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래 내 앞에 누가 먼저 달리는 꼴을 못 봐
직접 재경식품 본사까지 찾아온 장선길이 쪽 법무팀장에게 내가 물어봤다.
“외부 변호사가 아니라 본사의 법무팀장이 직접 찾아왔단 말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일련의 이슈들이 장선길 회장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부경통신과 부경건설의 계획적이고, 전략적 공격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정도로 이해를 하면 되는 거죠?”
“해당 내용은 궤를 달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쪽 생각을 물어본 게 아니라, 부경통신, 부경건설과는 관계없이 장선길 회장의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잘못이었는지, 아님 그 잘못에 부경통신과 부경건설이 깊게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한 말을 여러 가지 방향에서 해석을 시도해 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도 그 부분을 정확하게 알아야 실수를 안 하지. 부경통신, 부경건설이 어디 장선길 회장 개인 회사예요? 인간 같지도 않은 회장, 그 일가 때문에 그쪽 주주들까지 싹 다 쪽박 차게 만들 정도로 이성을 잃은 건 아니에요, 아직 내가. 아, 참고로 지금 이 미팅 뒤에 법무 법인 해명 쪽과 미팅이 잡혀 있어요.”
“……!”
“지금 내가 그쪽을 만나고 있는 내용도 해명에서 알고 있고, 지금 이 만남 자체를 해명에서는 법적 해석이 가능하게끔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 미리 말해 놓고 시작을 해야겠네. 그래야 나중에 가서도 서로 오해 없이 깔끔할 테니까. 그렇죠?”
답답할 거다.
너무나 뻔한 내용에 대해 내가 집요하게 묻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짚고 있는 내용에 자신이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상대도 벌써 직감을 하고 있는 듯했다.
법무팀이라는 건 장기판으로 따지면 왕을 지키는 사졸.
하지만 조직에 따라 그 왕에 대한 개념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조직, 즉 기업 자체를 끝까지 지켜 내야 하는 왕으로 둘 수도 있고 아님 지금의 부경통신처럼 회장, 총수와 같은 특정 인물을 왕으로 두기도 한다.
법무팀이 설혹 그 존재가 부경통신의 회장일지라도 특정 인물을 위해 움직일 때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상대하기가 무척 수월해진다.
“지금부터 그쪽이 상대를 해야 할 사람은, 그간 돈, 인맥, 부경통신의 이름… 그런 것들로 얼마든지 회유, 협박이 가능했던 상대들과는 크게 다를 거라는 거 알고 계시죠?”
“…….”
“그 정도는 공부를 하고 왔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명색이 부경통신 법무팀장이라는 분이, 그 정도 공부도 없이 날 상대해 보겠다고 용기를 내지는 않았을 텐데? 하긴 무슨 공부가 필요하겠어요. 부경유통, 부경호텔, 그다음 타깃으로 내가 통신을 잡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래요?”
입맛만 다실 뿐 상대는 그에 대한 대답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봤다.
“부장 판사 출신이셨다고? 듣자 하니 8년 전 장민규가 일으킨 음주 운전 뺑소니 사건에서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냈던 걸로 유명하다던데?”
“그, 그게 무슨….”
“그 피해자 식물인간 상태로 2개월 정도 겨우 버티다 눈을 감았다죠? 재판은 그 전에 이미 다 끝이 났고. 결국은 살인자인 거잖아요.”
“해당 사건은 이미 피해자 가족들과 원만하게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포인트를 못 잡네, 이 양반이. 뭐 좋아요. 그게 중요한가, 내 사업이 중요하지. 아무튼 그런 살인자를 부경통신의 후계자로 만들어 놨는데, 판사 연금이 대수겠어요? 안 그래요? 부경통신의 법무팀. 아주 어벤져스더만. 어지간한 로펌은 그냥 집에 가라 할 수준으로 멤버 구성이 화려하던데?”
“…….”
“기업에서, 그것도 형사, 청소년계 관련 전직 부장 판사, 부장 검사들을 법무팀에 데리고 있을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런 데서 법무팀장 정도 하면 연봉은 얼마나 받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내용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부장 판사까지 올라갔던 그쪽 정도 삶의 수준이라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었나? 하긴, 처음부터 그런 선택을 했기에 부장 판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거라고 봐야 하는 건가?”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켜 주시지요.”
“지켜서 이 정도란 생각은 왜 못 하지? 푸흡, 하, 하하하… 최소한의 예의? 예의를 알아서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신 거요? 감히 겁도 없이 전화를 걸어 직접 나랑 약속을 잡고? 장선길이 옆에서 세상을 자기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버릇이 되셨나, 왜 이렇게 사람이 겁이 없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얼굴, 외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을 하든, 난 오로지 나의 재경에 흠집을 낸 상대를 응징하듯 무섭게 꾸짖었다.
“난 예의, 양심 뭐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 걸 아는 사람이면 장선길이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서 돈을 벌 수 없는 거 아닌가? 예의, 양심 같은 거 상관없이 어떻게든 소송이 길어지기 전에 합의만 유도해 내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찾아온 건 줄 알고 그에 맞게 상대를 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
“…….”
“한 가지만 해, 한 가지만. 뭐야? 사람으로 찾아온 거야, 아님 장선길이의 개돼지로 찾아온 거야? 사람으로 찾아온 거라면 내가 사과를 하고, 개돼지로 찾아온 거라면 그에 맞는 대우를 내가 해 줄라니까.”
상대가 누구면 어떤가.
더 이상 장선길이를 상대로 외삼촌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붙여 줄 이유가 이제는 없는데.
상대방의 기를 있는 힘껏 눌러놓은 뒤, 커피 두 잔을 안으로 넣어 달라고 내선 전화를 넣었다.
커피가 도착하기 전까지 난 상대방이 챙겨 온 서류들을 꼼꼼하게 읽어 봤고, 커피가 들어온 뒤엔 끝까지 다 확인을 하지도 못한 그 서류들을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사실 볼 이유가 전혀 없는 활자들의 조합이었다.
그저 커피가 준비될 때까지 상대방에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끔 시간을 마련해 줬던 거뿐이다.
“2천억? 이걸로 합의를 보자?”
“저희 쪽에서 손해 배상금을 최대치로 잡았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실제 재경 그룹과 미래금융이 해당 소송으로 받을 수 있는 손해 배상금은 천억 미만입니다. 알고 계실 거라고 봅니다.”
“장사를 가르치는 건가? 설마 지금 날 상대로?”
“…….”
“재밌네. 좋아, 계속해 봐요. 근데 뭐?”
주춤하던 상대가 끝까지 힘을 짜내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린 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물론 어떠한 의도로 1조 소송을 넣으신 건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이슈에 대해선 부경통신의 법무팀을 총괄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무척 송구스럽고 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길게 끌어서 서로에게 실이 되는 결정이 아닌 양쪽의 손해가 최소가 될 수 있는 합리적인 결정을 해 주실 수 있도록, 해당 배상금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신다면 얼마든지 조율이 가능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대치로 잡은 손해 배상금이 2천억이다? 그쪽이 뭔데 우리 재경의 가치를 숫자로 평가질을 하는 거지?”
“…….”
“이야, 내가 지금 이런 놈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자괴감이 드는데? 아무리 기량에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이면 이제 겨우 장기 알 길 정도 배운 어린애를 앞에 앉혀 놓고 내기 장기를 하자고 꼬시는 격이잖아. 1조. 아니 그 이상을 부르면서 합의를 구걸해도 거절을 할 판에 2천억에 너희 재경과 미래금융의 기업 가치, 이미지 가치가 다 포함이 되어 있으니, 이걸로 합의를 보자? 이거 지금 누구 머리에서 나온 숫자요? 그쪽은 아닐 거 아냐. 그쪽은 그냥 가라고 시키니까 온 걸 거 아니냐고.”
“…….”
“가서 장선길 회장한테 그대로 전해요. 아직 급한 게 없는 건지, 아님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뭔가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우리 재경을 상대로 하는 실수는 딱 여기까지이길 바란다고. 한 번만 더 이런 저급한 방법을 쓰면 그땐 나도 브레이크 없이 같이 달려 주는 수가 있어요. 왜 먼저 때리면서 싸움을 걸어 놓고, 자기 맞을 때가 되니까 미안하다, 내가 졌다,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우리 그냥 싸우지 말자, 이 지랄이지?”
누가 봐도 딱 그 꼴 아닌가.
치사하게.
최대한 차가운 표정으로 상대에게 물었다.
“그게 나한테도 통할 줄 알았나?”
상대는 아래위 입술을 모두 안으로 숨긴 채 합죽이처럼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런 상대에게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중간에 이런 나팔수를 끼워서 날 상대하려고 하는 거지? 좀 불편하고 번거롭더라도 그냥 직접 하는 게 나을 텐데. 나는 상관이 없는데, 지금 그쪽은 상황이 많이 안 좋지 않나?”
자기를 대놓고 부경통신의 나팔수 정도로 취급하는 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이마에 힘줄이 꿈틀거린다.
꼴에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놈한테 그런 대우를 받는 게 쪽팔림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지.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라고 해요. 잡혀 있으니까 직접 오지는 못할 거고… 찾아가는 수고 정도는 내가 해 줄 수도 있으니까. 오늘 그쪽이 이딴 종이 쪼가리 들고 나 찾아온 게 실수인 거 같아요, 아님 실수가 아닌 거 같아요?”
“…….”
“최소한의 예의 어쩌고저쩌고 하길래 물어보는 거예요.”
“시, 실수라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내 생각도 그래요. 실수가 아니라 고의인 거 같거든. 아주 그냥 고의로 사람을 등신 취급하네, 기분 나쁘게.”
“아닙니다, 그런 거.”
“당한 내가 맞다는데, 왜 그쪽이 아니라고 하나? 설마 나도 미래금융처럼 정정당당,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품격 있게, 품위 있게 그렇게 이번 이슈에 대응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미쳤나?
다른 건 다 해도, 내가 장선길이 같은 놈을 상대로 대인배인 척을 하는 건 때려죽인다고 해도 못 한다.
그리고 나는 도덕적 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흠이 많거든.
돌이켜 생각을 해 봐도, 내가 그때 도대체 왜 그런 볼썽사나운 짓을 했을까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봐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일들 중엔,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을 했겠다 싶은 일들도 많고.
나는 재경을 정정당당하게, 깨끗하게만 키워 냈던 게 아니었다.
과연 그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그렇게 정정당당, 깨끗하게만 키웠다면 그때의 재경이 만들어지기나 했을까?
난 불가능이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난 도덕적인 부분에선 유결점 오너가 분명하지.
하물며 지금의 정훈이 놈은 오죽할까.
이놈이 살면서 만들어 낸 오점에 다른 오점 한두 개 더 내가 묻힌다고, 그 오점이 티나 날까?
난다 한들, 긍정적인 효과일 게 뻔한데….
“그런 기대로 날 찾아온 거라면 괜히 미안해지는데. 난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거든. 갈 데까지 가는 상대를 잡으려면 나도 갈 데까지 가야 안 되겠어요?”
“…….”
“지금까지는 내가 탐색전이 필요해서 그쪽 사람들을 쫓아다녔던 거지만, 지금부터는 그쪽에서 목숨 걸고 날 쫓아와야 될 거예요. 내가 원래 내 앞에 누가 먼저 달리는 꼴을 못 봐. 내가 지금 바로 멋진 선물 하나 보내 놓을 테니까, 그쪽은 장선길 찾아가서 같이 있다가 내가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지 같이 열어 봐요. 재미가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들고 있는 다른 거에 비해 큰 건 아니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 * *
상대를 돌려보내고 강인성 차장을 호출했다.
“네, 상무님. 부르셨습니까.”
“잠깐 좀 앉아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강 차장은 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서류 봉투 쪽으로 수차례 시선을 돌렸다.
“이건 뭡니까?”
“퇴근 시간 정도가 좋을 거 같아요. 그때쯤 추가 기사가 나도록, 이거 가져가서 언론 쪽으로 보내 줘요. 자극적인 부분은 유튜브 언론 시사 쪽으로 풀릴 수 있게 하면 될 거고.”
강 차장은 그 자리에서 내용물을 꺼내 확인을 시작했다.
자료를 확인해 내려가던 강 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며 나와 들고 있던 자료를 수차례나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자료는 어디에서 구하신 겁니까?”
“개를 한 마리 거뒀어요.”
“개요?”
“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말 잘 들을 테니 때리지 말라면서 이런 걸 자꾸 가져다주네요.”
장선동이의 아들 장민석이.
요즘 부쩍 연락이 자주 온다.
내가 일부러 길게 끌고 가는 이 싸움이 빨리 끝나기를 통신의 장선길이보다 더 애타게 원하는 인간이 아마도 화학의 장선동이인 모양이지?
그럴 거다.
내가 부경마트를 고립시키기가 무섭게 장선길이가 운전기사 상습 폭행으로 묶여 버렸다.
부경이라는 이름 자체가 비호감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버린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서 장선길이와는 또 다른 의미로 벼랑 끝에 내몰려 버린 게 바로 부경마트의 장선열이와 화학의 장선동이 아니겠나.
태영을 필두로 거의 모든 오프라인 유통판에선 부경화학의 생활 건강 상품들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고, 그나마 아군인 부경마트는 소비자 불매 운동에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자기 살길을 뚫어 보겠다고, 자기 아들을 시켜 이런 걸 가져다주는데 내가 이걸 안 받을 이유는 없는 거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고급 정보를 자꾸요?"
"그나마 개중에 그건 좀 쓸 만해 보이네요. 가져다준 사람 성의도 있는데 써야죠. 이제 슬슬 부경통신도 끝이 보이는 거 같아요."
“팩트 체크는 하신 내용들인 거죠?”
신중을 기하는 강 차장의 모습이 우스워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팩트 체크는 제보자가 아니라 제보를 받은 언론에서 하는 거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자기 목숨 줄 걸고 구해다 준 내용일 테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