이 만들어 낸 역사와 부경이라는 이름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진짜 알맹이 부경은 사실상 세대교체가 되면서 진작에 끝이 났던 거 같은데… 저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렇게 따지면 재경은? 재경은 아직 알맹이까지 재경이란 말이야?”
“그러니까요. 저도 그게 참 신기하고… 신통합니다.”
고맙기도 하고….
“재경은 아직 쓸 만한 알맹이가 좀 남아 있네요.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 알맹이가 너다?”
“아뇨, 제가 알맹이라는 말이 아니라… 잠깐만. 왜요?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우리 하늘이 걱정되네, 진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