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화 (213/303)

취향이 그쪽이세요?

“미래금융 본가로 갈 겁니다, 차 좀 준비해 주세요.”

―네, 상무님.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선 태산이에게 오랜만에 집밥을 얻어먹을 수 있겠냐고 약속 확인을 받아 놓고 강인성 차장에게 차를 준비시키도록 전화를 넣었다.

거울 앞으로 섰다.

여전히 내 것이 아니기에 적응이 필요한 얼굴.

참 곱게도 생겼다.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 얼굴에서 나 손중길이의 얼굴이 올라올 때까지.

여기에서 부경 놈들에 대한 증오심을 조금만 더 부추겨 줄 수 있는 음악이라도 미리 깔려 있었다면 완벽했을 정도로 먹잇감에 대한 나의 흥분과 설렘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흥분을 난 참 좋아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살아 있음.

당연한 그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 버린 지금의 난 그 살아 있음에 얼마나 감사하고, 그 감사함이 너무나 큰 나머지… 이 몸의 주인인 손주 놈에게… 미안함을 느낄 자신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겠나, 이게 나란 사람인 것을.

재킷 깃을 바로잡고, 넥타이까지 다시 손을 봤다.

그리고 몇 올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서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것으로 태산이와 협상을 하러 갈 준비는 모두 끝.

이제는 상하 위치가 완전히 반대가 되어 버린 태산이를 상대로 과연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살짝 궁금해지고 있었다.

자리가 깡패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동안 그 깡패의 도움으로 태산이를 일방적으로 끌고만 다녔는데, 과연 손중길이가 아닌 손정훈으로도 이 정도 큰 사업권을 앞에 놓고 내가 원하는 협상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긴장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며, 그래서 결국은 다시 또 설레고 있었다.

“술을 한 병 준비해서 가야 할 거 같아요.”

“가는 길에 백화점 잠시 들르겠습니다.”

‘백선화주’라는 43도짜리 독한 민속주 한 병을 선택했다.

오늘 같은 날은 아무래도 독주가 어울릴 거 같았다.

그렇다고 집밥 반찬에 위스키나 중국 백주는 궁합이 안 맞을 거 같았고.

평소보다 퇴근이 이른 편이었는데, 중간에 백화점을 잠시 들렀던 탓에 태산이 집에 도착을 했을 땐 벌써 7시가 넘어 있었다.

영석이와 하늘이도 퇴근을 하고 집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영석이와는 달리, 하늘이는 아마 저대로 출근을 했었지 않을까 싶은 복장 그대로였다.

“그건 뭐냐?”

오랜만에 뭘 사 가지고 왔더니, 그걸 또 날 보자마자 물어보는 태산이었다.

“그동안 술 생각 저만 났던 거예요?”

내 말에 영석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렸고, 하늘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뒷짐을 지고서 태산이가 말했다.

“이제 조금 상황이 유리해졌다고, 벌써부터 축배를 들자?”

“축배를 어떻게 우리끼리만 들겠습니까? 진짜 축배를 들어야 할 때엔 저희 집 사람들도 다같이 불러서 함께 들어야죠.”

“평소에도 그렇게 취해 있는 거냐?”

“그럴 리가요. 혼자서는 안 취합니다. 같이 취하고 싶어서 집밥 핑계로 밥 한 끼 얻어먹으러 온 거고요.”

“들어가자.”

다 같이 저녁 식사상이 준비되어 있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의 가사 도우미가 국과 반찬, 그리고 찌개와 금방 끝낸 양념 소갈비찜을 미리 깔아 놓은 밑반찬들 사이로 옮기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오늘은 영석이의 처가 함께 식사 준비를 돕지 않고 같이 자리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식탁이 완벽하게 갖춰진 다음, 태산이가 숟가락을 들기 바로 직전에 자리에 앉는 사람인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만사가 귀찮다는 듯 미리 앉아서 말로만 도우미들을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의외로 자기도 오늘은 와인을 한잔 해야겠다며, 하늘이에게 같이할 거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 며느리의 모습에 태산이도 조금은 당황을 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어쩐 일이냐? 내가 권해도 술이라면 입에 잘 안 대던 사람이.”

“지난 2주 사이에 제가 한 10년은 늙은 거 같아요, 아버님.”

하늘이가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자기 엄마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꼭 자기 전에 커피를 마신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어후, 상상도 하기 싫어. 이제 진짜 다 끝난 거 맞죠?”

아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내가 봤을 땐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싶은데….

“호들갑은.”

말과는 달리, 태산이도 자기 며느리가 지난 2주간 아등바등했을 두려움과 긴장감을 인정해 주고 있는 눈치였다.

가사 도우미가 잔을 준비하는 걸 확인하고, 아직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었던 백선화주를 돌려서 땄다.

일단 혀가 인정할 맛은 모르겠지만, 향은 합격이다.

은은한 향이 술병을 따기가 무섭게 식탁 위를 덮어 가기 시작했다.

난 그 술을 태산이에게 먼저 따라 주고, 그다음 영석이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러는 동안 하늘이는 자기 엄마가 한잔 마셔야겠다는 와인을 선택해서 잔을 받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검찰 조사실.

넥타이가 사라진 정장 차림의 장선길 회장이 저녁 식사 중이었다.

고급 일식 도시락이 그의 앞으로 놓여져 있었다.

플라스틱 장국 그릇에선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고, 사각의 검은 도시락 안으로는 정갈한 초밥이 종류별로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까다로운 장선길 회장은 젓가락으로 초밥 종류를 갈라내며, 마땅히 입으로 넣을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조사실 안으로 턱수염이 까끌하게 자라 있는 남자 검사 한 명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의 검사.

장선길 회장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상대했던 검사가 아닌 새로운 검사의 출현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관심을 꺼 버리며 초밥 하나를 집어 생선 살에 간장을 묻혔다.

“거기 가만히 있을 거면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나가서 물이나 한 통 가져다주세요.”

초밥을 입에 넣은 장선길 회장은 지금 상황이 몹시나 못마땅하다는 듯, 두 팔을 넓게 펼쳐 조사 테이블 위로 올려놓은 후, 콧김을 내뿜으며 자근자근 초밥을 씹었다.

하지만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부경통신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었던 담당 검사 최민성은 억지로 여유를 쥐어 짜내는 장선길 회장의 앞으로 보란 듯이 의자를 빼내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상대가 다리를 꼬아 앉는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눈에 들어온 뒤에서 장선길 회장은 잠시 하던 걸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앞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낯선 검사의 가슴팍에 달려 있는 검사증을 확인했다.

반부패수사부 최민성 검사.

“아.”

입에 담긴 음식을물 천천히 삼켜 놓은 뒤 장국으로 입을 헹궈 내고 적대감을 호감으로 바꾸기 시작한 장선길 회장.

“검사장님이 보내신 분이네. 미안해요. 내가 몰라봤네.”

“지금부터는 검사장님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사과는 제가 하겠습니다. 미리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가 많이 귀찮게 해 드릴 거 같아서요.”

“……?”

“시간을 때우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네요. 조금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실 분이, 식사 정도는 집에 가서 하시지 왜 다른 사람 일하는 시간을 반찬처럼 집어 드시고 계실까?”

“뭐라고요?”

“미리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반부패수사부 최민성 검사입니다.”

장선길 회장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상습 폭행에 관한 내용으로 와 계시는 거지만, 내일부터는 미래금융 게이트 조작에 관한 내용으로 오셔야 될 겁니다.”

“그거 다 위에서 정리를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 위까지 정리를 해 볼 생각입니다.”

“…뭐?”

“그리고 내일부터는 저랑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실 겁니다. 당분간 좋은 음식 못 드실 건데, 귀하신 분이 도시락으로 되겠습니까? 식어 빠진 음식, 그거 그만 드시고 그만 돌아가 보시죠. 딱 보니까, 시간 끝날 때까지 먹지도 않을 도시락 잡고 시간이나 끌다가 돌아가실 생각이신 거 같은데, 제가 양철우 검사한테는 다 이야기해 놨으니까, 지금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손을 짚고 있던 자리에 아무렇게나 나무젓가락을 올려놓고 장선길 회장이 물었다.

“내일 또 와야 한다고?”

“귀찮으시겠지만, 내일 한 번만 더 수고를 해 주십시오. 그럼 내일부터는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은 크게 줄어들 겁니다. 내일부터는 당분간 다시 댁으로 돌아가시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너 지금 나 상대로 뭐 하자는 거냐?”

최민성 검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하루 동안 여기 이렇게 잡혀 있어서 보게 될 부경통신, 부경건설의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아?”

“다행입니다.”

“다행? 뭐가?”

“제가 개인적으로 회장님 같은 분을 아주 좋아합니다. 의심을 할 필요가 없거든요. 이 안에서 저랑 같이 마주 보고 앉는 사람 열에 아홉은 시작이 매우 젠틀하죠. 그런 사람들은 젠틀함을 빼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게 아주 귀찮고 피곤한 작업이거든요. 그런데 회장님처럼 시작부터 솔직하게 다가오시는 분은 만에 하나라는 걸 아예 배제시키고 접근을 할 수 있으니, 제 입장에선 다행일 수밖에요.”

낮은 탄식을 흘리며 장선길 회장이 킥킥거렸다.

“히야…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고작 평검사 나부랭이가 내 앞에서 이죽거리기도 다 하고. 어이, 최민성이.”

“꾸밈이 없으시네요. 이런 자세, 아주 바람직하죠. 반갑기까지 하네요. 내일부터도 쭉 지금처럼 솔직한 모습 보여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너 죽고 싶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저도 탐색전이나 할까 해서 잠시 찾아온 거라, 오늘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은 수사에 반영할 마음이 없습니다. 내일부터는 제 입장, 태도도 회장님이 하시는 거에 따라 크게 달라질 예정이니까 내일도 여전히 지금처럼 하실 거라면, 미리 마음껏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미쳤구나, 진짜? 네가 지금 감히 날 상대로 협박을 해?”

“협박이라니요. 인사드리러 온 거라니까요? 초면에 바로 제 작은삼촌뻘은 되시는 분 상대로 말 놓고, 이 새끼, 저 새끼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미리 양해 구합니다. 직업이 이래서 험한 모습이 자주 나올 겁니다. 참고 정도는 하시라고요.”

크게 웃음을 터뜨려 놓고, 상대를 깔보는 듯한 눈으로 장선길 회장이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자신이 부리고 있는 호기와 여유가 이상하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장선길 회장이었다.

“내가 이래서 너희 같은 개돼지 새끼들을 혐오하는 거야. 주제 파악을 못 해. 왜? 돌아가는 상황이 한 번쯤 해볼 만한 거 같아? 너 어쩌려고 이러냐? 나하고 이렇게 마주 보고 앉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을 거야?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고작 이런 자리에서 겨우 나랑 같이 마주 보고 앉아 놓고, 왜? 옷 벗고 싶어? 옷 벗겨 줘?”

“순간 전지현인 줄. 그쪽이 전지현, 김희선쯤 된다면 모를까, 설마하니 제가 고작 그쪽이랑 마주 보고 앉겠다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줄 알아요. 그리고 듣던 거랑은 다르게 취향이 그쪽이세요? 여성 편력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남자 옷도 벗깁니까?”

“뭐, 이 새끼야?”

“안 그렇게 생기셔가지고 취향이 독특하시네. 그럴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람이 강한 자극에 항상 노출이 되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더 강한 자극을 찾겠다고 자기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그런다고 하더군요. 근데 어쩝니까? 저는 그런 쪽이 아니라서. 취향은 존중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X발, 신혼 끝난 후로는 와이프 앞에서도 안 벗는 옷을 왜 자기가 벗겨 주겠대? 징그럽게.”

잠시 내렸던 나무젓가락을 다시 쥔 장길선 회장은 그 젓가락을 손안에 놓고 부러뜨릴듯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인사는 이만하면 된 거 같지요? 식사 천천히 하시고, 국물은 따로 버리세요. 같이 쓰레기통에 버려서 나중에 치우는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던 최민성 검사는 깜빡하고 전달을 못 한 내용이 있다는 듯 걸음을 멈춰 세워 다시 몸을 돌렸다.

“아, 참. 따로 연락이 가긴 할 건데, 내일은 여기가 아니라 반부패수사부로 오셔야 합니다. 두 층 위에 있어요. 6층.”

최 검사의 이죽거림에 피가 거꾸로 솟고 있는 장선길 회장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좀 편하게 입고 오세요. 오늘처럼 이렇게 입고 오시면 힘드실 거예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이렇게 입고 오시더라도 편한 옷 정도는 따로 챙겨 오세요. 제가 그 정도 편의는 봐드려야죠. 그래도 명색이 부경통신 회장님이신데. 안 그렇습니까?”

“너 다치겠다.”

“제 걱정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회장님은 지금부터 회장님 걱정만 하세요. 걱정을 한다고 달라질 게 크게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리고 흘리듯 남긴 한마디.

“세상 좋아진 건 사실이지. 옛날 같아서 봐라, 어디 감히 장사하는 상놈이 나랏일하는 영감 앞에서 밥을 처먹어. 그것도 앉아서. 처맞아 죽으려고.”

“뭐?”

“이 나라 이 땅에서 내 직업의 역사는 천 년, 재벌의 역사는 길어 봤자 50년. 비교할 걸 해야지, 이씨… 쯧. 감도 없고, 눈치도 없고… 저걸 어디다 써? 감히 어디서 검사를 협박해? 당신이 당신 회사 안에서나 회장이지, 여기에서까지 회장일 순 없는 거 아냐? 대장질은 당신 회사 안에서만 하라고. 당신이 말한 개돼지들 데리고. 꿀꿀, 멍멍. 당신 한마디에 짖고, 물고 뜯고 해 줄 개돼지는 여기에 없어. 근데 잠깐만.”

최민성 검사는 갑자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돼지들 위에 군림해서 그 덕에 할 줄 아는 건 뻘짓에 계집질밖에 없으면서 호의호식이란 호의호식은 혼자 다 하고 있는 놈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 줘야 되는 거야? 개X발 돼지 새끼라고 불러 줘야 하는 건가?”

“…….”

“서로 자기소개는 이만하면 됐지요? 내일부터는 이런 느낌으로 가는 겁니다. 마음 준비 단단히 해서 오세요. 아, X발, X나 친절해. 이러면 안 되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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