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하기 싫어지고 있는데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장영석 부회장은 혼자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운전기사가 백 미러를 통해 뒷자리를 힐긋거렸지만, 취기가 오른 장영석 부회장은 피식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하늘이가 텁텁한 구석이 많을 거다.”
딸 가진 부모 마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의 짝으로 재경 그룹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른들 사이에 약속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은 기억도 있었지만, 20년 넘게 재경 그룹 쪽으로는 담을 쌓고 지내지 않았던가.
오히려 장영석 부회장은 하늘이의 짝으로 비록 집안은 많이 기울더라도 처가 쪽 사업에 적당한 거리를 두며, 자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을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단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부족한 게 없는 딸이다.
차라리 조금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딸이 평생을 안에선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으로, 밖에선 인정받는 기업인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장영석 부회장에게 있어 하늘이와 태양이는 애초에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자식들을 놓고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속상한 일이긴 해도, 첫째 하늘이와 둘째 태양이는 타고난 기질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늘이는 기질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어딜 내다 놓아도 뛰어난 아이였다.
미래금융의 후계자 자리에는 하늘이를 앉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학교수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예술 계통의 친구도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하늘이의 짝으로 좋을 거 같았고.
하지만 재계 계열의 집안 자식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재계 계열의 집안 자식을 만나더라도, 미래금융보다는 한참 아래에 있는, 그래서 미래금융의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집안의 상대라면 금상첨화일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주처럼 키웠으니까, 결혼을 할 때엔 여왕 대접을 받게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의 욕심.
그런 욕심을 장영석 부회장은 가지고 있었다.
그게 그동안 정훈이를 알게 모르게 어색하게 대하고 불편해서 탐탁지 않게 여겨 왔던 이유이기도 했고.
하지만 오늘 장영석 부회장은 사랑하는 딸의 혼사와 미래금융의 앞날을 동시에 신경 써야 했던 자신의 스트레스로부터 한발 멀어지는 기분을 받았다.
미래금융의 후계자로 성장을 해 오다 보니, 하늘이가 다소 텁텁한 구석이 많을 거라는 양해.
그 양해 앞에 정훈이의 대답은 무척 세련되고, 어른스러웠다.
“저는 오히려 하늘이가 너무 부드럽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하늘이가 부드러워? 우리 지금 같은 하늘이 이야기 중인 거 맞지?”
“속이 너무 부드러워요. 하늘이를 보고 있으면 꼭 달팽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엔 하늘이가 정훈이 자신과 비교해 느리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와 달팽이의 공통점에 대해 듣는 순간, 어째서 아버지가 정훈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고, 그 기대를 하늘이의 결혼으로 이어 보려고 하시는지 알 것도 같았다.
“껍질만 딱딱하지, 실제 그 껍질 안에 든 건 너무 말랑하고 부드럽잖아요. 몸속에 단단한 뼈가 없기 때문에 단단한 껍질로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 눈에 무척 딱딱하고, 강해 보일 수도 있겠죠.”
그다음 이어졌던 말에 장영석 부회장은 정훈이가 가진 통찰력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겉이 무척 부드러워지고 있어요. 반대로 속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말이겠죠. 그래서 아주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중이에요.”
“어떤 기대?”
“지금 이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지요. 그래서 요즘 제가 하늘이를 보면 살짝 무섭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제 좀 미래금융의 후계자처럼 보여요.”
“하늘이가 무서워?”
“네. 예전에 틱틱거리기만 할 때엔 속이 다 보였거든요.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왜 날을 세우는 건지, 틱틱거리는 건지….”
그러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정훈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저한테 상당히 친절해졌어요. 불안하죠. 볼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던 애가 갑자기 너무 친절해지니까. 분명히 그 친절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젠 더 이상 그 속이 저한테 안 보이네요. 하늘이 같은 애가 속을 숨기기 시작하면 그것보다 무서운 게 없잖아요.”
하늘이에 대한 이해가 대단했다.
장영석 부회장도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하늘이의 모습에 늘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솔직함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단점.
좋은 걸 숨길 줄 모르고, 싫은 걸 감출 때 드러나는 얇은 얼굴.
그런데 그걸 정훈이가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같이 있으면 좀… 재밌습니다. 앞으로 같이해 나갈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해질 거 같거든요. 그런데 당장은 부경 때문에 시간이 없네요. 얼른 시간을 만들어야죠.”
“그래. 폭풍은 스치고 지나가게 만들어야지, 너무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게 만들면 안 된다. 부경마트 상대로 하고 있는 공격,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우리 미래금융은 네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도록 수비에 최선을 다해 볼게.”
다음 날 아침, 장영석 부회장은 전날 자신을 찾아왔던 장선길의 전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영석입니다.”
―네,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목소리에 꽤 단단한 의지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제 제가 제안드렸던 내용, 생각은 좀 해 보셨어요?”
―네.
잠시 흐르는 침묵.
그 침묵을 장영석 부회장은 상대가 먼저 깨뜨리도록 기다려 주고 있었다.
―먼저 확인을 받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와 제 가족들이 장선길 회장 쪽으로부터 보복을 받거나 하는 일은… 안 생기겠죠?
“보복이요?”
―네.
“장선길 회장. 아직은 지켜야 하는 게 너무 많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보복을 해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는 당신을 상대로 무슨 보복을 하겠어요? 장 회장이 돈 안 되는 짓을 왜 해요?”
―하지만….
장영석 부회장은 답답했다.
애써 상대가 하고 있는 걱정을 이해해 보려 해 봤지만, 그럼에도 그 이해가 쉽지가 않았다.
“좋아요. 우리 미래금융이 그 자료를 돈을 주고 살 수는 없지만, 최소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피해를 보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정 걱정이 된다면 신경을 쓸게요.”
―그렇게 얼버무리는 식의 약속은 장선길 회장 밑에서 지겹도록 들어 왔습니다. 구체적인 약속을 해 주세요.
“약속? 무슨 약속이요? 나한테 뭐 맡겨 놨어요?”
―네?
“신경을 쓰겠다니까? 나 한 입으로 두말하고, 지키지도 못할 말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리고 그쪽이 이걸 알아야 돼요.”
―뭘요?
“2년 반 동안 장선길 회장의 차를 몰았던 사람이, 그 차 안에서 오고 갔던 장선길 회장의 목소리를 몰래 녹음을 했어요. 그쵸?”
―…….
“지금 이 통화 내용이라고 녹음이 되고 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솔직히 나한테는 없다고.”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누가 할 소릴 도대체 누가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우리 미래금융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말을 안 할려고 했는데, 뭔가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정확하게 짚어 줘야 하는 부분.
“어제 내가 직접 자리를 하고, 또 오늘도 이렇게 아침부터 전화를 넣으니까 날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요? 제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장선길 회장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우리 회사 안에선 우리 직원들도 날 어려워해요. 그리고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지금이 한가한 상황도 아니고. 안 그렇겠어요?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그쪽 상대로 애를 많이 쓰고 있다는 뜻이라고.”
―…….
“먼저 주지 못하는 확신을 일방적으로 받으려고만 하면 됩니까? 나한테 뭘 맡겨 놨느냐고요. 아니잖아요. 뭘 달라고 해서 받아 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장선길 회장 아니에요? 왜 자꾸 상대를 헷갈려하는 거죠? 아무리 봐도 헷갈릴 건덕지가 없는데.“
―…….
“아무런 용기도 내지 않고, 일방적인 도움만 바라실 거 같으면 나 이 통화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지금 그쪽이 들고 있는 그 자료가 우리 쪽으로 그렇게까지 결정적이라거나 절대적인 건 아니거든요.”
―어제 못 들어 보신 파일 중에….
“아니, 그 내용이 뭐든. 그쪽한테는 그 내용이 엄청난 내용일지 몰라도, 누가 어떻게 쓰냐, 누가 어떻게 덮냐에 따라 별거 아닌 내용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아직 모르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잘 한번 생각을 해 봐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 녹음 파일들이 그만큼이나 결정적인 자료인 거 같으면, 그런 결정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직 아무런 용기를 못 내고 있는 거예요? 그럴 거면 그동안 그런 준비는 왜 했던 거예요? 내가 만약 그쪽이라면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겠어요. 내가 어제 말했지요? 자식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고. 항상 참고, 숨고, 피하고, 당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만 하고. 그렇게 키우실 거예요? 똑같이? 선 넘는 말, 주제넘은 소리라는 거 아는데,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답답해서. 벽에 대고 이야기해도 이것보단 말이 잘 통하겠어요. 그냥 나는 여기까지만 해야겠어요. 살짝 지치네요.”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전화 끊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도대체 그동안 장선길 회장 밑에서 얼마나 상식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일을 했으면 이런 뻔한 상황 앞에서도 자신을 믿지 못할까란 씁쓸함에 장영석 부회장은 입맛이 써졌다.
“듣고 있어요. 말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제 내가 다 말을 해 줬는데, 또 그렇게 물어보네. 그쪽 전화번호를 내가 줄이 닿는 검찰 쪽으로 넘겨줄 생각이에요. 어디까지나 그쪽이 한번 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는 전제하에. 그럼 수 분 내로 전화가 가겠죠.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해야 하는 거예요.”
―…….
“검찰 쪽과는 형사적인 내용만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고, 폭행에 관한 내용은 따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우리 미래금융이 뒤에서 조용히,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지원을 해 줄게요.”
―어떻…게요?
“최고의 변호사팀을 꾸려 보라고 일러둘게요. 장선길 회장이 아닌 더 대단한 사람이라도 보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하게 꾸려 보라고 말이에요. 그 변호사팀 통해서 나한테 요구했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합의금으로 받아 내요. 그리고 떨지 마세요.”
―…….
“잘못을 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잘못을 당한 사람이 떱니까?”
―그건 부회장님이 저 같은 사람들의 입장이 안 되어 보셔서 하시는 말씀이고요.
“그런 입장이 되지 않으려고 우린 항상 용기라는 걸 만들어 낸다는 거 알아요? 그쪽은 회사가 시키는 업무를 하는 게 일인 사람이지만, 우린 용기를 내는 게 일인 사람들이거든. 입장이라는 건 남이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상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혹시 내가 계속 당신을 설득해야 하는 겁니까?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점점 하기 싫어지고 있는데.”
―아닙니다. 전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피곤하게 만들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를 할 내용은 아니고, 그쪽이 배짱을 부리고 비싸게 굴어도 되는 상대는 내가 아니라 따로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말이 안 통하는 거 같아 답답하단 소리였고. 경험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를 하겠는데, 이런 일은 나도 처음이에요. 나도 경험이 없다고. 그렇다면 나나 그쪽이나 이럴 때일수록 피아 식별을 정확하게 해야지. 안 그래요?”
―네, 제가 좋지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저보다 더 피해가 막심한 쪽으로 염치없이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부끄럽네요.
“당신을 염치없게 만들고 또 부끄럽게 만든 사람한테 엿 바꿔 먹지도 못할 사과 말고, 돈으로 받으세요. 해 주기 싫은 용서가 아닌 제대로 된 합의를 할 수 있도록, 최고로 실력 좋은 로펌 쪽에, 그쪽 분야로는 최고로 실력 좋은 팀을 붙여 드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검찰 쪽으로 확보하고 있는 녹음 파일들을 건네주고, 사건을 키우는 게 먼저예요. 그 전까지 우리 미래금융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해요.”
―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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