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303)

싸우러 온 거 같은데?

점심시간.

재경 그룹 본사 근처의 한 한우집이었다.

정태는 소형 룸 안에서 정훈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리던 정훈이가 도착을 하기 전 먼저 스너프 백화점사업부문장이 그 룸 안을 찾았다.

백화점사업부문장이 급하게 챙겨 온 서류 봉투.

정태는 그 안에서 출력된 사진 몇 장과 함께 들어 있던 USB를 확인하고 부문장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시간도 어중간한데 식사하고 가시지요?”

“아닙니다, 손정훈 상무님과 약속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같이하시면 되죠.”

하지만 테이블 위론 딱 두 사람의 자리만 세팅이 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럼 내가 민망해지는데? 실은 사람을 보낼 줄 알았지, 이걸 들고 부분장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직접 오실 줄 알았음 자리를 따로 만들었을 건데.”

“사안이 사안이지 않습니까. 혹시 몰라서 영상은 편집이 안 된 원본 영상 그대롭니다.”

부문장이 돌아간 후, 다시 30분 정도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 룸 안을 지키고 있었던 정태였다.

기다릴 작정을 하고 급하게 잡은 약속이었다.

아침 일찍 아버지로부터 그룹 본사에 들어와 보라는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들었다.

정훈이가 아버지를 찾아가 이번 부경통신을 상대로 준비해야 할 공동 손해 배상 청구 소송 건을 자기가 책임지고 진행을 해 보겠다고 한 이야기를.

이야기를 듣는 내내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왜 이런 내용을 아버지에게 묻기 전 자신에겐 한마디 상의조차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섭섭함 따위를 느껴 볼 겨를조차 없었다.

부끄러움.

그저 부끄러움이 앞서고 있었다.

자신은 그간 스너프가 입은 손해를 어떻게든 회복해 나가는 데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었고, 실제 그걸 해 나가는 데에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훈이는 자신이 호언장담을 한 것처럼 부경마트를 사지로 내몰아 가면서 그와 동시에 부경통신의 숨구멍까지 함께 조여 버리겠다고 하고 있다.

물론 미래금융 게이트로 인해 스너프와 재경식품이 본 영업 손해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미래금융보다 더 큰 영업 손실을 보고 있었던 게 스너프였고, 반대로 재경식품은 태영마트를 잡고서 영업 매출의 상승 곡선을 그려 나가고 있는 중.

백번 양보를 해서 타이밍과 운의 차이였다고 치더라도 이건 말이 안 된다.

부경마트를 사지로 내몰아 버린 정훈이가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통해 부경통신까지 앞장서 죽여 보겠다고, 그 방법을 아버지에게 전달한 부분은 누가 봐도 운이나, 타이밍이 아닌 실력이었다.

“후우….”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감히 재경, 그리고 스너프를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친 부경통신과 장선길을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못할까.

지금의 정태는 그게 만약 악마와의 계약이라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통해 들은 정훈이의 계획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해 볼 만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었고, 설혹 그 방법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경통신을 비롯해, 부경의 이름을 달고 있는 외가 쪽 모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고급 전략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자신은 그런 고급 전략을 듣고 단번에 이해는 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전까지는 만들어 내지 못했는지, 그 스스로의 원망이 정태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듣는 순간 바로 이해가 되고, 다른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그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방법을 왜 듣기 전에는 생각을 못 해 봤던 걸까.

속이 쓰렸다.

그 속쓰림의 이유엔 뛰어난 동생에 대한 질투심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절대적인 줄 알았던 자신의 역할이, 자신의 존재감이 재경 안에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문득 몇 해 전 아내 원수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생이 생겨서 가족들의 모든 관심과 사랑이 동생에게 쏠릴 때 첫째가 받는 심적 스트레스는 마치 왕이 왕좌를 빼앗길 때 받는 스트레스와 비슷하다고.

하지만 정태는 살면서 동생 정훈이를 통해 그런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그저 일반적인 집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철저하게 재경의 후계자로 자라 왔던 정태였다.

거기에 정훈이는 모든 면에서 자신이 챙겨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부족한 동생이었고.

“크흠, 후우….”

정태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미닫이 방문이 열리며 정훈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기분 탓일까.

룸 안으로 들어오는 동생의 모습에서 아주 이질적인 거인의 모습이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얼굴에 여유가 번져 있었다.

그 여유를 보는 순간 정태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든 챙기고 싶었던 든든한 형으로서의 모습, 재경가 장남으로서의 부담감을 이제는 조금 내려놓아도 좋을 거 같다는, 아니, 내려놓아야 한다는 확신 비슷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얼굴 좋다?”

자리에 앉는 동생을 향해 정태가 물었다.

그 질문에 정훈이는 자리에 앉아 다 식어 버린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얼굴이라도 좋아야 할 거 아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암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더라도, 그걸 내색할 수 있겠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야지, 풀 죽은 모습을 회사 직원들한테 보이면 되겠어?”

“내가 네 직원이냐?”

“어디서든.”

“자식.”

백화점사업부 부문장이 갖다준 서류 봉투.

정태는 그 봉투를 테이블 아래에서 꼭 손에 쥐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봉투를 가져오라 시키고 또 정훈이를 보자고 불러냈을 때와는 달리, 그걸 테이블 위로 기꺼이 올려놓을 엄두가 안 나고 있었다.

지금 이 서류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이 정훈이가 부경통신을 상대로 하고자 하는 싸움에 꽤 쓸 만한 무기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걸 내어 주자니 꼭 재경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내어 주는 꼴이 될 것만 같은 불안함.

그런 불안함을 꾹 참아 내고 있는 정태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정훈이가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조금.”

“시키자. 뭐 먹을 건데?”

“그 전에 잠깐만.”

결국 정태는 태이블 위로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정훈이는 정태가 올려놓은 봉투와 정태를 번갈아 쳐다봤다.

“뭐야?”

“어제 아버지 찾아갔다면서?”

“어.”

“왜 집으로 안 찾아가고, 밖에서 뵙자고 했어?”

확실히 자신이 알고 있던 동생이 아니었다.

보통은 그 속내를 들키지 않겠다고 허둥지둥거려야 맞는 건데, 아주 침착하게 그것도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장만을 말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이 있다는 말일 테지.

그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숨이 막혀 오는 자신의 모습에 정태는 스스로의 마음 상태가 불만이었다.

“집엔 엄마가 있잖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엄마 눈치를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 근데 그건 뭐냐니까?”

“상황 봐서 가장 효과적일 때 터뜨리려고 가지고 있었던 거야.”

“뭐를?”

“그런데 어제 네가 아버지 찾아뵙고, 직접 부경통신 발라 버리겠다고, 그럴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부탁을 드렸단 이야기를 듣고 나보다는 네가 좀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이야. 일전에 부경통신이 우리 스너프 쪽으로 장난질했을 때.”

“일전에? 아, 통신사 제휴 관련해서 자기들이 제휴 해지를 하자고 해 놓고 스너프가 일방적으로 끊었다고 언론 플레이 했던 거?”

“어. 그때 스너프 쪽에 일방적으로 안 좋은 기사를 냈던 언론사 기자가 현장 소비자 취재를 한 다음 소비자인 척을 했던 사람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 우리 쪽 주차장 CCTV에 다 잡혔거든.”

“그걸로 부경통신한테 노블레스 받아 냈던 거 아냐?”

“그 정도로 마무리를 지어 주겠다 했음 살려 줘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인간들이 이렇게 뜬금없이 뒤통수를 치잖아.”

“원본하고 다 그쪽으로 넘겼던 거 아니었어?”

“상대가 상대야. 내가 그 인간을 어떻게 믿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정훈이는 서류 봉투에서 꺼낸 현장 CCTV 촬영 영상 중 출력된 사진 몇 장을 넘겨 보기 시작했다.

“잘했네. 아, 이건 나도 전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던 거다.”

“워낙에 먼저 터진 게 크다 보니까, 이게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씨를 키워 줄 장작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쓰라고 가져왔어. 소송은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내일 아침에 접수할 거야.”

사진을 다시 서류 봉투 안으로 챙겨 넣은 뒤 정훈이가 물었다.

“직접 쓸 수도 있었을 건데?”

내일 아침에 접수를 하겠다?

이미 그동안 준비를 해 왔고, 그 준비도 다 끝이 났단 말 아닌가.

정태는 웃음이 나왔다.

동생 정훈이를 상대로, 가벼운 내기 게임을 할 때를 제외하고 이런 허탈한 웃음을 흘려 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웃음을 정리해 놓고 단단한 표정으로 정태가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이거 하나만 생각하면서 물어뜯어. 우릴 죽이겠다고 한 놈들이야. 우리 재경 덕에 큰 주제에. 자기들 크겠다고 우릴 짓눌러 온 놈들이고. 사업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거고, 잡아먹힌 놈이 멍청한 거니까 그 부분에 있어 우리가 딱히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건 맞지만….”

“무슨 말이 필요해? 그냥 받은 대로 돌려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거기에 이자 조금 더 붙여서. 부경통신 정도면 원금 상환 전에 미리 받을 이자 정도로 충분한 거고. 뭐 좀 시키자.”

“뭐 먹을래?”

“앞으론 내가 먹고 싶은 거 말고 형이 먹고 싶은 거 먹겠다며? 먹고 싶은 거 시켜. 앞으로도 쭉. 그게 뭐든 맛있게 같이 먹을 테니까.”

* * *

법무 법인 해명을 통해 부경통신을 상대로 공동 소장을 접수해 놓고 최민성 검사를 만나러 갔다.

전날 정태에게 받았던 서류 봉투 안 내용물 중, USB 안에 든 영상도 다 확인을 해 봤는데, 그냥 그대로 넘겨주면 될 거 같았다.

최민성 검사.

기업 저격수로 통한다지?

별명이 참 귀엽다 싶었다.

별명만큼이나 날 대하는 냉랭한 모습까지도 내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재경에서 오셨다고요?”

부별로 검사실이 나뉘어져 있는 복도에서 만났는데, 아주 의식적으로 날 적대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재경식품 손정훈 본부장입니다.”

“역시 거스를 게 없다는 부분에선 재경도 마찬가지네요. 조사 중에 이렇게 막 검찰까지 직접 다 찾아오시고… 원래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걸 아니까 다른 사람 통해서 잠시 얼굴이나 좀 뵙자고 한 거겠죠?”

“그걸 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시면 됩니까? 딴 데도 아니고 이렇게 검찰 안방까지 직접 찾아와서. 대한민국 재벌들, 이거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닙니까?”

곧 죽어도 검사다 이건가?

꽤나 찰지네.

내가 뭘 따지러 온 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구는 걸 보니, 해명 쪽 변호사들을 통해서 대충 이야기는 들은 모양이다.

“검찰이 기업 하는 사람들한테 먼저 신뢰를 줬다면, 제가 굳이 바쁘게 이런 거 들고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었겠어요?”

최민성 검사는 그제야 내가 들고 있는 서류 봉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이런 자료가 있으니까, 제대로 쓰일 수 있게 전달하라고 사람을 시키면 그만이지. 근데 내가 직접 내 손으로 검사님한테 전달을 안 하면 이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겠는데, 그만큼 내가 지금 현 대한민국 검찰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게 제 잘못입니까?”

“…….”

“미래금융 게이트. 파 보니까 뭐가 나오던가요? 그걸 계획한 건 지금 저 안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양반일지 몰라도, 그걸 디테일하게 설계해서 언론과 함께 세상에 뿌린 건 검찰 아닙니까? 그런 검찰 조직을 또 바보처럼 믿으라고요? 어떻게?”

“할 말만 합시다."

마침 그 앞에 커피 자판기가 한 대 있었다.

“그쪽도 참 전형적인 대한민국 검찰이네. 초면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들고 힘들게 찾아온 사람을 앞에 두고 보자마자 시비를 건 쪽은 그쪽이면서, 조금 불리해지니까 할 말만 하자?”

“…….”

“검사답게 날이 서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그 날도 상대를 봐 가며 겨눠야 하는 거 아닌가?”

“상대를 봐 가면서 날을 세우면 그게 어떻게 검사겠어요? 내가 지금 재경이라고 안 파고 있을 거 같아요? 안 그래도 그쪽 얼굴 내가 한번 보고 싶긴 했어요. 지금 태영마트하고 재경식품이 손잡고 부경마트 상대로 하고 있는 작전, 그거 엮기에 따라선 불공정 거래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불공정 거래가 될 거 같으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말이 나오겠죠.”

“진짜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네?”

“무서운 게 왜 없겠어요? 많아요. 근데 그 무서움이라는 것도 믿음이 있어야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

“신을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게 지옥을 무서워할 것이고, 사람을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게 배신을 무서워하겠어요? 애초에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내가 지금 그쪽 안방에 와 있다고 그쪽을 무서워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냐고.”

“싸우러 온 거 같은데?”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나 같은 기업 하는 사람들도 검찰을 좀 무서워할 수 있게 이번 건을 통해서 믿음을 좀 달라고요.”

내 말에 최민성 검사는 마치 크게 한 방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움찔했다.

“길게 앉아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만 전달하고 끝낼 내용도 아닌 거 같고… 자판기 커피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요. 제가 살 테니까 같이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시죠. 마침 또 동전이 있네, 내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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