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어?
늦은 저녁, 재경항공의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네, 사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이 시간에 전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 싶어, 최대한 편하게 전화를 받아 주었다.
―회장님 모시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조금 전에 헤어졌습니다.
“그러셨어요? 식사 중에 제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부경통신 인수 건. 저희 항공에서 진행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룹 본사가 아닌, 항공으로 인수를 하겠다?
올 한 해 항공 쪽으로 잡힐 세금을 투자로 잠시 털어 내겠다는 계산인가?
나쁘지 않은 생각인 건 확실한데, 이걸 소송 건을 맡아 나가고 있는 나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항공 사장을 통해 내게 전달하는 이유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정태에 대한 홍준이 놈의 배려인가, 아님 나에게 주는 기회인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
나도 모르게 통화 중인 상태로 홍준이 놈이 만들어 낸 결정에 감탄을 했다.
제법이다.
그렇겠네.
그룹 본사가 아닌 항공으로 부경통신을 인수하면서 정태에 대한 배려와 나에게 기회를 주는 걸 동시해 해결하겠다는 계산이구나!
어차피 나는 식품 생활이 끝나는 대로 항공으로 옮겨 가야 한다.
반면에 정태는 이미 항공 생활을 했고.
내가 항공으로 옮겨 갈 때까지 통신을 항공으로 묶어 놓고, 내가 항공에서 통신까지 함께 경험을 해 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계산이라고 보였다.
그게 맞을 거다.
“혹시 인수 과정에서 저는 빠지라고 하시던가요?”
―직접적으로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저 항공에서 부경통신을 담을 수 있겠냐고만 물으셔서, 미래금융이 초반 지분 매입에 관한 투자를 약속한 상태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을 거 같다고 대답을 드렸더니, 저한테 진행을 해 보라고 하시네요.
이쯤에서 나는 빠져라?
하긴, 이미 다 끝난 거 계속해서 잡고 있는 게 보기에 좋지는 않지.
기특하네.
정말 제법이다.
두 아들의 상황이 얼추 비슷했더라면 아들 둘을 동시에 불러 놓고 잘한 놈에겐 상을, 못한 건 아니지만 눈에 띄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 놈에겐 자극을 줬을 테지만, 부경통신 지분 58퍼센트 매입에 미래금융이 초기 지분 매입 투자금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지금,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상황은 만들 수가 없었을 거다.
마트 사업을 스너프 쪽으로 붙일 때부터, 홍준이가 통신을 어떤 모습으로 가져오게끔 만들지 내심 궁금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고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회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면, 그렇게 해야죠.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현재 잡고 계신 소송 건은 제가 부경통신 쪽과 만나 어떻게 정리를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사장님이 하시면 안 되는 거죠. 자리에 사장님 혼자 나가시진 않을 거 아닙니까. 미래금융의 장영석 회장님과 함께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상무님 통해서 생각을 먼저 전해 듣고, 미래금융의 장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입니다.
“제가 직접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소송 건 부분은 사장님이 아닌 장영석 회장님이 무기로 쓸 수 있게끔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 주셔야 할 겁니다. 미래금융 게이트로 항공 역시 영업 손해가 나긴 했지만, 그 손해 규모가 스너프나 미래금융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손해 규모가 문제가 아니다.
항공 사장이야 어쨌거나 월급 사장인 것이고, 영석이는 자기 집안 사업이고 자기 집안 사업에 피해를 끼친 쪽을 상대하는 데 월급 사장이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있게 만드는 건 실례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런 뜻을 담아서 내 생각을 전달했다.
“회장님께 들으셨겠지만, 제가 괜히 1조를 부른 게 아닙니다. 오늘 자 기준으로 부경통신 시총이 3조 9천억까지 떨어졌어요.”
―네, 확인했습니다.
“사실상 여기에서 더 끌면 은행권이 부담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어요. 조정 자리에 금감위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니까, 소송 1조는 계속 유지를 하는 입장을 보여 주면서, 그쪽 반응에 따라 5천억을 손해 배상 합의금으로 제안을 해 보세요.”
―5천억이요?
“이미 회장님, 그리고 미래금융 쪽과는 이야기가 끝난 내용이에요. 절대 그 밑으로는 받아 주면 안 됩니다. 어차피 우리 아니면 업어 갈 사람도 없는 마당에 손해 배상 합의금 때문에 시간을 더 끌 수도 없을 겁니다.”
―…네. 회장님도 알고 계시는 내용이라고요?
“오늘 식사 자리에서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아뇨, 저한테는 상무님과 이야기를 해 보라는 말씀만 있으셨습니다.
그 자리에 항공 사장 말고도 다른 인물을 함께 동석시켰단 말이 되겠군.
“경영권 관련해서는 추후 미래금융과 조율을 하면 되는 부분이고, 당장은 장선길 회장 집안의 지분 58퍼센트만 가져오면 되는 겁니다. 그거 온돈 다 줄 필요 없잖아요. 손해 배상 합의금 5천억에 1조 2천 더 얹어 주겠다고 하세요.”
―비율적으로 현 시총에 58퍼센트면 우리 재경과 미래금융이 함께 제시해야 할 금액은 2조 2천억이 되어야 합니다.
“마트에서 정가 그대로 주고 라면 사는 거 아니잖아요. 현재 부경통신 상황에서 1조 2천 정도면 고민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그 고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한 쪽은 자기들이라는 것도 알 테고.”
―하지만 상무님 말씀대로 금감위에서도 참관을 하게 될 텐데,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시총 6조를 넘겼던 부경통신의 58퍼센트 지분을 1조 2천에 손해 배상 합의금 5천 포함에 1조 7천억에 가져오겠다고 하면 제재가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제재? 제재 같은 소리 하네.
“금감위에서 무슨 제재를 무슨 명분으로 할 수 있다고요? 부경통신 사태에 법조계 못지않게 자유롭지 못한 곳이 바로 금감위라는 거 잊지 마세요. 부경통신 쪽으로 7년 넘게 들어간 국가 보조금. 그 보조금 규모가 타 통신 3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거 이미 다 밝혀진 내용 아닙니까. 사업의 규모가 다른데, 어떻게 메인 통신 3사와 같은 수준의 국가 보조금을 계속 받아 올 수 있었겠어요?”
―…….
“부경통신은 소비자들을 상대로 사업을 했던 게 아니라, 그간 정권, 법조계, 금감위… 그런 정부 기관을 매수해서 소비자들의 지갑을 억지로 여는 사업을 했던 거예요. 인터넷 구축망을 무기 삼아서. 정부 기관에서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사람들. 결국은 공무원이에요. 그 사람들이 사업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알 것이고, 이번 사태에 자기들 스스로 어떠한 책임을 질 수 있을 거 같으세요? 없어요, 아무것도. 그 사람들은 책임 면피가 목적인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현 상황에서 자기네 책임을 최대한 빨리 희석시켜 줄 수 있는 우릴 상대로 제재를 해요?”
―…….
“제가 장영석 회장님을 만나서, 58퍼센트 지분에 1조 7천 부르면서 고용 승계는 없다는 카드를 던지라고 할 테니까, 사장님은 그 정도 선에서 장 회장님 지원을 할 수 있도록만 하세요. 지금 금감위는 부경통신 건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일 겁니다. 어떻게든 이번 사건이 빨리 마무리되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라고요. 거기에 우리가 고용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협상의 쟁점은 가격이 아니라 고용 승계로 맞춰지는 겁니다.”
“아….”
수화기 너머로 항공 사장이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거기에서 다시 5천억 정도 금감위가 인수 중도금 대출에 보증을 서 주겠단 약속을 하면 못 이긴 척 고용 승계를 약속하고 1조 7천억에 받아 오면 되는 겁니다. 어려울 거 하나 없어요. 이미 다 깔려 있는 판, 사장님이 부경통신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만 안 가지시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겁니다.”
최대한 가격을 깎아야만 장선길이와 그 가족들이 부경통신 주주들을 상대로 지불해야 할 손해 배상금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크게 올라간다.
현재 장선길은 우리 쪽 손해 배상 소송 말고도 회장이라는 위치에서 부경통신의 이름과 시스템, 자체 자금을 개인의 것인 양 함부로 남용했고, 그 결과 부경건설은 부도, 부경통신 쪽으로 막대한 금전적 피해, 기업 이미지 훼손의 손해를 입힌 내용으로 건설과 통신 주주들에게 단체 손해 배상 소송에 걸려 있는 상태.
더 이상 58퍼센트의 장선길 집안 지분은 그 집안의 재산이 아닌 것이고, 이 정도면 금전적 무로 돌아가게 만드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 * *
그렇게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 아침이었다.
지난주 수요일에 첫 출근을 했던 정재현이 인사부를 통해 기본적인 교육을 끝마치고 강인성 차장과 함께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정장이 훨씬 더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강 차장에게 물었다.
“전달할 내용은 다 전달을 해 놓은 상태죠?”
“네.”
“그럼 오늘 퇴근부터 정 과장님이 제 출퇴근을 도와주실 수 있게, 그렇게 하세요.”
강 차장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정 과장에게 농담 삼아 물었다.
“마침 또 이번 주에 파리에서 중요한 손님이 옵니다. 게스트 의전은 의전팀에서 담당을 하겠지만, 이번에 오시는 분이 스위트럼 론칭에 아주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분이라 제가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분이기도 해요.”
“네, 차장님 통해서 삐에르 에슈메 관련된 일정은 다 전달받았습니다.”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부경통신도 조만간 우리 재경 그룹에서 미래금융과 함께 인수 절차를 밟을 겁니다.”
“…네.”
“앞으로 제가 정 과장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게 될 거 같아요. 제가 정 과장님을 스카우트한 건 장선길 회장 차량의 운전대를 잡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경통신의 기획전략팀 과장이라는 이력 때문이에요.”
“네.”
“저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더 깊게 고민하는 편입니다.”
강 차장과 정 과장을 함께 쳐다보며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저랑 같이 일하시는 동안은 정 과장님도 그렇게 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우리 스스로 우리의 한계를 만들지 말자고요. 제가 고 본부장님 통해서 정 과장님한테 제 운전대를 맡겨 보라고 한 이유는 제 출퇴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저에게 부경통신과 현 통신업계에 대한 실제 현장감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주세요. 저도 정 과장님께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는 남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저랑 같이 일하는 걸 진짜 기회로 만드는 건 앞으로 정 과장님의 몫이겠죠. 지금 이 자리가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천천히 합시다, 천천히.”
강 차장과 정 과장을 돌려보내고 30분 정도나 흘렀을까?
서류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정태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너 혹시 민석이 형한테 나랑 만나 보라고 이야기한 적 있어?
장민석이?
이건 또 뭔 소리야?
뜬금없이 장민석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왜 나오는 거지?
“내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왜 장민석이한테 정태를 만나 보라고 했겠나.
―방금 전화가 와서 나한테 그러네. 마트 쪽 관련해서는 너보다는 나랑 이야기를 하는 게 빠르지 않겠냐며, 날 만나 보라고 했다고 그러던데?
아, 그걸 또 이런 식으로 말을 바꿀 수가 있는 놈이었지.
하여간 장민석이 이놈 이거, 웃긴 놈이다.
“그 인간은 도대체 왜 그런다는데?”
―그치? 아니지? 너 민석이 형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지?
“내가 왜? 아냐. 지난주 언제였지? 정확하게 기억도 안 난다. 나한테 전화가 와서는 같이 밥을 먹자는 거야. 자기 집사람 데리고 나올 테니까, 나한테는 하늘이도 같이 데리고 나오라면서. 뻔하잖아, 만나자고 하는 이유. 혹시 화학 쪽 생활 건강 상품들 유통 건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물어봤지.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래서 그건 나랑 만나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닌 거 같다, 정 급하면 스너프 쪽으로 직접 이야기를 해라, 그렇게 말한 게 전부였어.”
진짜 딱 그렇게 잘라서 이야기를 한 게 전부였다.
이미 홍준이가 장선동이 통해서 화학 지분과 화재 지분을 확보해 낸 상태인데 궁지로 더 몰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자기네들이 자발적으로 우리 밑으로 기어들어 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건데 관계 형성을 새로 할 필요는 없는 거고.
이번에 장선길이를 잡을 때 그 집 아들내미 장민규의 사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내게 건네준 일도 있고 해서, 너무 차갑지 않게,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겠다는 의미로 스너프 쪽을 찾아가 이야기를 꺼내면 스너프에서도 재고의 여지는 있을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게 전부였는데, 그걸 정태에게 내가 자리를 제안했다는 식으로 말을 바꿔 놓은 모양이지.
―그럼 그렇지. 나는 괜히 걱정이 돼서 전화해 본 거야.
“무슨 걱정.”
―민석이 형 혓바닥이 보통 뱀 같아야 말이지. 그 혓바닥에 얼굴은 또 좀 두껍냐고. 네가 알아서 다 잘하고 있고, 또 잘하겠지만 민석이 형하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는 마. 네가 날 만나 보라고 했다는 소리 듣고 깜짝 놀랐네.
“그 부분은 내가 관여할 내용이 아니지만, 어차피 우리 쪽에서 화학, 화재 지분까지 일정 부분 확보를 한 마당에 유통 쪽에서 어느 정도 판로를 만들어 주는 성의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냐?”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첫 관계에서부터 이렇게 짱구를 돌리면서 접근을 해 오면, 겁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어?”
정태 놈. 확실히 든든하다.
암.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 손 사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그동안 수고 많았다.
정말 별말 아니었는데, 정태가 한 그 말에 가슴 아래에서부터 묵직한 울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형이 이번에 너 하는 거 보고, 꽤 많은 걸 배웠어.
“뭐야, 낯간지럽게.”
―이런 낯간지러운 소릴 얼굴 맞대고 할 순 없잖아. 기특하다. 대단하고.
“적당히 해.”
―나도 딱 여기까지만 하려고 했어. 조만간 하늘이하고 다 같이 식사 자리 한번 만들자. 하늘이도 애 많이 썼는데, 최근엔 서로 바빠서 얼굴 볼 일이 전혀 없었네. 이번에 통신 인수 건만 잘 마무리되면 형이 자리 한번 만들게. 정엽이 형도 같이해서.
정태.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마음이 큰 녀석이다.
내가 불편해할 것을 알고 자기가 먼저 정엽이를 챙기려는 모습만 봐도 정태의 본결을 알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