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잡아먹어
“식사도 못 하고 기다린다고 늦게까지 수고 많으셨어요, 차장님.”
갑자기 팔짱을 확 끼길래, 깜짝 놀랐다.
“정훈이 오빠는 제가 조금만 데리고 같이 있다가 안전하게 택시 태워서 보낼 테니까, 차장님은 이만 들어가 보세요.”
꽤 멀리까지 나왔다.
그냥 집 근처 어딘가 정도를 생각했는데, 의도를 한 것인지 오히려 내가 사는 집과 더 가까운 곳까지 와 버렸다.
그 앞에서 강 차장을 먼저 보낸 하늘이를 따라 들어간 와인 바.
작은 룸을 얻어서 와인 한 병을 오픈시켰다.
“어쩐 일로 잔소리가 없네?”
하늘이는 마치 내가 할 잔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 싱긋이 웃었다.
“무슨 잔소리?”
“뭐든. 절대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잖아. 이 늦은 시간에 일방적으로 따라붙어서 이런 곳까지 데리고 왔는데, 빈 소리라도 툴툴거려야 손정훈다운 게 아닐까 해서 말이지.”
“너도 오늘은 술이 먹고 싶은가 보지.”
“그럼 따라붙기 잘한 거 맞아?”
애매하다.
술이 부족했던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 술을 하늘이 이놈과 마저 더 채울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오늘은 누구라도 좋으니까 말 상대가 있었음 하는 생각도 했던 거 같다.
“너는 요즘 괜찮냐?”
대화 주제를 바꿔 버리는 날 빤히 쳐다보며 하늘이가 웃었다.
“어떤 부분에서 괜찮냐고 묻는 거야?”
“그냥 이것저것 다. 미래금융 창립 이래 가장 큰 위협이었을 거 같은데, 크게 우는소리 없이 잘 버티는 거 같아 신통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렇네.”
“딱 신통까지만 하지, 거기에 기특은 왜 또 갖다 붙여? 그렇게 내 앞에서 어른인 척을 하고 싶어?”
“칭찬을 해 줘도 난리니, 원….”
“딱히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거든.”
“자리 끝날 때까지 이런 콘셉트를 유지해 줄 생각이라면 따라붙어 주길 잘한 게 맞네. 생각이 좀 덜어진다, 너랑 이렇게 말꼬리 물고 앉아 있으니까.”
“궁금한 게 있어서. 아까 식사 자리에서 묻기는 좀 그랬고, 그렇다고 통화로 묻는 건 더 이상할 거 같은 거야.”
“뭐가 궁금한데?”
“아주머니… 그러니까 오빠네 어머니 말이야. 괜찮으셔?”
장혜란이?
그 이름에 내가 인상을 쓸 겨를도 없었다.
“걱정이 돼서. 신경도 쓰이고.”
딱 잘라서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을 못 했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부경은 아주머니 친정이잖아. 친정 오빠들, 언니, 동생… 아주머니 입장에선 남편, 아들들이 자기 형제들하고 사업적으로 척을 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불편하실 거 같아서.”
“그건 나도 갑자기 궁금해지긴 하네.”
“무슨 그런 말이 있어?”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장혜란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
나한테까지 속을 들키지 않는 건 참 대단한 건데, 나도 사실 장혜란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네가 신경 쓸 내용이 아니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말 참 예쁘게 한다. 내가 가급적이면 맞춰 주고, 져 주고, 그렇게 할 생각이긴 한데… 그래도 방금 같은 그런 말은 앞으로 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생각을 해 보고 했음 좋겠네?”
“나도 신경을 안 쓰고 있다고.”
내 말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정말이냐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이가 물었다.
“어떻게 그래?”
“뭘 어떻게 그래?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외가 쪽으로 정이 없는 건 알겠어. 그랬으니 부경유통부터 시작해서 부경호텔 경영권 다시 가져올 때도 가장 앞으로 나왔던 거였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오빠네 외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오빠네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야.”
진짜 내 어머니였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더한 짓을 하셨다 한들, 마땅히 내가 다 안고 갔겠지.
하지만 장혜란이는 내게 나의 재경을 찢어발겨 놓은 부경의 장가 핏줄이고, 그런 핏줄을 나의 재경에 들인 나의 실수 그 자체이다.
“하늘아.”
“또 목소리 깐다. 또 왜? 또 무슨 꼰대 같은 소리를 하려고?”
“너만 알고 있어라. 비밀까지는 아닌데, 다른 사람들까지 알아서 좋을 내용은 아니거든.”
“…뭐?”
“나. 음… 엄마라는 사람 싫어해.”
시작된 정적.
그 정적 속에서 하늘이는 수차례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며, 마치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릴 들었냐는 식으로 날 쳐다봤다.
“그게 그렇게까지 못 볼 거 보고,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놀랄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나? 자식은 엄마를 싫어하면 안 되나? 싫어할 수도 있는 거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고개를 틀어 가며 목 근육을 풀고 있는 거였다.
한참을 그렇게 목 근육을 풀다가 하늘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와. 역시 오늘도 내 예상 정도는 아주 같잖게 뛰어넘어 주시네. 그래, 좋아. 그럴 수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상대가 손정훈이니까. 내 주변에서도 이런 케이스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살짝 당혹스럽긴 한데, 그게 오빠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보통은 부모를 상대로는 싫어해, 가 아니라, 별로 안 좋아해, 아니면 뭐 불편해… 그 정도로만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안 좋아하는 거랑 싫어하는 건 크게 다른 거지.”
“그냥 아예 싫어해?”
“어, 싫어해.”
“우와, 이건 진짜 좀 슬픈데?”
“슬플 게 뭐가 있어?”
“기억을 잃은 후 아주머니에 대한 어떤 기억들만 있어 왔는지는 몰라도, 정태 오빠한테 듣기로 오빠랑 아주머니 사이 아주 좋았던 걸로 알고 있거든.”
“그땐 내가 천지 분간이라는 걸 아예 못 했었나 보지.”
“그걸 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눈치 볼 필요는 없다, 하늘아.
지금 이 대화에 있어서만큼은 누가 봐도 네가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인 거다.
그런데 어쩌겠냐.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는 않은데, 이 감정을 널 상대로 이해시킬 방법도 내겐 없는 것을.
그저 내가 장혜란이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만 있으면 된다.
그게 또 너에겐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부경 쪽과의 관계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덜어지는 효과도 있지 않겠냐.
그렇게 속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언제 장혜란에 대해 물었냐는 듯 얼굴 표정을 애써 경쾌하게 바꾸며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도대체 누구랑 이야기를 해?”
“무슨 이야기?”
“오빠가 로봇은 아니잖아. 어떻게 항상 사업 생각만 해? 기억 잃은 후로는 따로 연락하는 친구도 없어, 정태 오빠하고도 그렇게 편한 관계는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정엽이 오빠랑도 마음을 터놓고 지낼 만큼 관계가 가까워진 건 아니잖아. 그런데 어머니하고의 관계까지 그래 버리면… 사람이 살아져?”
“출근하면 사람들이 많아.”
“그 사람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해?”
“일 이야기.”
“그렇게 사는 거 안 외롭니?”
외롭다?
아니, 전혀.
“그렇게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건데?”
“내 기준에서 오빠는… 분명 착하고 좋은 사람은 아닌데, 그럭저럭 나이스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거든. 충분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들 수 있다고 봐.”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면 네가 말하는 그 외로움이라는 게 없어지는 거야?”
“사업과 상관이 없는 관계도 만들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거잖아.”
“그런 관계를 지금의 나는 만들 수가 없잖아.”
“왜? 왜 못 만들어?”
하긴.
이 녀석은 모를 수도 있겠다.
아니구나.
모르는 게 당연한 거겠구나.
부경에 대한 나의 감정이 안 좋다는 정도는 알아도, 그 안 좋은 감정의 농도까지 이 녀석이 알 수는 없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알겠나.
내가 손중길이라는 거, 재경을 내가 제 할애비와 함께 세우고 키웠다는 거, 그런 재경을 토막 내어 가지고 간 부경을 내가 어떤 감정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거… 그런 걸 알 수는 없는 걸 테니….
“부경이라는 이름 자체를 내 손으로 완벽하게 다 지워 내기 전까지는… 난 다른 거 안 보고 오로지 부경의 이름을 지우는 데에만 집중을 할 거거든.”
와인 잔을 들어, 그 잔 주둥이에 입술을 붙인 채 하늘이는 한참 동안 날 뜯어보듯 쳐다봤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웃는 건가?
“그나마 다행이다.”
“뭐가?”
“사실 나 그동안 혼자 생각이 좀 많았어.”
“무슨 생각?”
“나도 우리 미래금융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한 부경을 용서할 마음이 없거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날 정도로 치가 떨려.”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건 맞는데… 그래서 아주머니가 어떻게 계시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어. 지금 상황에 많이 불편해하실 거 같았거든.”
“불편하겠지. 어떻게 아예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겠어? 그나마 들고 있는 게 이젠 부경물산, 부경건설의 지분뿐인데.”
“와, 또 한 번 사람을 놀라게 하네. 지금 나는 아주머니가 부경, 그리고 재경과 미래금융 사이에 끼어 있는 상황 자체가 불편할 거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건데, 그 와중에 그런 계산이 나와?”
“그게 제일 중요할 거니까. 재경가에 들어와서 재경의 계열사들이 IMF 당시 부경 쪽으로 흡수되게 만든 일등 공신이야, 부경의 입장에선.”
“…….”
“그 덕에 각 계열사 지분을 외할아버지 통해서 상속을 받았지. 그런데 지금은 두 손에 고작 물산과 건설의 지분뿐이네? 건설은 지금 이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고, 그 건설의 주인이 검찰에 불려 가서 조사를 받고 있어. 그나마 멀쩡한 건 물산이야. 그런데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부경 전체가 지금 흔들리고 있으니까. 내가 재밌는 거 하나 말해 줄까?”
“왠지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서운 이야기일 거 같은데?”
“재경에서 넘어간 계열사 지분을 우리 어머니한테 상속해 주시면서 어떤 약속을 받았는지 알아?”
“약속? 누구한테?”
내가 조동희 전무한테 이 이야기를 듣고 내 귀를 의심했었다.
“그 계열사 지분들을 재경에 섞이도록 만들지 않고, 어머니의 재산으로 인정하게 한다. 우리 회장님한테 그 약속을 서면으로 받으셨대. 대단하지 않아?”
대단한 걸 넘어 그 정도면 아주 잔인한 거지, 그것도 내 아들놈을 상대로.
“죽을 날 받아 놓고 오늘내일하고 있는 양반이 혹시라도 나중에 우리 재경이 그 지분을 가지고 부경을 통해 해당 계열사들을 되찾아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는 말 아니야. 초인적인 욕심인 거야, 그 정도면.”
하늘이는 반쯤 열린 입은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초인적인 욕심에 짐승 같은 잔인함.”
“잔인함?”
“너는 눈앞에 네가 잃어버린 물건이 버젓이 있는데, 그걸 손도 못 대게 그런 식으로 묶어 버리면 마음이 어떨 거 같아?”
말을 하다 보니 우습네.
“그런데 그 양반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셨던 거야. 혹은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 회장님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으셨거나.”
“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셨다는 거야?”
“그 서면 약속이 결국은 공동 재산이 아닌 개인 재산을 서로가 인정을 해 주겠단 뜻이거든. 부경화학까지 무너져서 물산도 박살이 나면… 빈털터리가 된다는 말이야.”
“어쨌거나 아주머니가 들고 계셨던 부경유통, 부경호텔 지분이 이름만 바뀌었지 스너프, JK 드 누락에 담겨 있는 거잖아.”
“내가 말 안 했나? 그 지분들 다 지금 내 명의야.”
“……!”
“원래는 한 번에 다 주기로 했거든? 근데 참 약속을 안 지켜. 약속을 지키는 건 손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가 보지. 찔끔찔끔… 그렇게 나눠서 주네.”
“설마 그거 때문에 아주머니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 그건 진짜 아닌 거야.”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무리 비즈니스로 묶인 정략결혼이었어도, 최소한 자기 남편이 회장 자리에 욕심이 있어 친형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루머가 나돌면, 그 루머가 자기 친정 쪽에서 흘린 루머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자기하고의 사이에 자식을 둘씩이나 낳고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남편에 관한 루머라면 말이야.”
“…….”
“참 가엽지 않아? 우리 회장님. 전생에 무슨 죄를 얼마나 크게 지었기에 이렇게 지옥 같은 삶을 버텨야 하는 걸까… 도대체 할아버지의 재경이 뭐라고.”
모자란 홍준이 놈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턱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내 아들놈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부경, 그리고 장혜란이.
내가 그 지옥의 끝에 뭐가 있는지 직접 끌고 가서 구경을 시켜 주고야 말 것이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그 책임을 회장님을 대신해서 물어야겠어.”
내 모습이 짠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난 감정이 올랐던 거 같고.
측은한 눈길로 날 쳐다보는 하늘이 녀석의 눈길이 괜히 머쓱하게 느껴졌다.
“오늘… 내가 같이 있어 줄까?”
빈 잔에 와인을 채우려고 하는데 뜬금없이 이상한 소릴 하는 하늘이었다.
“어차피 내일 출근 안 하잖아. 나도 좀 더 취했음 싶고. 같이 있어 줘?”
“까분다.”
“푸훕. 그런 반응 나올 줄 알고 있었어. 쫄지 마. 안 잡아먹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