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벗어나는 놈이다
“앞으로 준비해 나가야 될 소송을 전적으로 재경 쪽으로 맡겨 달라?”
식사를 도와주고 있던 가사 도우미들을 모두 거실로 내보낸 뒤 시작된 이야기였다.
“아뇨. 재경이 아니라 저한테 맡겨 달라는 겁니다. 저희 회장님께도 똑같이 부탁을 드릴 거고요.”
숨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부경과의 싸움 자체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싸움을 계속해 주셔야죠. 제가 말씀드린 건 부경과의 싸움 자체가 아니라, 부경통신을 상대로 준비해 나가야 될 소송 건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난 태산이와 영석이에게 지금부터 부경통신을 상대로 진행을 해야 될 손해 배상 청구 소송 건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내게 달라고 말했다.
날 바라보는 하늘이의 눈빛이 깊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그 눈빛을 피해 놓고 오로지 태산이와 영석이를 상대로만 말했다.
“끝까지 가 보자고 하는 부경을 상대로 법적 책임만을 묻는다는 건 셈이 맞지 않는 장사죠. 법 만지는 사람들이 사업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할아버지, 아저씨도 이번 미래금융 게이트가 흐지부지, 사람들 관심거리 역할만 살짝 해 주고 묻히는 걸 원하시지는 않을 거잖아요.”
영석이가 재빨리 태산이의 반응을 살폈다.
“계속해 봐.”
태산이의 얼굴 표정이 한층 더 신중해졌다.
“미래금융 게이트에 관련된 법쟁이들, 언론쟁이들… 결국은 다 부경통신 쪽에서 받아 주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부경통신에서 해 왔던 걸 보면 사회적 이슈가 크게 터질 때마다 그걸 무마해 왔던 법쟁이들은 죄다 업계 최고 대우로 부경통신 법무팀이 스카우트를 해 갔고, 언론 쪽으로는 대놓고 광고를 밀어주는 식으로 자신들의 카르텔을 형성해 왔잖아요.”
나는 미래금융 게이트 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고 있는 중이다.
운전기사를 상대로 한 상습적인 폭행?
얼마 못 간다.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뤄 줄 시간은 길어 봤자 일주일.
물론 그 후속타로 미래금융 게이트 조작의 중심에 부경통신 장선길이가 있다는 내용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그게 일반 대중들 기준에서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겠나.
그런 내용들이 서민 물가 폭등, 전기세, 가스비 상승, 서로를 혐오하는 한중일 관계와 같은 괴물처럼 버티고 있는 고질병 앞에서 얼마나 버텨 줄까 하는 부분을 생각해 봐야 된다.
아직은 우리 재경이나 미래금융, 부경의 기업 가치, 인지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끼리나 건곤일척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일반 대중의 기준에선 미래금융을 끼고 있는 재경과 부경의 집안싸움 정도로밖에 안 비칠 가능성이 크다.
중간에 계속해서 효과적인 장작을 넣어 주지 못한다면 말이다.
“배가 기울고 물에 빠지고 있는 와중에도 검찰, 언론 쪽에서 부경통신 쪽으로 충성을 지키는 인간들이 틀림없이 나옵니다. 그 카르텔 자체를 깨뜨리지 못하면, 할아버지, 영석이 아저씨, 영우 아저씨, 그리고 여기 하늘이까지… 티브이 앞에 얼굴 다 까고 나가서 기자 회견까지 한 것도 결국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사업이 아닌 카르텔로 몸집을 키워 온 게 부경통신 아닙니까?”
“그 카르텔을 네가 깰 수 있다?”
“손해 배상 청구 금액으로 1조를 제시할 겁니다.”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늘이는 수차례 눈을 깜빡거렸고, 영석이는 마른기침이 섞인 웃음을 토해 냈으며 태산이는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다.
“법무 법인 해명 통해서 미래금융이 해당 청구 소송으로 승소가 가능한 금액을 이야기 들으셨죠?”
“300억 정도는 가능할 거다… 그런 말을 하긴 하더라.”
영석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준 뒤 태산이에게 말했다.
“미래금융 투자처들 빼고, 재경과 미래금융만 놓고 보면 재경항공, 모직, 스너프, JK 드 누락에서 이번 미래금융 게이트 건으로 발생한 통상 손해액이 미래금융과 비율적으로 6.5 대 3.5 정도가 되더라고요.”
“스너프가 손해를 크게 봤지.”
“네. 결국 소비자 1차 접전이 유통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거죠. 거기에 따른 모직 쪽 손해 규모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고.”
불필요한 내용은 잠시 뒤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부경통신 가져와서 재경과 미래금융이 장선길 회장과 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65 대 35로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늘이와 영석이는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태산이 역시 그런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300억. 만약 제가 못 해내면, 제 사비를 다 털어서라도 미래금융 쪽으로 지불을 하도록 할게요. 대신 제가 제대로 된 판을 깔아 내면 미래금융에서 장선길 회장과 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매입할 수 있을 만한 자금을 먼저 좀 대어 주십시오. 현재 재경은 아시겠지만, 자체 투자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천금 같은 기회를 잡더라도 총알 부족으로 놓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무슨 수로….”
영석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태산이가 내게 물었다.
“자신 있냐?”
“제가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자금 확보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자금이라는 게 어디 실물이더냐? 다 종이 쪼가리, 요즘은 휴대폰 화면에 찍혀 나오는 숫자일 뿐인데. 그런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기회를 잡고도 숫자 융통을 못 시킨다면, 그걸 어떻게 금융이라고 볼 수 있겠어?”
“그럼 저도 자신 있습니다.”
옆에서 영석이가 이건 좀 과한 상황인 것 같다며 나와 태산이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아니, 아버지. 잠시만요. 정훈이 너도 잠시 침착해 봐. 부경통신에 장선길이, 그리고 그 집 아들들이 잡고 있는 지분이 58퍼센트가 넘어요.”
거기까지 말해 놓고 조금 전 나와 태산이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시총 6조 언저리까지 올라가 있는 부경통신을 무슨 수로 일부 지분 매입도 아닌 경영권을 노리면서 지분 매입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에 태산이는 어째서 생각하는 게 나보다도 못하냐는 식으로 나와 영석이를 번갈아 쳐다본 후 말했다.
“정훈이 이놈이 지금 손해 배상 청구 금액으로 1조를 던져 보겠다고 하잖아, 이 사람아.”
그게 무슨 뜻이고, 그게 부경통신 경영권 확보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식으로 영석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태산이는 자기 아들의 부족함보다는 나와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듯 곧바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얼마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데?”
“그건 해 봐야 아는 거니까, 아직 얼마까지 떨어뜨릴 수 있겠단 확신을 드릴 수는 없는 거죠. 하지만 시총 6조짜리 지분 절반만 잡아도 3조. 그 3조의 35퍼센트 지분이라면… 300억 정도는 없는 돈인 셈 치고 태워 볼 만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미래금융이라면.”
“틀림없이 아직 손 회장은 모르는 내용일 거고.”
“이제 말씀을 드려야죠. 미래금융의 생각을 먼저 확인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을 했어요. 저희 회장님은 분명 부경에 대한 감정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번 기회에 한번 몰아쳐 보자고 말씀을 하실 텐데, 그 전에 미래금융의 입장부터 확실하게 받아 내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제 입장에서는 일 두 번 하는 거잖아요. 미래금융이 끝까지 가 보겠다는 입장을 먼저 듣고 저희 회장님을 찾아가는 게 불필요한 과정을 하나 정도는 더 생략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꽤 한참 동안 태산이는 머릿속으로 이번 싸움의 수를 생각하듯,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을 뜨더니, 자기 잔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말끔하게 입으로 털어 넣고서 명쾌하게 말했다.
“그래. 사비로 300억을 채워 주겠다 할 정도로 자신이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봐라. 300억. 비싼 엿 하나 사 먹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내 손주사위 될 놈 그릇 크기 제대로 확인해 보는데, 그 돈 못 태울까. 하늘이 애비야.”
“네, 아버지.”
“지금부터 자네는 미래금융 게이트, 부경통신 관련된 내용은 당분간 신경 쓰지 말고, 그간 만들어진 피해 복구에만 전념을 해라. 이만하면, 우리도 우리 할 일은 대충 다 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겠어?”
* * *
“저 기다리지 말고 다들 주무시고 계세요.”
현관을 나서는 정훈이의 곁으로 하늘이가 따라붙었다.
그저 얇은 손가방과 휴대폰이 전부.
그 두 개를 한 손에 포개어 들고 있는 하늘이는 가방조차 챙기지 않고, 마치 정훈이를 놓칠세라 서둘러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저는 정훈이 오빠하고 이야기 좀 하다가 들어올게요.”
정훈이는 이미 시간이 꽤 늦었기에 자신을 따라 나오겠다는 하늘이를 말리려고 했지만, 어른들 몰래 자신에게 인상을 쓰는 하늘이의 모습에 입에 담긴 말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하늘이가 정훈이를 따라 집을 나선 뒤, 장영석 미래금융 부회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거실 소파였다.
“홍준이 형님하고 따로 통화 한번 안 해 보셔도 괜찮겠습니까?”
“왜?”
“정훈이요. 1조짜리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이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도 아니고,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아직 너무 어려서 현실 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가 홍준이 형님하고 따로 통화를 하시든, 아님 제가 해도 되니까 아까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하고 소송 준비를 제대로 해야 되지 않겠어요?”
장태산 회장은 말없이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현재 상황을 차분하게 따져 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이젠 정말 미래금융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은퇴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
지금부터는 자신의 아들이 충분히 짊어지고 나갈 수 있겠다는 안심.
그런 마음으로 장태산 회장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세요, 아버지. 정훈이도 보니까, 식사하면서 술 몇 잔에 감정이 많이 고조된 상태로 그런 말을 하는 거 같던데 내일 되면 생각이 또 바뀔 겁니다.”
장태산 회장이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아까 정훈이가 술김에 감정이 올라와서 그런 말을 한 거 같냐?”
“누가 봐도 그렇죠.”
“내 눈엔 그런 말을 말을 하겠다고, 술을 사 들고 온 거 같던데?”
“…….”
“그리고 내가 봤을 땐 정훈이가 우리 입장을 많이 배려해 주고 있는 거 같다.”
“우리 입장을요?”
“앞서 터졌던 이슈가 미래금융 게이트가 아니라 재경 그룹 게이트였다면?”
“네?”
“그랬다면, 아무리 거기에 우리 미래금융이 똑같이 엮여 있었다고 해도, 정훈이 저놈 우리 눈치 안 보고 진작에 부경통신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공격이란 공격은 다 퍼부었을 거다.”
“…정훈이가요?”
“직접 했든 아님 손 회장을 움직여서든.”
장영석 부회장은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며 숨을 참았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겠냐. 우리 미래금융이 중심된 이슈라 자기가 직접 앞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는 자기 외삼촌인데 아직 하늘이하고 결혼식도 안 올린 상태에서 자기가 끼어들 명분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을 거 아니냐.”
“하지만 1조 소송이라니요. 너무 과하잖아요. 욕 얻어먹습니다, 아버지.”
“오래 살겠다고 그러는 모양이지.”
“아버지.”
“얻어먹는 욕은 잠시이겠지만, 부경통신의 돈줄은 확실하게 막아 놓을 수 있겠지.”
“돈줄을 막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생각을 하면 생각을 할수록 놀랍다.
마치 손중길 회장이 정훈이의 몸으로 환생이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
아무리 손자라도, 어쩜 적의 피를 말려 버리는 잔인함까지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자기 할아버지 실제 얼굴도 기억을 못 할 놈이, 제 할아버지한테 그런 경영 묘수를 직접 배웠을 리는 없을 것 아닌가.
장태산 회장은 어이없는 웃음 말고는 아들 장영석 부회장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 이 이슈로 부경통신뿐 아니라 부경 전체에 얼마나 큰 이미지 타격이 들어갈 거 같으냐.”
“…….”
“운전기사 상습 폭행 건만 가지고도 이렇게 이슈가 크게 되고 있는데, 여기에 현재 검찰에서 파헤치고 있는 미래금융 게이트에 조작이 있었고, 그 조작의 중심에 장선길이, 그리고 장선길이의 부경통신이 있었다는 내용이 공개가 되면 어떻게 될 거 같으냐?”
“당연히 부경 관련된 모든 주가는 폭락을 하겠죠. 우리도 우선은 타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태영 쪽 통해서 검찰 쪽으로 줄을 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정훈이 놈이 우리 미래금융에 꼭 필요하다고 내가 너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하는 거다.”
장영석 부회장은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딱 거기까지가 너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복수의 최대치였다. 근데 우리의 최대치를 기본으로 깔고 가면서 몇 발이나 더 앞으로 치고 나가고 있는 놈이 바로 정훈이야.”
“그 정도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한다는 건 알겠는데….”
“아니,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정훈이 놈이 계획 안에 우리의 최대치는 기본값이었다고.”
“……?”
“정부 기관, 법조계, 언론을 통해 특정 기업 죽이기를 위한 게이트를 조작한 기업. 당연히 욕을 얻어먹겠지. 지탄을 받겠지. 하지만 부경통신 정도 되는 대기업은 실체 없는 대중들의 평판에 쓰러질 수가 없어. 왜? 그 평판이 사그라질 때까지 버틸 체력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누가 봐도 절대 승소가 불가능한 소송일지라도, 1조짜리 소송이 붙어 있으면 말은 달라진다.”
그제야 장영석 부회장의 눈빛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조짜리 소송이 붙어 있는 기업 쪽으로 어느 정신 나간 금융사가 대출을 일으켜 줄 것이고, 어느 정신 나간 투자사가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기업 쪽으로 투자를 부어 줄 거야?”
입을 반쯤 벌린 상태로 탄식을 흘리는 아들을 쳐다보며 장태산 회장이 말을 이었다.
“고정적인 기업 매출이라는 돈 흐름이 막힌 상태에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투자사, 금융권뿐이니 그걸 막아 버리겠다고 1조짜리 소송을 준비하겠다는 거 아니냐.”
“이야, 진짜 무서운 놈이네, 저놈 저거.”
장영석 부회장은 조금 전 하늘이와 함께 정훈이가 나간 현관문 쪽을 쳐다보며 힘이 빠진다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해볼 만하다고 본다. 우리 미래금융은 못 해도 재경이라면… 명분도 충분해. 무서운 게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는 놈이다, 정훈이 저놈이.”
“그렇네요.”
“늦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자자.”
“네, 아버지.”
“거실 불 확인하고 들어가.”
“하늘이 금방 나갔는데, 올 때까지 거실 불은 켜 놔야죠.”
“그냥 꺼. 다 끄고 들어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