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303)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원수경은 클럽 모임 자리에서 해당 기사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아 건성으로 확인만 하고, 손정훈과 장하늘의 뛰어난 처세를 칭찬하는 입장으로 분위기를 맞춰 냈다.

그 클럽 모임의 분위기가 그렇다.

속물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음에도 속물임을 숨기고 있는 여자들의 모임.

그럼에도 원수경은 반드시 그 모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도, 아들 승현이를 위해서도 반드시 잡고 있을 필요가 있는 모임.

그런 자리에서 손정훈, 장하늘의 기사에 눈에 띄는 반응을 보여 주는 건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재경의 맏며느리로서 보일 만한 처세가 아니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로열패밀리인 장하늘, 그리고 미래금융을 등에 업은 정훈이의 존재로 인해 자신과 남편의 위치가 계속해서 위협받고 있다는 기분으로부터 항상 불안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해당 기사를 확인했다.

“바로 집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운전기사의 물음에 성의 없는 손짓으로만 얼른 출발을 하라고 대답을 한 뒤, 기사에 집중했다.

복붙한 기사들이 약간씩의 사진 이미지만 달리해서 ‘페소나’, ‘채서린’, ‘재경’, ‘미래금융’이라는 검색어에 연동되어 가장 상단을 지켜 내고 있었다.

―배우 채서린이 페소나 시즌 위크 자리에서 재경식품 상무 손정훈(이미지 중간), 미래금융 장하늘 상무(이미지 좌)와 친분 과시

보는 이에 따라선 밋밋할 수도 있는, 하지만 미래금융 게이트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들에겐 무척 흥미롭고 자극적일 수 있는 기사 제목.

기사가 펼쳐지기 전 상단에 세 사람이 런웨이 자리에서 함께 찍힌 사진은 그저 연출이라고만 하기엔 너무나 자연스럽고 세 사람의 친분이 한눈에 느껴질 정도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중간에 끼어 있는 손정훈을 중심으로 양쪽의 장하늘과 채서린이 두 손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의 우정을 배려하기라도 하듯 중간에 끼인 손정훈은 시즌 위크 팸플릿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다리를 꼬아 앉아 있었다.

해당 기사 내용엔 세 사람의 친분 외에도 재경식품이 론칭을 준비 중인 스위트럼이 집중적으로 언급되며, 해당 브랜드에 채서린이 광고 모델을 하게 될 거란 내용으로 브랜드 관심도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배우 채서린이 재경식품 손정훈 상무와 미래금융 장하늘 상무와의 친분을 여과 없이 과시했다. 같은 연예계 안에서는 친한 동료는 많지만, 친구는 없는 거 같다며 솔직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밝혔던 채서린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날 배우 채서린은 페소나의 블랙 슈트에 카고 백을 맞춰 등장했다. 재경식품 손정훈 상무 역시 페소나의 리넨 크롭 재킷에 데님 팬츠 차림으로 댄디하면서도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미래금융의 장하늘 상무는 브라운 계열의 페소나 홀드 원피스로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연출이 돋보였다.

원수경은 스크롤을 빠르게 내렸다.

기사가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댓글이 2천 개 가까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심 부정적인 댓글로 도배가 되어 있기를 바라며, 댓글을 확인하려는 원수경의 눈에 베스트 댓글로 추천이 무려 300개를 넘겨 버린 장문이 들어왔다.

―이런 공간에서 댓글로라도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을 글로 남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 괜히 이런 글을 남겨서 손정훈 씨나 장하늘 씨에게 피해가 갈까 내심 걱정을 하면서도 그 두 사람에게 고마웠던 경험을 꼭 공유하고 싶어 용기를 내어 봅니다. 2년 전 대학을 다니며 이태원에 있는 한 루프톱 와인 바에서 서빙 알바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원수경이 보기에도 주작을 의심해 볼 만한 그 어떤 흔적이 없는 댓글이었다.

아이디는 그게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지식해 보일 수도 있는 본명을 아이디로 쓰고 있었고, 구체적인 상호명까지 사용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20대 중반, 나이가 많으면 30대 초반인 곳이었기에 고급 와인보다는 하우스 와인, 그중에서도 글라스 와인이 주로 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저 역시 와인을 공부한다는 느낌보다는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게 목적이었던 단순 알바였습니다.

한 커플이 와서 와인 리스트도 보지 않고 가게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고가의 와인을 주문하더군요. 제가 알바 일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문의를 받아 본 적이 없고, 과연 저런 고가의 와인이 팔리기나 할까 하는 생각에 전혀 공부를 안 해 봤던 와인이었습니다. 보통 고가의 와인은 알바생이 아닌 매니저가 직접 서비스를 하는데, 매니저를 불러 주겠다고 하는 저한테 손정훈 씨가 누구든 처음은 있다면서, 언제 해도 할 거라면 이번 기회에 직접 서비스를 해 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 그 고객이 재경과 미래금융의 손정훈, 장하늘 씨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너무 긴장이 된 나머지 서비스를 하는 도중 실수로 와인 잔을 건드려, 그 잔을 손정훈 씨 바지에 그대로 쏟아 버렸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죠. 그 한 잔이 제 주급과 맞먹는 가격이었거든요. 거기에 세탁비까지 동시에 생각을 해야 했죠.

그런데 손정훈 씨가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저한테 해당 와인 두 잔을 가져가서 맛을 보라고 했습니다. 한 잔은 지금 바로, 그리고 한 잔은 한 시간 뒤 충분한 산화가 일어났을 때. 어차피 둘이서 다 마시지도 못하는 와인이라며, 고급 와인 서비스가 처음이었던 절 위해 어느 정도는 남기고 갈 생각이었다면서 말이죠.

지금 저는 대학을 졸업해서 제 전공과는 무관한 와인 소믈리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때 더 수준 있는 고객들을 상대로 와인을 서비스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던 거 같습니다. 저에게 와인에 대해 너무 좋은 경험과 소믈리에로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신 손정훈 씨에게 비록, 이런 댓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그때 너무 감사했다는 말씀 꼭 전해 드리고 싶네요. 그동안 여러 안 좋은 일에 휘말려 있을 때, 부디 오해이길 바라며 묵묵히 뒤에서 응원을 했습니다. 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 예쁜 사랑 계속 이어 나가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워낙에 장문이었다.

해당 댓글을 확인하기 위해선 클릭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글을 다 읽은 후 기사 원본으로 돌아왔을 땐 해당 댓글의 좋아요와 대댓글이 훨씬 더 많아져 있었다.

대댓글 대부분도 손정훈의 매너 있는 행동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

손정훈, 손정훈….

정말 귀찮을 정도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름.

원수경은 손정훈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남편인 정태의 이름을 덮어 가고 있는 현 상황에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둘러 현재 집에서 승현이를 보고 있을 가사 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현이 일어났어요?”

―네, 30분 전에 일어나서 조금 전에 간식 먹이고 퍼즐 공부시키고 있는 중이에요.

“외출 준비 좀 시키세요.”

―지금 바로요?

“네. 20분 뒤에 도착해요. 승현이 데리고 본가에 갈 생각이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입혀서 기다리세요. 집에 수육거리 있어요?”

―어제 들어온 생고기는 있어요.

“그거도 쌈이랑 같이 준비 좀 하세요. 들고 가게.”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이번 부경통신 건으로 미래금융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는 시어머니, 장혜란.

지금 원수경에게는 장손주라고 하면 죽고 못 사는 시어머니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원수경은 속으로 생각을 했다.

남편까지도 이번 미래금융 게이트가 마무리되는 과정에 시어머니의 눈치를 상당히 많이 살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틈이 나면 어머니를 찾아가 시간을 같이 보내 달라는 당부를 했었고.

집안에서 벌써부터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기 시작하는 장하늘.

그런 장하늘과 손정훈의 결혼을 막을 재간은 없었지만, 장손주에 대한 시어머니의 마음을 붙잡아 둘 자신쯤은 얼마든지 있었다.

* * *

고성표 본부장실을 찾았다.

일전에 만남을 가졌던 정재현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우리 재경식품에서 일을 시작해 보고 싶다고 한다.

“서류 전형 챙겨서 내일 본사로 오라고 했으니까, 본부장님이 인사부장하고 같이 형식상 면접을 보는 걸로 하세요.”

“본부장님께서 따로 생각하고 계신 부서 배치가 있으실까요?”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떠오른 얼굴은 강인성 차장이었다.

“당분간은 제 차를 운전하게끔, 그렇게 만드세요.”

“본부장님 차를요?”

“뭘 그렇게 놀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부장님 차량입니다. 인적성 정도는 시간을 두고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확인 전혀 없이 부경통신에서 회장 차량을 잡았겠어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죠. 포장이 잘된 것뿐이지, 조직 차원에선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인사가 생기면 내외부적으로 말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고 정재현에게 제안을 하면서 왜 그런 부분에 대한 걱정이 없었겠나.

하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본부장님.”

침착하게 고성표 본부장을 불렀다.

그에 고 본부장은 입에 담긴 말을 어떻게든 목구멍 속으로 다시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요.”

“…….”

“이 정도 인사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닐까요? 제가 지금 재경에서 하고 있는 게 있는데 고작 제 차량 운전대를 잡을 운전기사 한 명 제 마음대로 뽑지 못한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어요? 제가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도 본부장님, 그리고 회사를 이해시키고, 일일이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겁니까?”

고개를 숙이며, 아니라고 대답을 하는 고 본부장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꼭 필요하겠다 싶어 고용을 하는 건데, 그 부분에 제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거냐고요. 그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아니라고 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 정도 자격, 특권도 못 누리면서 일만 하면 억울하잖아요. 저는 제가 원하는 걸 평가받겠다고 본부장님을 제 곁에 두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어떻게 제게 주든, 무조건 제 편에서 제가 원하는 걸 제가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그런 의미로 귀하게 모시고 있는 거예요.”

입술을 오물거리며, 자신의 걱정이 과했다는 걸 인정하듯 고 본부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본부장님도 그렇게 회사 일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고 만족시키기 이전에 본부장님이 원하는 일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도록.”

“…네.”

“그… 물감을 아껴서는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본부장님.”

“네?”

“나는 물감 짜는 걸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항상 좋은 그림만 그릴 수 있습니까? 그리다 보면 처음 생각했던 거랑 다른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선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는 거죠. 중요한 건 내가 계속해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가고 싶다는 거 아닐까요?”

“…….”

“강 차장. 요즘 많이 힘들 거예요. 아침, 저녁으로 저 태우고 왔다 갔다, 회사에 출근해서 업무는 또 업무대로 다 봐야 하고. 앞으로 잡혀 있는 론칭 브랜드들까지 다 고려한다면, 지금쯤 강 차장한테 직계 후임을 한 명 정도는 붙여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네, 그건 그렇죠.”

“정재현 씨. 제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어떻게 모든 인사가 완벽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아마 이번에도 제 눈이 맞을 겁니다. 틀림없이 잘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준비 좀 시켜 주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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