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아침, 저녁으로 저한테 전화 주세요
홍준이가 장혜란이와 떨어져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장혜란이가 본가에서 따로 나와 다른 집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고 하는데, 그전까지 내게 그 관련된 이야기를 전달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정태의 연락이 없었다면 아마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그 소식을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이건 홍준이가 사람들 입단속을 단단하게 한 이유였다고 봐야지.
정태한테 듣기로 정태 역시 원수경이가 장혜란을 찾아갔다가 바로 전날 두 사람이 별거 중이라는 사실을 본가 집안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한다.
―전혀 모르고 있었어?
“아예 몰랐어.”
나도 살짝 당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제 어머니하고 먼저 통화를 하고 아버지한테도 전화로 확인을 했는데, 그냥 다투신 정도가 아닌 거 같아. 좀 심각한 거 같은데?
저녁에 본가로 오라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다.
장혜란이에 대해서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 따로 들은 이야기가 없냐고 물었더니 점심때 원수경이가 따로 장혜란이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어 본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저녁쯤 가 봐야 알 거 같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 내용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오전 내내 생각이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홍준이한테 전화를 걸어 봤지.
―그래, 저녁에 집으로 와. 같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역시나 통화상으로는 홍준이를 통해서도 별다른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다.
묻는 말에 계속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회사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니 집에서 이야기를 하자는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거다.
결국 홍준이의 음성이 너무 담담하기도 했고, 홍준이의 말대로 통화로 이야기를 할 내용은 아닌 거 같아 우선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던 중에 정태한테서 카톡 문자가 하나 들어왔는데, 오늘은 회사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본가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일정이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삐에르 에슈메의 사장 리안이 한국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오후 3시 55분에 인천 공항에 떨어지는 비행 일정.
따로 리안과 약속을 잡은 건 아니지만, 우리 쪽 성의를 보여 주기 위해 저녁 식사 자리를 준비시켜 놓은 상태였는데 취소를 하거나 모범태 전무를 대신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강 차장을 불러서 일정을 변경해야겠다고 말했다.
리안에게는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내가 직접 식사 자리를 대접하는 성의를 보여야 했기에 다른 일정을 확인하게 만들어서 가급적이면 리안의 한국 일정 안에 저녁 시간대로 날을 한번 잡아 보라고 했다.
“정 과장한테도 제가 바뀐 일정 따로 이야기 해 놓겠습니다.”
* * *
원수경.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맹랑한 구석이 있겠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5시가 조금 안 돼서 본가에 도착을 했다.
이미 정태 내외는 승현이까지 같이해서 먼저 도착을 해 있는 상태였다.
아직 홍준이는 집에 없었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확실히 장혜란이가 없는 집안 분위기는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원수경이는 언제나 그렇듯 앞치마 차림으로 가사 도우미들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하다가 내가 들어오자 잠시 밖으로 나와서 인사 정도만 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정태는 소파 자리에서 승현이와 놀아 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안 본 사이에 승현이가 꽤 많이 컸다는 생각.
얼른 정태에게서 승현이를 받아 무릎 위로 앉혀 놓고, 그동안 말이 얼마나 늘었는지 말을 시켜 보고 있을 때였다.
“이건 뭐야? 이건? 오, 그래, 그래, 그래….”
확실히 사내놈이 돼서 그런지, 곧 두 돌인데 아직 말문이 잘 안 트이고 있었다.
천천히 트일 때가 되면 트이겠지…라는 생각으로 불확실한 발음으로 뜻도 의미도 없는 소릴 계속 옹알옹알거리는 승현이의 말을 따라 해 주고 있었는데, 앞치마를 벗어 곱게 접으며 원수경이가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평소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장혜란이가 주로 앉는 소파 자리에 털썩하고 앉는 거였다.
솔직히 살짝 놀랐다.
항상 홍준이가 앉는 소파 자리는 당연하게도 상석 1인 소파.
그 양옆으로 2인 소파와 4인 소파가 마주 보게 위치해 있다.
주로 장혜란이가 앉는 자리는 그 2인 소파다.
소파 자리에 이름을 써 놓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어디에 누가 앉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 내용이겠냐만 온 가족이 모일 땐 가급적 소파 쪽으로는 오지도 않던 원수경이가 본래 시어머니, 그러니까 본가의 안주인 자리로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털썩하고 앉는다는 게 어딘가 모르게 내 눈에는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거실 정중앙, 이 집안의 최고 어른이 항상 앉는 상석 소파에 앉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 맞은편으로는 나와 정태가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으니 마주 보고 앉겠다고 그 자리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집엔 홍준이까지 아직 퇴근을 하고 와 있는 게 아니니까, 빈자리 아무 데나 앉을 수 있지.
그런데 잠시 후 본가의 모든 집안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함씨라는 사람이 자리로 온다.
50대 중반의 여자다.
정원 관리부터 시작해서 보안 부분, 식사, 청소… 모든 부분을 사람들을 시켜 총괄 관리를 하는 사람인데, 본가 일을 20년 가까이 해온 걸로 알고 있다.
그만큼 이 집안에 관해선 우리 집안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봐야지.
이 공간 안에서 생활해 온 시간이 홍준이, 장혜란보다 더 많을 거 아닌가.
함씨한테는 이 공간이 자신의 일터일 뿐 아니라 삶 그 자체일 테니.
더군다나 결혼도 안 했고, 그래서 가족이 없어 이 집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함씨를 곁에 앉혀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앞에 세워 놓고 벌써부터 자기가 이 본가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양 이것저것 지시를 하는 걸 보고 속으로 조금 움찔했다.
왜 저러지?
백번 양보를 해서 원수경이도 이 집안사람이고, 또 맏며느리가 되다 보니까 안주인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자신이 그에 대한 자기 역할을 해 보겠다고 저러는 걸 수도 있다.
자기가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런데 그걸 자기보다 스무 살 이상 연배인 사람을, 마치 뭘 잘못한 게 있는 사람인 양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서 있게 만들어 놓고 이것저것 지적을 하는 모습이 내 눈에는 썩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동안 항상 한발 뒤로 물러서 있고,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냥하기만 했던 원수경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내가 더 크게 당황을 한 걸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나보다 정태 내외가 더 빨리 도착을 하지 않았나.
장혜란이라는 안주인이 없는 상태의 집안 꼴이 엉망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까지 억지로 해 봤다.
왜?
그래야만 날 당황하게 만드는 원수경이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보일 테니까.
집에 무서운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만 있다 보니 평상시 해야 하는 일들이 제대로 안 되어 있었고, 그걸 나보다 먼저 도착한 정태 내외가 발견하고 따끔하게 지적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도대체 최근 며칠 동안 낮에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아주머니들끼리 뭐 하시는 거예요?”
“저희는 항상 평소 하던 대로….”
“혹시 냉장고 열어 보셨어요?”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냉장고 열어 봤냐고. 왜 대답을 듣겠다는 사람한테 대답을 하게 만들어요? 열어 봤어요, 안 열어 봤어요?”
정태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 기분일 수도 있는데, 정태도 당황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얼른 소파 아래로 정태의 허벅지를 누르며, 가만히 있어 보라는 신호를 준 뒤 최대한 해당 대화에 신경을 안 쓰는 척 승현이와 놀아 주는 연기를 했다.
“어머님이 집을 비우신 지 사흘째죠?”
“…네.”
“그동안 회장님 아침, 저녁 식사는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아침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전날 저녁에 내일 아침은 뭘로 준비를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준비를 했고 저녁 같은 경우는 항상 가볍게 드시기 때문에 따로 메뉴에 관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평소 즐기시는 반찬들 위주로 준비를 했어요.”
“제가 지금 아주머니한테 개인적으로 아주 섭섭하고, 배신감까지 드는 거 알아요?”
“…….”
“제가 어제 집에 안 와 봤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니, 어떻게 집에 회장님 혼자 지내시는데 저한테 전화 한 통을 안 해 주실 수 있어요? 제 전화번호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누가 지금 진짜 제 번호 아느냐고 물었겠어요? 아는 그 번호로 왜 전화 한 통 안 해 줬냐고. 그걸 묻는 거잖아요.”
“아이고, 작은 사모님. 섭섭하다고 하시니까, 죄송하고 또 마음이 안 좋은데 저희가 뭘 어쩌겠어요. 회장님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제가 어제 다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래도 했어야죠, 저한테는.”
와… 헷갈리네.
평소 보지 못했던 원수경이의 모습이라 당혹스럽긴 했는데, 또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안주인이 없는 집안 살림을 총괄해야 할 사람을 상대로 일부로라도 긴장감을 주기 위해 저러는 건가… 하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요즘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대로 싸…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한마디가 원수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평소에 저를 얼마나 편하게 생각을 했으면 그랬겠어요?”
“작은 사모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맞잖아요. 아무리 회장님이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말라고 했어도, 저한테는 이야기를 했어야죠. 저 본가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오잖아요. 그정도 융통성도 없냐고요. 설마하니 회장님께서 자식들한테까지 이걸 계속 비밀로 가져갈 생각으로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거였겠어요?”
바로 그때 결국 정태가 인상을 찡그리며 원수경에게 한마디 했다.
“그만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끼어들면 내 입장이 뭐가 돼?”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원수경이 정태에게 말했다.
“내가 아주머니들한테 싫은 소릴 항상 하는 사람이야? 아니잖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어머님 안 계시는 동안 하루 종일 빈집에서 자기들끼리 얼마나 편하고 좋았을 거야?”
정태가 다시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 난 또 한 번 소파 아래로 정태의 허박지를 눌렀다.
정말 억울하다는 듯, 반 울상이 되어 있는 함씨를 상대로 원수경이 말했다.
“내일부터 아침, 저녁으로 저한테 전화 주세요. 저도 이틀에 한 번씩은 찾아와서 확인을 할 테니까.”
“네.”
원수경이의 행동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게, 과연 지금 내가 이 시대 사람들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해서인 것일까?
그렇지 않은가.
이게 어디 자기 입장에선 시숙인 사람 앞에서 보일 만한 행동이란 말인가?
어디 집안 살림에 관한 내용을 남편, 시숙 앞에서 저렇게 크게 문제 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지?
우리 땐 이런 상황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안 써 주는 것도 아니고, 몇 명이나 붙여 줬으면 지가 알아서 해야지.
이렇게까지 지가 앞으로 나와 책임감 있게 뭘 해 볼 생각이라면 말이다.
어디 감히 집안 문제로 형제가 모인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더 크게 높혀?
버릇 없이.
자기가 어디 밖에 나가서 일을 하나, 아님 집안 사업에 참여를 하나.
집에서 애만 키우고, 그 애도 대신 키워 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붙어 있는데, 고작 이만한 내용을 가지고 남편, 시숙 앞에서 큰소리를 낸다고?
아직, 나와 지 남편은 부경과의 관계로 매일매일이 전쟁인데?
바깥 전쟁을 하고 와, 집안 전쟁까지 눈으로 봐야 하는 건가?
이런 시답지 않은 내용의 전쟁을?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이건 좀 아닌 거 아닌가?
이거 지금 설마… 내 앞에서 지금부터 우리 손씨 집안의 안주인은 자기라는 걸 어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가 그동안 정태의 짝으로 자기를 얼마나 좋게 봐 오고 있었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