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지부터 물어봐
“번거롭겠지만, 앞으로는 너희가 따로 시간을 더 만들어서 네들 엄마도 들여다보고 그렇게 해라.”
내가 마음이 안 좋았던 건, 홍준이 놈이 너무 담담하게 장혜란이와의 관계를 자식들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못 할 거 같다.
이 시대에 대한 공부, 그리고 적응을 곧잘 해냈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식들 앞에서 부모로서의 체면을 포기할 자신까지는 아직 생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홍준이는 담담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수순을 준비해 오고 있었던 사람처럼.
별거? 물론 할 수 있지.
이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다.
하물며 사업으로 맺어진 관계였고, 그 관계를 오랜 세월 마지못해 유지해 나가야 했던 거라면 더는 아쉬울 게 없을 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그 결혼을 내가 시켰다는 거.
그리고 내가 만들어 준 선택으로 인해 홍준이의 삶 절반 이상이 억지가 되었다는 거.
그 억지 속에서도 어떻게든 재경을 지켜 내기 위해 버텨 왔다는 거.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가슴을 무겁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나이 먹고 이혼 소리 나오게 만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뭐 좋은 내용이라고, 이런 내용으로 다시 또 세상 시끄럽게 만들어? 누구 좋으라고.”
자식들 나이가 있는데, 그런 거 하나 이해를 못 하겠나.
그런 거 하나 애비 감정 이해를 못 해서 징징댄다면, 그게 더 나잇값을 못 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봤을 땐 정태도 걱정을 하는 거지, 걱정이라는 감정 외엔 별다른 감정이 없는 거 같았다.
“그동안 나 없을 때 수경이 네가 한 번씩 집에 와서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했다는 거 안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 없다.”
꼭 죄인이 된 것만 같아서, 나는 그냥 말없이 쉬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을 했다.
“네 시어머니가 여기 있을 때는 몰라도 이젠 없잖아. 참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사람 있는데 찾아가. 찾아가서 그동안 해 왔던 거처럼 같이 시간도 보내 주고, 승현이 얼굴도 종종 보여 주고 그렇게 해.”
“하지만 아버님.”
“이 나이엔 사생활이 없겠냐.”
“…….”
“손주 본 할아버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 없을 거 같아? 지금부터 이 집은 오로지 내 공간이다. 그동안이야 함께 사는 사람이 있어 많은 부분 양보도 해야 했고, 맞추기도 해야 했지만, 지금부터는 회사 일 외적으로는 오로지 내 시간만을 좀 가져 보고 싶구나. 도와줘, 너희들이. 가족들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정태하고 정훈이야 회사에서 계속 볼 거고, 우리 손주 크는 거 보는 거야 매일 보내 주는 사진이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다.”
정태가 조심히 물었다.
“그냥… 다른 거 없이 따로 지내기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 같더구나. 네들 엄마 생각도 그렇고. 이 나이에 서로가 따로 새 출발을 할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자식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편한 건 아니다.”
“…….”
“밥 먹자. 궁금한 거 많겠지만, 다들 오늘은 좀 참아. 내가 요즘 생각할 게 많다. 이런 걸로 내가 식탁 위에서 너희들 눈치까지 보고 싶지는 않아. 얼른 밥들 떠. 수경아.”
“네, 아버님.”
“아줌마들 들어오라고 해. 크게 조심할 내용도 없는데, 왜 다 내보냈어? 국 식었다. 이거 좀 새로 떠 오라고 해.”
“제가 새로 드릴게요. 저 주세요.”
* * *
자식들이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서재로 위스키 한 잔을 들고 들어간 손홍준 회장은 함씨를 안으로 불렀다.
이 집 안에서 들어가는 게 가장 조심스러운 공간.
청소 확인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따로 들어올 일이 없는 이 공간 안에서 손홍준 회장과 단둘이 함께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앉아요, 편하게.”
“…네.”
손 회장의 손가락 사이엔 불이 붙은 담배 한 개피가 아주 자연스럽게 끼워져 있었다.
“오늘 애들 집에 언제 왔어요?”
"작은 사모님은 저녁 준비 직접 하신다고 3시 조금 넘어서 승현이 데리고 먼저 오셨고, 사장님하고 상무님은 5시 전후로 거의 비슷하게 도착하셨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오래 같이 살면서도 따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나랑은 거의 없지?”
“…네, 그렇죠.”
“애들 엄마가 집에 있는 상태로 상주를 하면서 같이 지내는 거 하고, 없는 상태에서 남자만 혼자 사는 집에 여자가 같이 지내는 게 밖에서 보기엔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겠는 거야. 내가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어. 그래서 잠깐 이야기 좀 나누자고 한 거예요.”
“…….”
“어쨌거나 20년 넘게 우리 집 일을 봐주고 있잖아. 그럼 거의 가족이라고 봐야지.”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 손을 내저으며 손 회장이 말했다.
“으으음. 평상시에도 애들 엄마가 함씨를 얼마나 믿고 집안일을 다 맡겼어요? 워낙에 잘해 주고 하니까 내가 따로 할 말이 없어서 그랬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회장님.”
“함씨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70년생입니다.”
“아이고, 함씨도 이제 나이가 제법 되네.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진주댁이었지? 눈 밑에 여기 큰 점 있었던 아주머니.”
“네.”
“진주댁 소개로 우리 집에 왔던 거죠?”
“네, 맞습니다.”
“그래, 기억이 난다. 그 진주댁이 나랑 애들 엄마가 결혼해서 살림을 합칠 때 애들 외할아버지 집에서 같이 넘어왔던 거거든.”
“…네, 저도 그랬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 진주댁 소개로 우리 집 일 시작해서 20년 훌쩍 넘게 같이해 주고 있다는 게 내 입장에선 고맙기도 하고, 또 지금처럼 애들 엄마하고 따로 지내는 상황에선 조심스럽기도 해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죠?”
“…네.”
손 회장은 재떨이 속으로 담뱃재를 털어 놓고, 이내 이야기를 끝내고 새로 피우자는 생각으로 아직 반쯤 남은 담배를 비벼 껐다.
대신 위스키 한 모금으로 심심한 입을 달랬다.
“혹시 애들 엄마하고 따로 연락하고 지내거나, 아님 연락을 받았다거나 그런 적 있어요? 그 사람 나가고 난 뒤에.”
마주 보고 앉아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거짓말을 할 엄두도 안 났고, 자신이 왜 이런 남의 집안 사정에 중간에 끼어 불편함을 유지해야 할까 싶어 함씨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했다.
“네, 하루 한 번씩은 전화가 오셨습니다.”
“그래요?”
“네.”
“뭐 필요한 게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제야 함씨는 요 며칠 자신이 상당히 불편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며,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별 내용 없으셨어요. 첫날은 집에 누가 찾아온 적이 있었느냐면서, 누가 찾아오면 누가 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분위기 봐서 들어 봐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동안 따로 집에 누굴 들인 적은 없었으니. 혹시 오늘 집에 애들 왔다는 것도 알고 있나?”
“아실 겁니다. 제가 전화를 넣은 건 아니고, 작은 사모님께서 식사 준비를 하시는 동안 통화를 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그럼 함씨도 조금 있다가 따로 전화를 해 줘야겠네?”
“…….”
“그럼 내가 함씨를 계속 이 집에 있게 할 수가 있겠어요?”
“어후, 죄송해요, 회장님. 그런데 너무 어렵네요.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까는 작은 사모님도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하라고 하시고.”
“승현이 애미가 함씨한테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달라고 했다고?”
“네, 그러셨어요.”
“왜?”
“그야 저도 모르죠.”
손홍준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어떻게든 며느리의 그런 행동을 좋은 쪽으로 이해를 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랑 같이 이 집에서 지내는 거 앞으로도 안 불편하겠어요?”
“제가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회장님.”
“나도 그래. 나도 지금까지 집안일을 해 주던 사람들이 계속 그대로 같이해 주면 좋겠어. 그런데 함씨가 계속 애들 엄마하고 연락을 하고 지내면 그때부턴 불편해지는 거지.”
“…….”
“항상 뭐가 바뀌고 정신없는 건 회사 일만으로도 충분하거든. 집에선 사람이 마음 편히 쉬어야지, 안 그래?”
“…네.”
“내 집에서 내가 함씨 눈치를 봐야 하나?”
“말도 안 됩니다, 회장님.”
“그렇지. 그건 말이 안 되지. 애들 엄마가 이 집에 올 일은 앞으로 영영 없어. 쓸데없는 걱정 같은 거 할 필요 없다고. 그리고 승현이 애미가 해 달라는 건 일단은 해 줘요. 그건 내가 함씨 입장 안 곤란해지게끔 알아서 이야기를 잘해 놓을 테니까. 함씨가 지금 얼마 받고 있지? 미안해요. 내가 몰라.”
“700만 원 받고 있습니다.”
손홍준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인중 주위를 긁적였다.
“내가 따로 명절 떡값, 생일 용돈 같은 걸 챙겨 줄 정신은 없을 거 같고, 지금 받고 있는 데서 매달 300씩 더 챙겨 줄 테니까 내가 이 집 일에 아무 신경 안 써도 되게끔, 지금껏 해 왔던 것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해 줄 수 있겠어?”
“아닙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 그렇게 확실하게 선을 그어 주신 것만 해도 저는 한결 마음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보수는 지금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함씨 좋으라고 더 챙겨 주겠다는 게 아냐. 내 마음 편하겠다고 그러는 거지. 앞으로 이 집 안에서만큼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가질 거야. 혼자 이 집안에 관련된 일을 다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아줌마들 관리까지 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걸 도와주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도와줄 수 있겠어요?”
“네, 그럼요. 제가 다른 아주머니들까지도 잘 챙기겠습니다.”
“보안업체부터 좀 바꿔야 하지 않겠어?"
"내일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요. 내일 아침은 시원하게 콩나물국을 준비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요.”
* * *
다음 날.
손 회장은 아침부터 스너프 손정태 사장을 그룹 본사로 호출했다.
부경마트 인수와 관련해서 앞으로 스너프의 사업 방향에 관해 물었고, 벌써부터 구체적인 매출 상승 방안을 구체화시켜 낸 부분에 대해선 아낌없는 칭찬과 응원을 보내 주었다.
10시부터 점심때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스너프의 사업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었을 때 손 회장은 아들에게 넌지시 승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너희들 가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까, 어제 내가 승현이를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했더라.”
“그러셨어요? 저도 어젠 정신이 없어서 거기까지는 미처 챙기지를 못했네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음… 점심을 먹어야 할 거 아니냐.”
“네, 해야죠. 뭐 드시겠어요, 아버지.”
“어디 보자… 애가 있으니까 밖에서 먹는 건 수경이가 준비해야 될 게 많을 거고, 수경이한테 전화 한 통 해 봐라.”
“집사람한테요?”
“어. 내가 요 며칠 생각이 많다. 너희들한테 내가 그간 너무 무심했던 거 같아. 결혼해서 네 가정 꾸린 게 벌써 몇 년인데, 아직 너 사는 데도 내가 한 번 안 가 봤더라.”
“지금… 저희 집에 가자는 말씀이세요?”
“뭘 그렇게 놀라냐? 왜? 이 애비한테 보여 주면 안 되는 거라도 집에 숨겨 놓고 사는 거야? 허허.”
정태도 함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동안 한 번도 제가 사는 집에 가 보잔 말씀을 안 하셨던 분이 갑자기 그러시니까 그러는 거죠.”
“수경이한테 괜찮은지부터 물어봐. 불편할 거 같으면 다음에 해도 괜찮다.”
“아니에요. 아버지가 아들 집에 오시겠다는데 불편할 게 어딨어요? 그렇게 하세요. 제가 지금 집사람한테 말해서 아주머니들 시켜 식사 준비하라고 말할게요. 아버지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그냥 평소 먹는 대로 준비하라고 해. 어디 내가 아들 집에 밥 얻어먹겠다고 가자는 거냐, 자주 보지도 못하는 손주 놈 잠깐 안아 보러 가겠다는 거지. 혹시라도 수경이가 불편해하는 기색 보이면, 억지로 하지 말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런 부분은 서로 존중하고, 조심해 줘야 하는 거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