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1/303)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거냐?

유력 재계 며느리들과 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원수경에게 남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정태는 원수경에게 승현이의 다정한 아빠이기 이전에 수월한 남편이었다.

밖에선 소시오패스라는 별명을 얻고 다닐 정도로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집에서는 더없이 가정적인 사람.

딱히 챙겨 줘야 할 것도 없다.

자신에게 크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하지만 출근을 하면 회사 일 외에 다른 곳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게 원수경으로 하여금 수월한 남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 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원수경은 이 시간에 남편의 전화를 받는 게 익숙치가 않았다.

혹시라도 갑작스러운 출장이 잡힌 걸까?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하다.

원수경은 함께 자리한 다른 사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 무슨 일이야?”

도대체 왜 그랬을까.

평소와 다를 게 전혀 없었던 일상.

평소엔 절대 이 시간에 걸려 올 일이 없었던 남편의 전화 한 통이 원수경의 고급스러운 일상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이제 먹어야지.”

승현이를 가사 도우미들에게 맡겨 놓고 클럽 모임에 나와 있는 지금.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자신이 이런 모임을 쫓아다니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남편이었기에 원수경은 스스로의 거짓말을 계속 키워 내고 있었다.

―승현이는?

“승현이? 스, 승현이는… 먹었어. 이제 곧 재워야지.”

―바로 재워?

“아니, 소화 좀 시키게 만든 다음에 재운다고. 그런데 당신이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혹시 급하게 출장이라도 잡힌 거야?”

솔직하게 말을 해야 했다.

꼭 재계 며느리들 클럽 모임에 나왔단 말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급한 볼일이 있어서 가사 도우미들에게 잠시 승현이를 맡겨 놓고 집 앞에 나와 있는 중이라는 식으로라도, 최대한 진실과 가깝게 이야기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원수경은 괜히 남편에게 이상한 트집을 잡힐 것이 피곤해서, 잔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툭 하고 내뱉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금 아버지 모시고 집에 갈 거야.

원수경은 언뜻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 어디 집?”

―어디 집은 무슨 어디 집이야? 우리 집이지.

“우, 우리 집?”

그리고 철렁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그러시네. 지금까지 우리 사는 데 한 번도 안 들여다보신 거 같다고. 아주머니들한테 이야기해서 평소 먹는 거에 반찬 몇 개만 더 준비를 해.

“아니, 잠깐만. 여보.”

원수경은 정신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사실은 집이 아니라 밖에 나와 있는 중이라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맞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 왜 거짓말을 했냐고 남편이 자신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원수경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보다는 거짓말이 먼저 툭 하고 튀어나와 버렸다.

“지금 집 엉망이야.”

―그럼 좀 치워. 뭐가 문제야? 당신 혼자 다 준비하라는 것도 아니고, 아주머니가 몇 명인데 내가 당신한테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돼?

“아니, 집에 오실 거면 미리 말씀이라도 좀 해 주시든가.”

―지금 뭐 하냐?

남편의 목소리엔 원수경으로 하여금 노이로제를 일으키게 만드는 차디찬 불쾌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뭐, 뭐가?”

―당신 방금 말하는 목소리 상당히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알고 있어?

”아냐. 짜증은 무슨.”

―왜 그래, 사람 섭섭하게. 내가 지금 집에 못 데려갈 사람을 데리고 가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건 내가 할 소리고.

“아니, 나는 지금 집도 엉망이고 아버님 대접하기에 반찬도 마땅치 않은데 미리 말도 안 해 주고 갑자기 모시고 온다니까 하는 말이지.”

원수경은 지금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임에도,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낸 상대에 대한 짜증이 갑자기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짜증도 곧이어 터져 나오는 남편의 속에 담긴 말로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장모님은 간만에 내가 늦잠 좀 자겠다고 하는 주말에 아침부터 불쑥불쑥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고 언제든 마음대로 오셔도 괜찮고, 우리 아버지는 내가 직접 모시고 가는 건데, 그것도 안 돼? 내가 장모님 그러시는 걸로 당신한테 한 번이라도 뭐라고 한 적 있어?

“우리 엄마랑, 아버님이 같아?”

―뭐가 다른데?

“우리 엄마는 와서 승현이라도 봐주시잖아.”

―당신 지금 이거 진심 아니지? 뭐 하는 거야? 이거 뭐지 진짜? 여보.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내가 지금 말하는 중이잖아.

원수경은 자기가 생각을 해 봐도 스스로 상황을 점점 악화시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수월한 남편의 심기까지 자신이 하고 있는 당황으로 인해 건드려 버렸다.

―지금 우리 사는 집, 그거 누가 해 준 거야. 장모님이 해 주신 거야? 아냐, 우리 아버지가 해 주신 거야.

“정말 왜 그래? 그런 걸 왜 따져? 알았다고, 내가 실수했다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님이 오신다는데 내 입장에선 한 끼를 대접하더라도 제대로 대접하고 싶지, 아무렇게나 하고 싶겠냐고.”

―그럼 처음부터 말을 좀 그렇게 하든가.

“미안해, 미안해.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여기 그룹 본사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룹 본사에서 집까지 걸리는 시간.

아무리 막혀도 20분.

원수경은 눈앞이 캄캄했다.

현재 자신이 있는 호텔이 그룹 본사에서 집까지의 거리보다 최소 10분 이상은 더 나오는 거리다.

“아버님 뭐 드시고 싶으신지 여쭤봤어?”

―그냥 평소 우리 먹는 거에서 반찬 한두 개 정도만 더 신경 써.

“일단 알겠어.”

남편과 통화를 서둘러 끊은 원수경은 먼저 집안일을 봐주고 있는 가사 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이따가 회장님이 집에 오실 거예요. 승현이 아빠랑 같이요.”

―네? 회장님이요?

“집 상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실 거라고 하니까 신경 좀 써요. 그리고 나는 집에 있었던 걸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계속 집에서 승현이 보다가, 회장님이 점심 드시러 온다는 소리 듣고 급하게 마트에 간 걸로 그렇게 대충 둘러대라고요. 아무래도 내가 더 늦게 도착할 거 같으니까. 불판 준비해 놓으세요. 내가 가는 길에 소고기 좀 사서 갈 테니까. 집에 쌈은 있죠?”

―고기도 있어요, 사모님. 며칠 전에 선물 들어온 거 있잖아요.

“아, 누가 그걸 몰라요! 사서 들어가야 내가 마트에 간 게 될 거 아니겠냐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야, 진짜. 시간도 없어 죽겠구만, 왜 계속 사람 말을 시켜요?”

―아, 네. 죄송해요.

“승현이는 점심 먹였죠?”

―아뇨, 아직이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 애 점심도 안 먹였어요?”

―사모님께서 딱 12시 되면 챙겨 먹이라고….

“토 달지 좀 말고. 얼른 먹이고, 재워요.”

* * *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도착한 정태는 현관문을 열기 전과 비교해 표정이 급하게 굳어졌다.

당연히 현관까지 나와서 인사를 할 줄 알았던 아내, 원수경의 모습을 집 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통화를 할 때엔 점심을 먹이고 재울 거라고 했던 승현이가, 아직까지 밥을 먹고 있었다.

식탁형 베이비 체어 상판 곳곳에 음식물을 어질러 놓으면서.

그래도 아기이니까.

워낙 초 단위로 하고 싶은 게 바뀌고, 자기가 밥을 먹었으면서도 누가 뭘 먹으면 또다시 먹겠다고 하는 아기이니까.

그 부분에선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었지만, 집 안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뭔가가 이상했다.

아버지가 집에 오셨기 때문일까?

승현이에게 밥을 먹이는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아주머니들 모두가 주방에서 바깥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거였다.

“아버지, 잠시만 좀 앉아 계세요.”

“그래, 천천히 해라. 근데 수경이는 어디 갔어? 왜 안 보여?”

“제가 한번 아주머니들한테 물어볼게요.”

정태는 본인이 더 궁금했기에 주방 안으로 들어가 긴장한 표정으로 식사 준비에 한창인 아주머니 한 명을 붙잡고 물어봤다.

“승현이 엄마 어디 갔어요?”

“아, 저기, 사모님 지금… 그 마트에 고기. 고기 사러 금방 나가셨어요. 바로 오실 거예요.”

“고기요?”

“회장님 오신다고, 고기를 굽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들이 하는 어설픈 거짓말 정도도 눈치를 못 챌 정태가 아니었다.

특히 자신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기가 무섭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정태는 지금 이 아주머니들이 원수경을 위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지금 집엔 아버지가 와 계신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주방을 나서기 전 정태는 냉장고 냉동실 문을 직접 열어 봤다.

“무슨 고기를… 사러 갔다는 거예요? 집에 좋은 고기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오신다고 하니까, 냉동보다는….”

거짓말을 더해 가던 아주머니 한 명은 입을 꼭 다문채 코로 숨을 몰아쉬는 정태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으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 아주머니를 향해 정태가 차갑게 말했다.

“일단 아버지 드시게 차부터 한 잔 준비하세요.”

“네.”

“승현이는 점심을 지금 먹는 거예요?”

“네.”

“지금 먹는 거다, 이 말이죠?”

“…네.”

“알겠어요. 식사 준비 계속하세요.”

정태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만큼,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거에도 능숙했다.

비록 그 상대가 자신의 아버지일지라도.

주방에서 나온 정태는 아버지가 드실 차를 직접 가지고 나와 앞으로 내려놓으며 실실거렸다.

“참 유난이네요.”

“뭐가?”

“아버지 오신다고 급하게 고기를 사러 나갔대요. 주말 말고는 제가 점심을 집에서 안 먹잖아요. 제가 없을 땐 자기들끼리 그냥 간단하게 먹나 봐요. 오늘도 그렇게 할 생각으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다가, 하하하… 부랴부랴 아버지 오신단 연락 받고 마트에 좋은 고기 사 오겠다고 뛰쳐나간 모양이에요.”

“너는 도대체 말을 뭘 어떻게 전한 거야? 그냥 승현이 잠깐 보고 그렇게 가겠다니까.”

“애 엄마 입장에선 또 그런 게 아닌가 봐요. 아버지가 어디 자주나 오십니까?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이런 거 보면 네 말대로 수경이도 참 극성은 극성이야.”

그리고 얼마 뒤 홈 인터폰에서 등록 차량이 입차를 했다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원수경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정태는 속으로 근본을 알 수 없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은근히 돌아 있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K―장남 기질을 정태 역시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니까 참아야 된다.

웃어야 된다.

어떻게든 화목한 가정임을 보여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쓸데없는 걱정을 안 하실 거다….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던 정태는 잠시 후 현관 비밀번호 풀리는 소리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향했다.

“어머, 아버님!”

정태는 헐레벌떡 신발을 벗고 마트에서 장을 본 비닐 봉투를 든 채 안으로 들어서는 원수경의 모습에 아랫입술이 터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원수경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편을 상대해선 안 된다고 느꼈다.

천연덕스럽게 남편을 향해 싱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급하게 봐 온 장을 식탁 위로 올려놓고 시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많이 시장하시죠? 제가 금방 준비할게요.”

“천천히 해라, 천천히.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요리, 상차림 쪽으로는 워낙에 센스가 좋은 원수경이었기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들을 대충 본 것만으로도 금방 완벽한 상을 차려 낼 수 있었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직접 앞치마를 입은 뒤 고기를 구울 준비를 끝낸 원수경.

그녀는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식탁 쪽으로 오시라는 말을 해 놓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능숙하게 꽃등심 부위를 굽기 시작했다.

“아버님, 약주 한잔하셔야죠?”

“아니다.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해. 술은 됐고, 고기도 너무 많이 굽지 마. 반찬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고기를 굽겠다고 힘들게 밖에를 나갔다 와?”

원수경은 핏물이 적당히 뭉쳐 있는 고기를 가위로 싹뚝싹뚝 잘라서 시아버지 앞접시 위로 한 점을 먼저 올려놓은 뒤, 곧바로 남편의 앞접시까지 먹음직스러운 고기로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원수경은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된 후 고기는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구으라는 시아버지의 말씀에 그제야 전자 스토브의 전원을 끄고 자리에 앉았다.

“수경아.”

“네, 아버님.”

손 회장은 이만하면 식사는 충분하다는 식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정태 역시 함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제 너희들 돌아가고 나서 함씨하고 이야기를 좀 나눴다.”

함씨라는 존재에 원수경은 물론이고, 아내가 어제 본가에서 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정태는 침을 한 번 꿀꺽하고 삼켰다.

“이젠 집에 사람이 없으니까, 이것저것 필요한 게 있으면 함씨한테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어?”

“…네.”

“함씨한테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지?”

평소 아버지하고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사업에 관한 내용이라면 몰라도, 일상 대화를 이렇게까지 직통으로 이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다.

“너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거냐?”

“그건….”

“네 남편이 나하고 같이 다니는 노 실장 시켜서 아침, 저녁으로 내 업무 일과를 보고하게 만든 거하고 똑같은 거다.”

손 회장의 눈은 더 이상 그간 며느리를 대할 때 보여 왔던 인자한 눈빛이 아니었다.

아들 정태를 바라볼 땐 그보다 몇 배는 더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만약 정태 네가 노 실장 시켜서 그렇게 했다면, 그걸 또 내가 알았다면 이 애비가 어떻게 할 거 같으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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