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303)

더 높게 뛰어올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재벌 갑질’이란 표현에 많은 국민이 공분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그 공분을 한 몸에 사고 있는 재벌가가 있죠. 부경통신의 장선길 회장과 그의 일가. 그 실체에 대한 고발이 각종 SNS, 커뮤니티 등에서 줄을 잇고 있습니다.

재경 그룹 손홍준 회장은 퇴근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와 곧장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티비를 틀어 놓고 속보로 연이어 터지고 있는 부경통신에 관한 뉴스 기사를 확인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계속해서 추가로 밝혀지고 있는 부경통신 장선길 회장과 그 일가의 충격적인 민낯에 마치,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인데요. 이미 사실 확인이 끝난 내용만으로도 마치 도시 괴담을 연상케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현실에 비하면 드라마, 영화는 오히려 순한 맛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오늘은 부경통신 법무팀에 관련된 기사입니다. 단독에 SBC 팩트 체크 유일한 기자입니다.

―부경통신 장선길 회장의 장남인 장민규 씨가 호텔 바 라운지 바텐더 직원을 향해 물잔을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지릅니다. 아예 바 테이블을 타고 안으로 들어간 장씨는 다른 직원들이 말려 보지만,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해당 바텐더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 모욕적인 손짓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합니다. 작년 6월 강남의 한 특급 호텔 위스키 바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피해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장민규의 얼굴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해 놓은 CCTV 영상이 증거 화면으로 나오고 있었다.

―급기야 장씨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바텐더 직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 차례 연속 가격을 합니다. 장씨가 호텔에서 호텔 직원을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건 그로부터 30여 분 후입니다. 술에 만취한 장씨가 새벽 4시쯤 호텔 인근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이서됐을 때 동행한 부경통신의 법무팀장 노 모 씨는 경찰에 폭행 피해자와의 합의서를 곧바로 제출합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합의금은 천만 원. 그 자리에서 5만 원권 현금으로 지급되었습니다. 해당 제보를 받고 팩트 체크를 위해 부경통신 법무팀과의 통화를 시도해 봤습니다.

곧바로 해당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주장하는 부경통신 법무팀 직원의 단호한 음성이 변조된 상태로 흘러나왔다.

―합의를 법무팀에서 했다면 그건 불법 아니겠습니까? 장민규 부사장의 개인적인 일인데, 그 일을 위해 회사가 움직였다면 말이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짧은 입장을 끝으로 곧바로 해당 기자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SBC 팩트 체크 팀이 해당 사건을 담당했던 강남서 관계자와 접촉해 확인한 결과 부경통신의 법무팀장 노 모 씨는 장씨가 이서되어 오기도 전에 먼저 경찰서에 도착했고, 피해자에게 직접 합의를 제안하고 합의금도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장씨의 개인 변호사는 합의가 모두 끝난 뒤 경찰서에 도착했고 합의서 작성은 돕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팩트 체크를 근거로 부경통신 법무팀 직원에게 사실 관계를 다시 물었을 때야 비로소 장씨의 개인 변호사가 당일 개인적인 일로 자리에 없었던 관계로 비서실의 연락을 받은 법무팀장과 본사 상무급 인원 두 명이 먼저 경찰서로 갔고, 장씨 지인으로서의 역할로 합의를 유도했던 것일 뿐이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뉴스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서재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장혜란이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식사하세요.”

“알았어. 금방 갈 테니까 나가 있지.”

하지만 장혜란은 남편이 나가 있으라는 말을 함에도 한 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티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부경통신에 관한 뉴스에 함께 귀를 기울였다.

손홍준 회장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리에 멀뚱히 서서 해당 뉴스를 실눈으로 쳐다보는 아내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돌려 준 게 전부, 다시 뉴스에 집중을 했다.

―이와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그룹 고위 임원, 그리고 법무팀에서 어느 한 특정 인물 개인을 위해 직접 형사 사건 합의 과정에 개입을 했다면 업무상 배임 등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일한 기자.

―네.

―해당 사건과는 별개로 부경통신 법무팀 구성에 도덕적으로 더 큰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는 말이 있던데, 그건 어떤 부분입니까?

―이 역시 부경통신 그룹 부사장 장민규 씨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장씨는 8년 전, 아직 그룹 생활을 시작하기 전 유학생의 신분으로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음주 운전 뺑소니로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습니다. 피해자는 해당 사고 이후 2달 정도를 혼수상태로 힘겨운 시간을 버티다 결국 안타깝게 고인이 되었는데요, 음주 운전에 뺑소니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해당 사건에 장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이라는 믿을 수 없는 형을 선고한 담당 판사가, 앞서 계속해서 언급되었던 현 부경통신의 법무팀장 노 모 씨인 걸로 밝혀져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장혜란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손 회장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몸을 돌린 장혜란.

그녀는 남편에게 다시 한번 식사를 하라는 말만 남겨 놓고 실내 슬리퍼를 끌며 서재를 나섰다.

뉴스를 보는 동안 손 회장이 다이어리에 무의식적으로 끄적여 놓았던 낙서.

그 낙서의 시작엔 부경통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부경통신, 부경통신… 이걸 정말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손 회장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수일 전 미래금융과 함께할 공동 소송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며 정훈이가 찾아왔었다.

정훈이가 자신을 상대로 설득을 하는 동안, 손 회장은 부경통신의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정훈이의 자신감보다는, 그 방법이라면 부경통신을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에 큰 기대를 걸며 소송에 관한 모든 권한을 줬었다.

하지만 정훈이가 자신에게 설명했던 셈법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 이유를 묻자 정훈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었다.

“65 대 35. 우리 재경과 미래금융이 부경통신 58퍼센트 지분을 그 비율대로 나눠 가진다?”

“네.”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어째서 그걸 미래금융과 나눠 가지겠다는 거냐고. 만약 정말로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눌 게 아니라 다 가져와야지. 왜? 어차피 네 처가가 될 거니 결국은 네 몫으로 돌아올 거다, 이 생각이냐?”

진심은 그게 아니었지만, 어느새 그룹 안에서 그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져 버린 정훈이를 어느 정도는 눌러 줄 필요성이 있었다.

장남, 정태에 대한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식품에서 태영마트를 중간에 끼워 악착같이 부경마트를 물어뜯는가 싶었더니, 소리 없이 부경통신을 무너뜨릴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자신을 설득하러 찾아온 둘째.

지금껏 보여 준 결과물이 있었기에 보여 주고 있는 자신감까지 짓누를 수는 없었지만, 형제간에 하고 있는 경쟁에 있어서 만큼은 도리와 선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훈이는 손 회장이 하고 있는 그런 걱정, 염려까지도 부끄럽게 만들어 버렸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회장님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신가 보네요.”

“…뭐?”

“그 큰 덩어리를 미래금융과 안 나누면 누구하고 나눌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왜 나누냐고.”

“돈이 없잖아요.”

“생각하는 거 하고는. 나누겠다고 하는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야?”

“고작? 고작? 허, 허허… 금방 ‘고작 돈’이라고 하신 거예요?”

“이놈이….”

그 순간 손 회장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상대로 주눅이 들어 봤다.

엉겁결에 나온 사소한 말실수.

그 말실수를 재빠르게 지적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정훈이의 눈빛에서 아주 오래전 그 존재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진짜 통신을 업어 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분 매입에 필요한 자금은 내가 만들어 보마.”

“아니지요. 그런 기회를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 지금부터는 무조건 그 이상의 자금을 확보해 놓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죠. 비슷한 시기,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겠네요. 장선열 회장의 부경마트도 조만간 부도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마트부터 안전하게 우리 재경 속으로 담아 낸 다음, 부경유통을 반으로 쪼개기 위해 포기했던 화재 지분 12퍼센트를 장선동 회장에게 내놓으라고 하셔야죠.”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법을 가지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계산법.

아버지, 손중길 회장님의 계산 스타일이기도 해서 더 놀랐던 손홍준 회장이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장선동 회장에게 화학에서도 지분 12퍼센트 정도는 우리가 보험 삼아 확보를 하고 있어야겠다고 말을 해 보세요.”

“화학 지분?”

“네.”

“그걸 그 양반이 내놓을 거 같으냐?”

“안 내놓고 배길 거 같습니까? 유통이 다 막혀 있는데, 소송 관련해서 우리가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끌고 갈수록 부경이라는 이미지 자체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떨어질 거고, 지하로 꼬라박히는 게 어디 부경의 이미지뿐이겠냐고요. 부경화학의 주가 반토막. 시간문젭니다. 부도 이야기까지 나올 수도 있어요, 통신 상대로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작정하고 그쪽으로 흐르는 돈줄까지 막아 버리면.”

“…….”

“1조짜리 공동 소송. 통신뿐 아니라, 화학, 마트까지 부경의 모든 숨통을 우리 재경이 휘어잡게 되는 겁니다.”

“화학도 가져오자는 말이야.”

“굴뚝 장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거 아닙니까. 화학. 덩치에 비해 딱히 먹을 게 없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화학 지분도 확보를 해야 한다는 거야?”

“말씀드렸잖아요. 보험 삼아. 장선동 회장 정도는 그래도 살려 놔야 되지 않겠습니까?”

“살려 놔?”

“딱 25년 됐네요. 부경 쪽으로 우리 재경의 피 같은 계열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던 게. 그쪽에서도 우리 재경의 기본 사업 세 개는 남겨 주고 가져갔잖아요. 화학, 물산, 화재. 알아서 잘 한번 지켜 보라고 해 보죠. 그리고 똑같이 대우해 주세요. 지난 25년 세월 동안 부경에서 우리 재경을 대우한 그대로. 옆에 딱 붙여 놓고 더 크지도 못하고, 우리 재경의 그늘을 벗어나지도 못하게끔.”

“…….”

“다른 기업들을 상대로는 우리 재경의 사업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장선길 회장은 끝났어요. 건설부터 부도 신청 들어갈 겁니다. 옆에 같이 서 줄 만한 금융권도 지금은 워낙 상황이 안 좋으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텐데, 1조 소송 붙는 순간 멀어지는 거죠. 장선열 회장의 부경마트 역시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매각이 가능하겠습니까? 명분이 있는 우리 재경 말고는 아무리 헐값에 나와도 접근하는 쪽이 없을 겁니다. 결국은 부도 처리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봐야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냐, 아님 처음부터 여기까지 올 생각으로 부경마트 쪽으로 계속 공격을 퍼부었던 거냐.”

“왜 이 정도가 끝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시작이에요. 장선길, 장선열 회장은 운이 좋은 거예요. 그 집안 장남이 아니기 때문에 편하게 끝을 내 주는 거잖아요. 하지만 장선동 회장은 다르죠.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재경이 받은 수모, 똑같이 그만큼의 시간만큼 옆에 잡아 놓고 되돌려 줘야죠.”

“설마 소송에 관한 모든 권한을 너한테 달라고 한 게, 말이 소송이지 결국은 복수에 대한 권한을 달라는 말인 거냐?”

“복수, 복수… 흠… 그냥, 그렇게 부정적인 표현 말고, 우리 재경이 원래의 자리로 다시 올라설 수 있도록 제가 지금 최선을 다해 보고 싶어 한다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재경.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에요, 회장님.”

“…….”

“부경은 어떻게든 제대로 털고 가야 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꼼꼼하게 정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 정리 끝내 놓고 더 높게 뛰어올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름답지도 않은 복수가 우리의 최종 목적이어선 안 되는 거잖아요. 그 상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도 아니고.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데, 어떻게 한번 해 보라는 말을 안 할 수가 있으랴.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해 온 내용이며, 그간 정훈이가 식품으로 넘어가 만들어 보여 준 결과물들만 봐도 지금의 손 회장은 정훈이를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손 회장의 다이어리엔 다른 낙서들이 더 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끄적여 놓은 낙서에 손 회장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크게 놀랐다.

자신이 직접 끄적인 낙서의 내용.

부경마트를 업어 유통의 스너프에 붙인다.

그렇게 끄적여진 낙서 옆으로 아들 정태의 이름이 함께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엔 항공과 식품, 모직의 재경 그룹에 부경통신이 더해진 낙서가 끄적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둘째 정훈이의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자신이 그려 본 재경의 미래.

자신의 무의식중 재경 미래 중심에 어느새 정태보다는 정훈이가 한 발짝 더 다가가 있다는 걸 손 회장은 자신의 필체로 확인을 해 버린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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